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제국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김영하 작가의 『빛의 제국』이라는 제목은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에서 차용했다. 이것은 뭐 굉장한 비밀이 아니다. 책 표지에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실려 있으니까. 그리고 소설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면 윗부분은 환한 낮인데 아래 부분은 어두운 밤이다. 그가 그린 세계는 밤과 낮이 공존하는 기이한 세계다. 하지만 언뜻보면 그 차이를 구별하기 힘들정도로 잘 어울려 있다. 김영하는 마그리트의 그림을 빌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미리 알려준다. 『빛의 제국』은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기이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형식적인 면에서 『빛의 제국』은 굉장히 발랄하다. 목차를 훓어보면 작가가 어떤 형식을 취했는지 감이 딱 온다. 오전 7시에 시작해서 그다음날 오전 7시에 끝난다는 설정은 리얼타임 드라마를 표방하는 『24』에서 차용했(을 것 같)다. 얼핏 지루할 수 있을법한 내용을 한시간대로 끊어 놓아 독자들의 긴장을 쉽게 풀 수 없게 만들었다. (실제로 24장으로 나뉘지는 않았다 오후 11시부터 다음날 오전7시 사이는 오전 3시와 5시로만 나뉘었다. 특정 시간대가 비는 것에 실망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형식적인 함정에 빠지지 않은 작가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소설이지 드라마가 아니니까.) 그리고 커다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각 등장인물들의 과거사가 나와서 캐릭터를 설명해주는 방식은 역시『Lost』에서 차용한 게 아닌가 싶다.(물론 이런 플래시백은 예전부터 소설에 있어왔지만, 『24』때문인지 자꾸 각 장별로 이야기를 끊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 그렇기에 『Lost』를 언급해봤다.) 김영하는 정말 그의 말대로 모든 매체와 겨루는 소설을 쓴 것이다. 

   소설은 팔리지 않는 영화를 수입하는 '남파간첩' 기영, 그의 아내 마리, 그들의 딸 현미 그리고 기영을 쫓는 박철수의 하루를 그리고 있다. 기영은 남파간첩이었으나 북에서 그의 존재를 잊어버려 근 10여년간 아무 일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북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21년간 북에서 지내왔고 21년간 남에서 살아온 기영은 당의 명령을 따라야할지 자수를 해야할지 고민한다. 그를 감시하고 있던 박철수는 기영과 그의 아내 마리를 감시한다. 마리는 젊은 애인 성욱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성욱의 친구인 '판다'와 셋이서 모텔에 들어가 난교를 벌인다. 딸 혜미는 평소 맘에 들어했던 친구 진국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진국의 집에 간다. 폭풍같은 하루가 마무리되는 밤, 기영과 마리는 서로 그들만의 비밀을 폭로하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닫고 헤어진다. 그리고... 

   소설의 큰 축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남파간첩인 김기영이지만, 작가는 마리, 현미, 박철수에게도 거의 동일하게 이야기를 배분했다. 북의 체제에 생애 절반을 살아왔고, 남의 체제에 생애 절반을 살아온 기영. 그는 그의 비밀을 숨기고 살아왔다. 열심히 살아가고 배가 나온 중년이자 평범한 아버지. 하지만 그 자신은 분열증적인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이것은 기영뿐만이 아니다.  

   그의 아내 마리 역시 분열증적인 삶을 살아왔다. 정숙한 엄마이자 커리어 우먼인 그녀는 불륜인 그녀의 애인 상욱과 그의 친구와 함께 난교를 벌인다. 그리고 생각한다. 자신의 삶이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지금껏 결정한 선택들이 지금 자신을 만들어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 기영의 고백으로 새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얻는다. 그녀는 남편에게 자신이 오늘 겪은 일을 얘기하고 남편을 버린다. 그것 또한 그녀의 선택이고 그 선택이 내일의 그녀를 만들어 갈 것이다. 

   현미 역시 자신이 은근 좋아하는 진국의 집에 가기 위해 그녀의 단짝 친구 아영을 이용하고 거짓말을 한다. 현미는 그런 짓이 딱히 죄는 아니지만, 왠지 모를 꺼림찍함을 느낀다. 상대방을 상처주지 않지만, 남모르는 비밀을 숨기고 사는 것. 그리고 그 비밀이 까발려졌을 때, 내심 모른척하며 서둘러 봉합한 채 살아가는 것. 그게 어른들의 세계다. 현미의 부모인 기영과 마리가 살아가는 세계다. 그리고 현미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갈 것이다. 

   다시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으로 돌아가서. 낮과 밤이 공존하는 기이한 세계. 위 하늘은 자연광이 비치지만, 아래 집에는 인공빛으로 밝히고 있다. 밤을 낮으로 만들려는 인간들의 노력은 얼마나 가상한가. 하지만 그 만들어진 빛은 자연에 비하면 얼마나 초라한가. 인공의 빛으로 어둠을 밝힐 수 있을까. 왜 하늘의 빛은 인간이 만든 구조물까지는 들어오지 못하는 걸까. 인간은 온전한 빛으로 살 수 없는 것일까. 인간은 이 세상에서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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