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중에 당신이 아주 많이 슬퍼했으면 좋겠어. 슬픈 영화 말고 재밌는 영화를 보다가도 문득 내 생각나서 펑펑 울었으면 좋겠어.
영화의 시작은 한 여인의 저주와도 같은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빗방울, 젖은 머리, 감지 않은 눈, 싸이렌소리, 남자의 비명 그리고 화면에 등장하는 타이틀 'M'. 영화는 심상치 않은 기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위의 내레이션은 자막으로도 보인다. 이 저주는 타이핑된 유서처럼 보이고, 영화는 계속 불길한 기운이 감돈다.
이명세 감독의 『M』은 전작 『형사』의 실패 후에, '절치부심'해서 만든 영화다. 여기서 '절치부심'이라고 쓴 이유는, 그가 이번에는 작정하고 '알기 쉬운'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영화는 『형사』에서 보인 감독의 독단성이나 나르시시즘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야기가 단선적이지도 않고(물론 장르 특성상 좀 꼬아놓은 부분이 있지만, 그렇게 불편한 정도는 아니다) 계속되는 반복으로 이야기의 비밀이나 반전을 쉽게 따라갈 수 있게 했다. 내용 또한 먼나라 얘기가 아닌, 설레고 시린 첫사랑 이야기이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다. 실패할 이유가 없어보이는데도 실패했다. 우리들은 왜 이 영화를 외면했을까?
영화의 제목은 『M』이다. 이 제목은 많은 것을 암시한다. 영화 초반 미미(이연희)가 민우(강동원)를 봤을때, 미미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을 지금부터 Mr. M이라고 부르겠습니다. M은 제가 좋아하는 첫 글자거든요. 모델리아니, 모짜르트, 달, 문." 이 대사는 맥거핀이다. 이 영화에서 M이 지칭하는 것을 찾는 것은 재미있지만, 그게 큰 의미를 차지하지는 않는다. 영화 내용을 언급하면서 M을 한 번 찾아본다면 이렇다.
최연소 신춘문예 당선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민우(Minwu)는 자꾸 누군가가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는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고 치료제(Medicine)를 받는다. 그를 쫓아다니는 미미(Mimi)는 우연히 민우가 카페에서 전화통화하는 것을 듣는다. 민우의 어머니(Mother)가 사채(Money)를 빌려썼다고 휴대전화(Mobile Phone)로 연락을 했다. 민우는 출판사 편집장을 만나 선인세(Money)를 달라고 부탁한다. 민우가 어딘가 가는 길을 미미가 쫓아가다가 거울(Mirror)속에서 길을 잃고 뤼팽-바에 들어간다. 바의 마스터(Master, 전무송)는 미미에게 먼저 와 있는 민우쪽으로 자리를 안내하고 둘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민우는 술에 취해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끊어진 기억(Memory)을 찾아 다시 그 뤼팽바를 찾는다. 마스터는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고 민우는 친구에게 온 전화를 받고 고향 결혼식(Marriage)에 가고 그곳에서 미미를 기억해내고 수소문한다. 그러나 미미는 오래전에 미쳐서(Mad)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M'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고, 이 영화 전체를 설명하는 열쇳말일 수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M들은 이 영화를 나타내는 장치다. 이명세(심지어 감독 이름도 M이다)는 이번 영화를 M이라는 '글자'로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문자와 이미지는 서로 다른 것이지만, 그것들이 사물을 불러일으키는 작용은 같다. '말'이란 동물을 말이란 '글자'를 보고 그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나, 말의 '실체'를 보고서 인식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어쩌면 이명세는 문자를 개념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를 꿈꾼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에는 유독 글자가 많이 나온다. 그것이 이야기의 전달이나 극 중 인물의 생각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가 아닌, 인물의 '감정'을 나타내기 위한 오브제로써 사용된다. 이토록 진지하게 영상과 문자를 고민하는 치열함이라니!! 하지만 현재의 관객들에겐 이런 것은 '지 잘난 멋'으로 인식되기 일쑤다.
영화의 장르를 이야기하자면 전반부는 미스터리(Mystery)고 후반부는 멜로(Melo)다. 영화는 미미의 시점, 민우의 시점 그리고 민우와 곧 결혼할 (갑부) 출판사 사장의 딸 은혜(공효진)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이들의 시점은 구분되어 있지 않고 혼재되어 있다. 내용은 간단하지만, 이들 세 명 화자의 시점이 구분되어 있지 않아서 아마도 일반 관객들은 혼란에 빠지기 쉬울 것이다.
90년대까지는, 그래도 소위 말하는 '예술영화'라는 것이 소비되어 왔다. 타르코프스키나 키에슬롭스키의 영화들이 극장에 걸리고 흥행(!!)도 되는 시기였다. 그것이 지적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행위든, 스노브들을 양산하는 행위든간에. 그 때는 적어도 영화를 보고 "왜?"라는 질문을 던졌었다. "왜 이 감독은 이야기를 이렇게 끝냈을까?", "왜 그는 떠나지 않고 다시 돌아왔을까?", "왜 그녀는 달리는 버스에 뛰어들었을까?" 하지만, 지금의 관객들은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관객은 감독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는다. 감독의 선택에 의문을 갖지 않는다. '내'가 이해를 못하면 간단히 '쓰레기'취급을 해버린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민우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을 때 정신과 의사가 아는 척을 하는 장면. "아, 그 신문에 연재하는 소설 쓰시는 분!" 그러자 민우가 대답한다. " 그거 보셨어요? 그건 소설이 아닙니다." 의아해하는 의사의 질문. "그럼 뭐죠? 에세이? 산문?" 민우의 대답. "쓰레깁니다." 대중의 입맛에 맞추어 쓰는 소설이 '쓰레기'라고 생각하듯이, 그 또한, 그런 영화를 '쓰레기'라 생각하는 것 같다. 현대의 관객들과 이명세는 이렇게 부딪힌다.
미미와 민우의 기억(Memory)을 중재해주는 뤼팽바가 거울(Mirror)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거울은 자신의 모습을 반추할 수 있다. 자신을 뒤돌아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묻어놓고 애써 지우려했던 기억들도 돌이킬 수 있는 반성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곳 뤼팽바는 세 번 나온다.
첫 번째는 미미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민우를 만난다. 하지만 민우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한다. 차가운 존재다. 그의 모습이 스냅사진처럼 보인다. 사진 역시 기억과 추억을 불러일으킬 오브제다. 그녀에게 있어서 민우는 사진의 존재로 남아 있다.
두 번째는 민우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이곳에서 그는 끊어진 필름(기억) 한조각의 실마리를 찾는다. 이 바가 언제 만들어졌나는 민우의 질문에 바의 마스터는 이렇게 얘기한다. "그 날을 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11년전, 8월 20일 일요일. 그 날 엄청나게 많은 비가 왔었죠." 그 날은 민우와 미미가 처음으로 데이트를 하고 첫 키스를 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날이다. 그리고 그날은 민우와 미미가 데이트를 하려고 했던, 미미가 (사고로) 죽고 민우는 그런 미미를 애써 지워버린, 서로의 안타까움, 애증이 발생한 날이다. 그 날, 그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제서야 민우는 잃어버렸던 필름 한 조각을 찾는다.
그리고 세 번째, 뤼팽바는 미미의 기억과 민우의 기억이 만나는 장소이다. 자신의 죽음을 인정한 미미의 기억과 잃어버렸던 첫사랑을 떠올린 민우의 기억이 만나 해후한다. 이제서야 미미는 앞에서 얘기했던 저주와도 같았던 말을 민우에게 이야기한다. 그 말은 저주가 아닌 더이상 만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회한이자 작별인사다.
나는 나중에 당신이 아주 많이 슬퍼했으면 좋겠어. 슬픈 영화 말고 재밌는 영화를 보다가도 문득 내 생각나서 펑펑 울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내가 떠난 뒤에 당신이 아주 괴롭고 아팠으면 좋겠어. 우리가 흥얼거렸던 그 노래를 들을 때면 내가 보고싶어서 가슴을 치고 괴로워했으면 좋겠어.
그제서야 이룰 수 없었던 첫사랑의 기억은 떠나가고,(민우가 지운 게 아니라, '미미의 기억'이 떠난 것이다) 그녀는 유서와도 같은 말을 남긴다. 이 말은 영화 맨 처음과 같이 내레이션과 자막으로 보여진다.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떠날려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을 떠남으로써만 당신을 사랑합니다.
첫사랑 미미와의 작별이 민우와 은혜의 결혼(Marriage)과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소설가인 민우에게 '글자'로 남아있다. 그가 소설을 쓰는 동안, 글을 쓰는 동안, 그는 미미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의 아내에게는 비밀로 한 채...
"무슨 생각해?"
"응? 아니, 아무것도."
*덧붙임
1. 동창 결혼식 장면에서 신랑 신부가 부르는 노래는 토셀리의 「세레나데」입니다. "사랑의 노래 들려온다 / 옛날을 말하는가 / 기쁜 우리 젊은날" 이명세 감독은 이 노래를 통해 그의 첫 시나리오 작품까지 거슬러 올라간 셈입니다.
2. 첫사랑의 기억의 중재자이자 저승사자인 마스터(Master)를 전무송 씨가 맡은 것은 재밌습니다. 그는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영민(안성기)의 사랑인 혜린(황신혜)를 가로채고 망가뜨리는 역을 맡았고, 『개그맨』에서는 개그맨 이종세(안성기)의 '꿈'인 영화감독을 맡았습니다. 이 영화에서 전무송 씨는, 나이는 숨길 수 없지만, 매우 근사한 모습을 보입니다.
3. 미처 언급하지 못했으나 영화에 나온 M을 마저 적어봅니다. 매너(Manner) , 입(Mouth), 노래 「안개(Mist)」, 성냥(Match), 갑작스런 이사(Move), 민우의 뮤즈(Muse), 영화-활동사진(Movie), 모나리자(Mona Lisa) 미용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