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聖域이기 때문이다.
 
 

                                                                                                    - 기형도 「안개」 중 -

 

   마치 기형도의 시처럼,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는 모든 것이 낯설고 혼란스럽다. 소설의 서사를 책임지는 '나' 조차도 조심스럽고 확신이 없다. 그렇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일은 어떤 행위일까? 손가락. 나를 비껴가는 저 손가락. 누군가를 지목하고, 죽고 죽이는 저 손가락. 

   소설은 1930년대 간도땅에서 벌어지는 민생단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일제 치하. 조선 독립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일본군도 아닌, 마적단도 아닌 같은 동족끼리 총구를 겨누고 서로 '학살'한 사건이다. 그들은 왜 서로를 죽였을까? 왜 서로를 죽일 수 밖에 없었을까? 김연수는 그 당시 '이데올로기'나 '독립 따위'와는 상관없었을 가장 평범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해서 그 비극의 원인을 따라간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해 태어난 '김해연'은 '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용정으로 파견되어 측량기사로 일한다. 그 와중에 간도임시파견대의 '나카지마' 중대장과 친하게 되고 민생단 박길룡의 소개로 이정희와 사귀게 된다. 그러나 행복함도 잠시, 해연은 일본경찰에 연행되어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이정희가 공산당원이었고, 파견대의 정보를 빼내왔다는 사실, 그리고 그 이정희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공산당원이었다가 전향해 경찰 보조원으로 일하는 '최도문'에게 듣게 된다. 해연은 정희가 죽은 곳에서 자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충격으로 말문이 막히고 만다. 그후 그는 대련에서 한 사진관에서 일을 하고 그곳에서 심부름일을 하는 '여옥'과 사랑에 빠진다. 해연은 여옥과 경성으로 돌아갈 계획을 하고, 사진관 식구들과 여옥의 누이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유정촌에 간다. 결혼식이 벌어지는 날, 토벌대의 습격으로 여옥과 해연을 제외한 유정촌의 모든 사람들이 학살당한다. 여옥은 발을 잃었고, 해연은 '최도문' 덕분에 목숨을 구한다. 이 일로 그는 유격근거지에 남아 혁명에 동참한다. 그리고 그 후 해연은 '지옥'을 겪는다. 

   민생단 사건은 아직까지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다. 이전에 학교에서 항일 독립운동사에 대해 가르칠 때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에 대한 독립운동사는 항상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에서도 지워버린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접한 것은 고 2때 출간되기 시작한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을 통해서였다. 

   이념이라는 것, 나와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 행동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결국에 남는 것은 광기에 기반한 감정이라는 사실은 차라리 외면하고픈 심정이다. 이성을 포기하고 감정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 지옥같은 상황을 김연수는 때로는 흐릿하게, 때로는 모호하게 흩어놓았다. 누구도 동지의 머리에 총구를 겨냥한 그 밤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날 확실한 것은 시체들 뿐이었다. 시체들만이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스스로 증명할 수 있었다. 죽고 나서야 내가 누구인지를 밝힐 수 있었던 그 모호함. 그 혼란스러움. 이 모든 것이 단지 나라 없는 '난민민족'의 대가라면, 이 대가는 너무나 가혹하지 않은가! 

   김연수는 마지막까지 결말에 대해 고심했다고 했다. '그'를 복수할지, 용서할지. 김연수의 선택은 (적어도 내게는) 큰 울림을 가져왔다. 모호안 안개 속 밤은 그날로 족하다. 하지만 대가 없는 독립은 가혹한 법이다. 그날 1941년엔 해연은 '그'를 용서했을지 몰라도, 우리 민족은 아직 서로를 용서하지 못했다. 밤은 아직도 '피의 노래'를 계속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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