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 전쟁처럼 눈이 내린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가로등 아래 모여서 눈을 털고 있다. 나는 어디로 가서 내 나이를 털어야 할까? 지나간 봄 화창한 기억의 꽃밭 가득 아직도 무꽃이 흔들리고 있을까? 사방으로 인적 끊어진 꽃밭, 새끼줄 따라 뛰어가며 썩은 꽃잎들끼리 모여 울고 있을까. 


     우리는 새벽 안개 속에 뜬 철교 위에 서 있다. 눈발은 수천 장 흰 손수건을 흔들며 河口로 뛰어가고 너는 말했다. 물이 보여. 얼음장 밑으로 수상한 푸른빛.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면 은빛으로 반짝이며 떨어지는 그대 소중한 웃음. 안개 속으로 물빛이 되어 새떼가 녹아드는 게 보여? 우리가.  


                                                                        - 기형도 「도시의 눈 - 겨울 版畵 2」전문 - 

 

   詩와 함께 한 오후.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낭만을 느끼기보다는 죽음을 꿈꾸었던 그가 너무도 안타깝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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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트 2010-01-06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젯밤에 맥주를 홀짝이며 <입 속의 검은 잎>을 읽었습니다. 잊고 있었는데, 시집 뒤에 김현이 시평겸 추모사를 썼군요. 김현은 끝에 이렇게 덧붙입니다. "누가 기형도를 따라 그 길을 갈까봐 겁난다. 그 길은 너무 괴로운 길이다." 그러곤 '가장 좋은 선배' 였다는 김훈의 추모사를 언급합니다. "썩어 문드러져 공이 되어라..." 인상 깊더군요.
그리고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이십대에 쓴 기형도의 시들은 이상하게도 우리가 서른살이 넘어야 제대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기형도의 시대는 사람을 너무 빨리 늙게 만드는 시대 아니였을까. 우리 시대는 사람을 너무 느리게 성장시키는 시대 아닐까... 뭔, 소리인진 잘 모르겠지만^^ 살짝 그런 생각이...

Tomek 2010-01-07 10:51   좋아요 0 | URL
그가 생각하는 젊음은 '후회'로 가득찬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신이 세상에 편입하는 것이 '늙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가 생각하는 성장은 늙음이 아닐런지. 그리고 그 늙음을 그는 '추하다'고 했었죠. 늙는 것 보다 그는 정체를 택한 게 아닌가. 그런 멈춤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저 역시 무슨 소린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