페어러브
신연식 감독, 안성기 외 출연 / 버즈픽쳐스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영화는 파란 하늘을 보여주면서 시작합니다. 아름다운 하늘. 꿈꾸는 듯 흘러가는 하얀 구름. 파란 하늘은 이내 먹구름이 끼더니 빗방울을 쏟아냅니다. 천변만변하는 하늘아래 매일 같은 삶을 살아가는 나이든 사내의 모습. 이런 어두운 하늘에 노을 같은 불꽃이 황홀하게 일어나면서 영화의 타이틀이 뜹니다. <페어러브>.  

 

카메라 수리공인 형만(안성기)은 친한 친구 기혁에게 사기를 당해 조그마한 작업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연락이 끊겼던 기혁에게 연락이 오고, 형만은 기혁을 찾아갑니다. 간암으로 투병하고 있던 기혁은 형만에게 자기 딸 남은(이하나)을 잘 돌봐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애증이 뒤섞인 친구의 부탁으로 형만은 남은을 찾아가고, 그들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순탄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나이에 ‘ㄴ’자가 붙으면 보통의 삶은 안정적이 됩니다. 뭐 연륜이나 경험이 쌓여서 그렇다기보다는, 20대 때의 시행착오를 겪고 난 후, 세상과 타협하게 되는 것이죠. 자신의 길을 찾은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결과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길이 아니면서도 그 선택을 하게 됩니다. 안정감이 주는 편안함과 안락함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죠. 그렇게 우리는 세상에 편입합니다. 안정감을 보장하는 직업은 우리의 전부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관성의 법칙에 몸을 맡기며, 그렇게 삽니다. 신연식 감독의 <페어러브>는 바로 그 굳어진 기성세대들을 향한 이야기입니다.  

형만은 작은 작업대 안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형이 집에 들어와 같이 살자고 해도, 그는 자신의 작업대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오래된 LP와 턴테이블, 그리고 수동 카메라는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멈춰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형만은 그렇게 수십 년간 고립되어 살아왔고, 그에게 있어 작업실은 형만 자신입니다.   



 

그런 형만에게 남은은 마치 유령 같이 등장합니다. 남은의 첫 등장은 형만이 찍은 사진의 피사체로 등장하고, 두 번째는 울음소리로, 세 번째는 스카프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로 등장합니다. 전혀 다른 세대의 애틋한 만남은 마치 현실이 아닌 꿈 같이 보입니다. 그렇기에 형만도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작업실에 다른 사람을 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형만은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지만 끊임없이 반문하고 회의합니다. 그의 사랑은 일반적인 사랑과는 다릅니다. 상대가 친구의 '딸'이기 때문이죠. 남은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형만에 대한 마음을 거리낌 없이 드러냅니다. 하지만, 형만은 다릅니다. 형만에겐 (비록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하찮아 보일지라도) 지금껏 쌓아온 평판 혹은 나잇값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형만이 사랑에 빠지기 위해선 일단 자기 자신부터 설득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너랑 나랑 같이 있는 게 뭐가 문제냐는 거지. 너도 좋고, 나도 좋고, 피해 주는 사람도 없는데." 그리고 그 후엔 그의 주변사람들의 분노와 비아냥거림을 감수해야 합니다. "사실이냐? / 야, 이 새끼야! 이건 아니지. / 늘그막에 연애하면서 유난은..." 그리고 마지막엔 남은마저 설득해야 합니다. "이젠 아저씨 말고 오빠라고 부르는 게 어떨까?"  



 

영화에서 그들의 사랑은 우리가 해왔고 봐왔던 사랑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저 그들이 처한 상황이 특별하기 때문에 그들(이라기 보단 형만)은 사랑 말고 윤리적인 판단까지 고려해야만 했지요.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사랑입니다. 특별한 것 없는 일반적인 사랑입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사랑(Fair Love)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연인이 되면서, 남은과 형만은 자주 부딪힙니다. 남은은 형만에게 "작가가 되는 게 어때요?”"라며 묻지만, 형만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일축합니다. 형만의 나이는 50이고 이미 무언가를 더 시작할 나이가 아니라는 것이죠. 형만은 오히려 남은에게 "너도 아차, 아차 세 번만 하면 내 나이 돼. 그러니 어서 독립할 생각을 해야지"라며 잔소리를 합니다. 이들은 서로 처한 상황에 맞게 자신의 바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남은이 형만에게 작가가 되라고 하는 것은, 사진 수리공이라는 직업이 창피해서가 아닙니다. 그녀는 형만과 사랑을 시작하면서 그의 작업실에서 오래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형만은 이미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한 인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같이 즐기고 같이 공유해야 하지만, 형만의 완고한 세계는 그녀가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하는 20대입니다. 남은의 20대는 미숙하고 불안하지만, 가능성이 열려있는 20대입니다.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닌, 과정의 동력이 분출하는 시기죠. 모든 것이 가능한 그 때, 형만은 그녀에게 따분한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빠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오빠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 오빠는 작업대 유리창 밖으로 안 나와요. 오빠가 그 작업대에서 나오면 밖으로 나오면 같이 성장할 수 있는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게 생길 줄 알았어요. 근데 항상 외로워요. 옆에 있어도 외로워요."

결국 남은은 형만에게 이별을 통보합니다. "내가 나이를 더 먹고 무뎌지거나 감당할 수 있을 때 다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그때서야 형만은 처음으로 사랑에 대해 생각하고 후회합니다. 사랑 앞에서 평등한 존재인데, 조금 더 인생을 겪었다는 이유로 남은에게 함부로 대했다는 사실에 눈물을 쏟습니다. 이별의 아픔은 그의 세계에 처음으로 균열을 만들었습니다. 형만은 남은에 대해, 사랑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의 인생과 가능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얻었습니다.  

 

검진으로 병원에 입원해있는 형만에게 남은이 찾아옵니다. 물론 이 장면이 실제인지, 형만의 꿈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장면이 꿈인지 현실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만은 자신의 작업대를 벗어나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익숙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찾는 것. 물론 두렵고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영화에 등장한 신연식 감독의 말대로 "뭐가 됐건 50대 50이니까" 형만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며칠 잠을 못 잤어요-
어디선가 남은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눈을 뜰 수도, 감을 수도 없었다.
"시험공부를 하느라 정신없이 밤을 새고 과제물 제출하고, 너무 힘들었어요."
나는 커튼 위로 춤을 추는 그림자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오빠 버릇 있잖아요? 얼굴 비비는 거. 너무너무 피곤할 때 하는 건지 그때 알았어요. 너무 몰랐어요, 오빠를."
나는 남은이를 보고 있지 않아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표정과 몸짓으로 말하는지 환히 보이는 것 같았다.
"오빠가 평생 안 변할 수도 있고, 내가 변할 수도 있고, 내가 무뎌질 수도 있고, 오빠가 변할 수도 있고. 어차피 어떻게 살아도 백 프로는 아니니까."
커튼 위로 노을이 붉게 타올랐다.
"매 순간 매순간 어떤 면으로는 오십 대 오십이니까. 우리 다시 시작해요."
남은이 눈동자와 같은 노란 노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우리, 다시 시작해요. 

  



 

 

*덧붙임:  

1. 이번에 발매한 DVD에는 본편만 들어있습니다. 게다가 재생 버튼을 누르면 한글 자막이 나와 일일이 Set up에서 자막을 조절해야하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영화가 어느 정도 흥행했으면 조금 더 나은 사양으로 발매될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아쉽습니다. 신연식 감독님의 다음 영화의 성공을 기대합니다!   





 









 

2. 마지막 인용은 소설 『페어러브』에서 따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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