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엔 두 편의 '재난'에 관한 영화가 개봉됐었다. 상반기엔 『노잉(Knowing)』, 하반기엔 『2012』. 두 영화의 완성도는 서로 다르지만, 하나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종말의 순간을 대비하는 영화다. 『노잉』은 이미 예정된 종말에 대한 인간의 무력감을, 『2012』는 그 무력감 앞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인간의 아웅다웅을 그렸다. 자포자기의 무력함은 사람을 자학적으로 만든다. 그 두 영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무력감을 조롱하듯, 엄청난 자연재해 스펙터클을 관객에게 선사했다. 글자 그대로 '죄의식을 동반한 즐거움(Guilty Pleasure)'. 그런면에서 존 힐코트 감독의 『더 로드(The Road)』는 참으로 심심한 영화다. 이 영화는 '재난'을 그린 것이 아니라, 재난 '이후'를 그렸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세계가 잿더미로 변했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생명체가 자취를 감추었고, 살아남은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살아 남은 사람들 역시 음식이 부족해 식인을 한다. 이런 세상에 살아남은 아버지(비고 모르테슨)와 아들(코디 스미스 맥피)은 남쪽으로 간다. 영화는 그들이 남쪽으로 가는 동안 겪는 에피소드를 보여준다.
이 영화를 홍보하면서 가장 많이 언급 하는 이름은 원작의 저자인 코맥 매카시이다. 소설을 읽지 않아, '감히 성서와 비교된다는 원작'이 얼마나 굉장한 걸작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니 그 상찬이 괜한 말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앞서 『셜록 홈즈』리뷰에서도 얘기했지만) 영상은 활자를 이길 수 없다. 깊이있는 원작을 표면에 부유하는 영상이 똑같이 표현할 길은 없다. 원작이 있는 영화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그 분위기이다. 잿더미로 변한 세계. (먹을 수 있는)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고, 나무들마저 스스로 쓰러지는 황폐한 세계. 푸른 바다마저도 잿빛으로 물든 종말 이후의 세상. 그런 점에서 영화는 그 분위기를 잘 표현했다. 목 매단 시체를 별다른 동요없이 바라보는 어린 아들의 모습에서, 그들이 이런 세상을 오래 겪어왔음을 알 수 있다. '나쁜 사람들(식인을 하는 사람들)'을 대비해 자살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아버지의 모습 또한 끔찍한 생존의 한 방식이다(산채로 잡히면 강간 당하는 끔찍한 고통을 당하고 잡혀 먹힐테니까).
살기 위해 인간임을 포기한 채 살아가는 악다구니들 속에서 인간으로써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아들 역시 힘이 들어 자살을 꿈꾸지만(!), 아버지는 견뎌내자고 한다.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불씨를 옮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불씨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희망'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불씨는 자주 흔들린다. 음식 앞에서, 생존 앞에서, 혈육 앞에서. 아버지는 이기적이 되어간다. 희망은 이기적인 마음에선 꿈꿀 수 없다.
영화에선 기적같은 순간이 있다. 작은 깡통안에서 딱정벌레가 날아가는 모습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 기적을 바라본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하듯, 스스로 치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사람들은 서로 믿지 못하고 살인을 저지른다. 아직 기적은 인간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아니, 기적이 인간을 찾아왔는데, 인간은 그걸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인류에게 있어 최대의 재난은 인류 자신인 셈이다.
영화의 마지막, 아들은 불씨를 꺼뜨리지 않을 수 있을까? 불씨는 홀로 있을 땐 한없이 약한 존재이지만, 그 불씨가 모이면 횃불이 된다. 부디 '그들'이 횃불을 꺼뜨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덧붙임
1. 영화제에 별 관심은 없지만, 이 영화는 2010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LA 컨피덴셜』이 될 확률이 농후합니다. 커티스 핸슨 감독의 『LA 컨피덴셜』은 1997년 가장 잘 만들어진 영화 중에 하나였으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타이타닉』에 침몰했었죠. 올해 아카데미 역시 (그때 그!)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에 몰빵할 것 같습니다.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말이 생각납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만들어진 해에 당신의 최고작을 만들지 말라."
2.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an)』가 개봉할 때는 매카시 얘기는 하나도 없더니 『더 로드』개봉할 때는 온통 매카시 얘기 뿐입니다. 한국의 독서 인구가 늘어났다기 보다는 홍보에 감독이나 배우에 비빌 구석이 없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어쨌든 소설은 꼭 읽어봐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