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 깊숙이 뚫어보면서, 오랫동안 나는 거기 서 있었지. 이상히 여기며, 두려워하며,
의심하며, 전엔 감히 꿈꾸지 못한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을 꿈꾸면서.
그러나 침묵은 깨어지지 않고, 정적은 아무런 계시도 보여주지 않고
거기 들리는 단 한마디는 속삭이는 음성, "레노어!"
나도 속삭였지, 메아리처럼 웅얼거리는 그 소리, "레노어!"
단지 이것뿐 그밖엔 아무것도 없었네.
(......)
"예언자여!" 나는 말했지. "마물이여! 새든 악마든 그러나 예언자여!
신의 뜻으로 보내졌든, 폭풍에 날려왔든
황량한, 마술에 걸린 이곳 황무지
공포의 신이 붙은 이 집에 두려움 없이 날아든 새여!
청하노니 내게 진심으로 말해 주오
있소이까? - 길르앗에도 슬픔을 고치는 향이 있는지? 제발 내게 말해 주오"
갈가마귀는 말했네. "이젠 끝이야"
Deep into that darkness peering, long I stood there wondering, fearing,
Doubting, dreaming dreams no mortal ever dared to dream before
But the silence was unbroken, and the darkness gave no token,
And the only word there spoken was the whispered word, `Lenore!'
This I whispered, and an echo murmured back the word, `Lenore!'
Merely this and nothing more.
(......)
`Prophet!' said I, `thing of evil! - prophet still, if bird or devil! -
Whether tempter sent, or whether tempest tossed thee here ashore,
Desolate yet all undaunted, on this desert land enchanted -
On this home by horror haunted - tell me truly, I implore -
Is there - is there balm in Gilead? - tell me - tell me, I implore!'
Quoth the raven, `Nevermore.'
- 애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갈가마귀(The Raven)」 중에서 -
고등학교 때였을 것이다. 영어 교과서에 실린 포의 「갈가마귀」를 읽으면서(당연히 원문이 아니라, 고딩 수준에 맞게 쉽게 풀어 쓴 글이었다) 무서움보다는 왠지 모를 슬픔을 느꼈던 것은. 물론 포의 시 중, 읽는 이의 가슴을 마구 뜯어낸 시는 「애나벨 리(Annabel Lee)」였으나, 이 「갈가마귀」 역시 설명할 수 없는 애틋함, 슬픔이 묻어났었다. 포의 새로움을 알았다고나 할까. 이전까지 「검은 고양이」나 「어셔가의 몰락」등 괴담작가로만 기억했던 포의 새로움을 느끼게 한 작품이었다.
그 후 20년, 에서 몇 년 모자라는 올해 초, 난데없이 이 시가 '사무치게 읽고 싶어' 찾아 읽어보던 중, 갑자기 예전에 봤던 드라마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레노어처럼,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린, 슬픈 소녀의 얼굴이.
내가 <트윈 픽스(Twin Peaks)>를 본 것은 아마도 「갈가마귀」를 학교에서 배웠을 때와 거의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여름방학을 이용해, 15편으로 출시된 비디오를 하루 한편씩 빌려봤었다. 파일럿이 빠진채 출시된 아쉬운 구성이었으나 그 당시엔 그런 게 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에 답답한 가슴을 두드려가며, 로라 파머를 살해한 범인이 언제 잡히는지에만 신경을 쓰며 보았다.
6번 째 비디오에서야 겨우(그러나 경악할만한) 범인의 정체가 드러나고 7번 째 비디오에서 범인이 잡히고 난 후, 난 미련없이 비디오 시청을 중단했었다. 더 이상 볼 필요가 없었다. 내겐 오로지 '로라 파머를 누가 죽였'는지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니까. 그리고 그녀를 잊었다. 당연한 일이다. 누가 TV 드라마 주인공을 기억하고 있을까?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사랑이 뭐길래>에서 하희라 씨가 맡은 역할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래도 대발이는 기억이 나는데... ㅡ.ㅡ;;;
그러다 3년 전, 우연히 이 드라마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유는 당시 본 <카니발(Carnivale)>에 출연한 마이클 J 앤더슨을 보고 불현듯 <트윈 픽스>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범인이 누구인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후반부는 보지 않았기 때문에 별 고민없이 선택할 수 있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내가 그당시 굉장히 많은 부분을 놓치고 오해했다는 것을 알았다. <트윈 픽스>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장르 외피를 뒤집어 쓰고 있지만, 실상은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 - 정확히 표현하자면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 백인 중산층 계급) - 에 대한 추악함과 위선을 까발리는 이야기였다. 마을에서 사랑받았던 한 여자아이의 죽음으로, 겉으로는 평화로운 전원 마을 트윈 픽스가 외부인(FBI 수사관 데일 쿠퍼)의 개입으로 그들의 진짜 모습을 감추어왔던 치양막이 벗겨지는 자멸의 드라마였다.
그러면서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 모든 게 로라 파머의 죽음으로 인해 드러난 사실이라는 것을. 물론 '영매' 능력을 지닌 FBI 수사관 데일 쿠퍼의 적극적인 수사 덕분이었지만, 로라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트윈 픽스에 사는 마을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평화에 만족하며 수많은 죄를 짓고 살아갔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포의 「갈가마귀」를 읽으면서 로라가 떠올랐던 것은. 달조차 떠오르지 않은 진한 어둠, 숲속에서 들리는 동물소리, 바람소리에 떨며 나무 뒤에 웅크리고 숨어있는 로라의 모습이 떠오른 것은. 드라마를 보면서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만 기억할 뿐, 단지 범인이 잡히기만 기대할 뿐, 그녀가 왜 그런 이중 생활을 했고, 살해당하기 전,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선 그 누구도 관심이 없었다.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한 여자아이의 죽음. 그 죽음을 둘러싼 마을 사람들의 추악함. 살인과 마약과 근친상간과 매음과 강간과 불륜과 파괴와 위선이, 잣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포근한 바람과 지랄맞게 좋은 커피와 죽여주게 맛있는 체리파이와 누구에게나 친절한 이웃들이 공존하는, 선과 악이 구분되어 있지 않고 함께 혼재되어 있는, 어디엔가 있을 것 같지만 실재하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현존하는 세상, 그리고 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내가 지금 발을 붙이고 사는 지금 이 세상과 너무나 흡사하다고 느끼는 것은 내가 너무 과민한 것일까?
이것이 이 글을 쓰기로 결심한 가장 큰 이유다.
물론 다른 이유들도 있다. 올해가 <트윈 픽스>가 방영한지 꼭 20년이 되는 해라는 점 그리고 해외에 완전판 DVD가 발매됐으나 국내에는 <시즌 1>만 발매되고, 그나마도 절판했다는 점도 그렇다. 그리고 이 드라마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해서 '자료정리'의 목적도 지니고, 다른 누군가가 이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를 하길 기다렸는데, 여지껏 아무도 없어서 '감히 내가' 쓰려고 한다. <트윈 픽스> 관련 (잡다한) 자료 모음이라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언제까지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가능한 매 에피소드별로 이야기를 끌어낼 계획이다.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볼 일이다. 이 모든 게 내겐 소중한 경험이 될테니까.
* 덧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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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음 글은 2월 24일 오전 9시에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