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이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 기형도 「정거장에서의 충고」 전문 -
기형도를 알게 된 것은 1999년 군대에서 읽던 한 스포츠 신문의 칼럼에서였다. 가수 조영남 씨가 쓴 칼럼이었었는데, 그는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맺었다. "기형도를 몰라주는 대한민국이 싫다!" 그 때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기형도'라는 이름의 울림때문이었다. 요절한 시인의 너무나 음악적인 그 이름. 그 노래를 잊지 못해 상병 휴가를 나갔던 그 해 서점에 들러 『기형도 전집』을 샀다. 그리고 그 시집을 들고 귀대했다.
처음 그의 시집을 읽었을 때 느낌은 실망감이었다. 그의 시는 연애편지에 넣을 만한 문구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을 예비하는 듯한 불길한 시어들을 사랑을 구걸하는 군바리의 연예편지에 넣을 수 있는 강심장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기형도는 내게 잊혀졌고, 그늘진 책장 한 구석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가 요절했던 그 나이를 몇 해 지나서야 그의 시를 다시 읽게 됐다. 죽음에 대한 예비, 어쩔 수 없어하는 허무함, 희망이 없는 세계에 희망 하기 등이 눈에 띈다. 세상에 들어가지 못하고, 세상을 겉돌며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너무 슬프다. 그는 정말 그의 죽음을 예견했던 것일까? 서른이 되기 며칠전에 맞이한 그의 죽음이 자연사라는 사실은 왠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시에는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2010년을 그의 시와 함께한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올 한해는 '희망을 이야기하'는데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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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20주기 추모 문집. 그의 지인과 문우들의 글과 다양한 해석이 담긴 비평가들의 비평이 실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