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 - Gagma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감독 이명세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어떨까? 대충 소급해보자면 이럴것이다.  

   '충무로에 혜성같이 등장해 배창호감독과 『기쁜 우리 젊은날』을 만들고, 『나의 사랑 나의 신부』로 대박을 치고 그 후로 망하는 영화만 만들다 세기말을 앞둔 1999년,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 국내 흥행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다.(이영화 때문에 박중훈은 조나단 드미와 『찰리의 진실』이라는 영화를 찍고, 워쇼스키 형제는 빗속 탄광촌에서의 결투장면을『매트릭스3』에서 오마주를 바쳤다) 그 후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돌아와 『형사:the Duelist』를 만들었으나 흥행에 실패하고, 절치부심하여 만든 『M』이 흥행에 실패. 현재 차기작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흥행면에서만 본다면 틀린 말은 아니다. 흥행이란 어떻게 보면 관객과의 타협이라고 볼 수 있다. 흥행이 잘 된 영화는 대중적인 영화이고, 대중적이란 말은 대중에게 친숙하거나,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보여준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면에서 이명세는 항상 애매한 위치에 서있었다. 그가 그려내는 미장센은 한국 영화사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을 보여주지만, 그의 이야기는 굉장히 불친절하거나, 아주 간단한 이야기이다. 흥행을 한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결혼을 한 두 남녀가 위기를 겪고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이고,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형사가 범죄자를 쫓고 결국 잡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스토리텔링에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작은 어떠했을지 매우 궁금했다. 감독 데뷔를 위해 어느정도 대중의 기호에 맞추어 영화를 찍었을지, 아니면 뚝심대로 밀고 나갔을지. 이 글은 얼마전에 산 [한국영화 클래식 콜렉션]에 수록된 이명세 감독의 『개그맨』을 보고 쓴 글이다.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당연히 난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고, 이명세에 대한 내 생각도 철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이 영화엔 특별한 것이 있다.    

 

   영화는 어느 여름날 오후, 이발소에서 시작한다. 면도를 하기위해 의자에 누워있는 이종세(안성기)에게 이발사 문도석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해댄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여름철 보양음식 개고기에서 시작해서, 연예인 이주일의 세금 1억, 영화이야기가 계속 흘러나온다. 이종세는 나이트클럽에서 개그맨으로 살아가고 있으나, 그의 꿈은 '4천만 국민이 보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영화 촬영장을 어슬렁거리다 쫓겨난 이종세는 어느날 극장에서 갑자기 등장한 오선영(황신혜)을 만나게 되고 그녀를 집에 초대한다. 또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탈영병(손창민!!)이 선물처럼 주고 간 총을 가지고 이종세는 영화를 찍으려 한다. 거기에 오선영과 문도석이 합류, 그들은 전국을 누비며 강도짓을 해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다 정체가 탄로나 도망가는 도중 도석이 실수로 시골의 정비사 청년(김세준!!)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들은 밀항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이미 만들어진지 20여년이 지났으니까 내용에 대해 감히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는 몽롱하고 권태롭고 나른한 어느 여름날 이발소에서 면도를 하기 위해 잠깐 누워있던 이종세의 '한나절 꿈'이다. 아니 꿈이라기 보다는 '망상'이라는 말이 적합하다. 망상의 세계엔 논리가 필요하지 않다. 종세의 망상속의 인물들은 너무나 극적이고 작위적이다.  

 

 

고다르 혹은 팜므 파탈 오선영과 이종세  

 

   오선영은 종세가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을 때 갑자기 등장한다. 이 전 장면은 그가 자신의 집에서 식사를 하면서 영화감독으로써 수상 소감을 발표하는 장면이었다. "영화 예술은 어두운 밤을 뚫고 달리는 야간 열차와 같다"는 트뤼포의 말을 인용한 그는 (그의 잘못으로) 머리에 물을 맞고 정신을 차린다. 그 다음장면에서 오선영이 마치 영화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그에게 다가온다. 오선영은 '꿈'같은 존재다. 그런 그녀가 극장에서 등장한 것은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영화는 꿈이다. 그러나 관객은 꿈꾸어서는 안된다." 트뤼포의 동료인 고다르의 말이다. 그러나 종세는 꿈을 꾸고 있다. 깨어있지 않은 그에게 그녀는 악몽이 된다.  

 

 

잭 니콜슨, 적룡, 허장강 그리고 문도석 혹은 배창호  

 

   문도석은 영화배우를 꿈꾸는 이발사이다. 문도석을 연기한 배창호는 영화 감독이다. 그는 1년 전, 이 영화의 주인공인 안성기와 황신혜를 주연으로 『기쁜 우리 젊은날』을 찍었었다. 그 때 조감독으로 참여했던 이명세가 배창호를 주인공 중 한명으로 끌어들인것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지만, 정작 감독은, 영화 구성의 핵을 차지하는 연기자를 대체하지 못한다. 음악, 미술, 촬영 등은 감독의 의도대로 이끌 수 있지만, 연기는 통제하지 못한다. 이명세는 완전작가로서의 영화를 꿈꾸었던 것일까? 그의 분신인 이종세가 채플린을 따라 하는 것은 그래서 더욱 의미있게 다가온다. 채플린은 자신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고 감독을 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문도석은 이종세에게 맞고 오선영에게 모욕당하기 일쑤다. 마치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배우들에게 감독이 호되게 당하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너무 들어간 것일까?   

 

  

찰리 채플린, 이명세 그리고 이종세   

 

   감독의 자아가 가장 많이 개입된 캐릭터 이종세는 개그맨이다. 현실에선 개그맨이면서 그는 영화감독의 꿈을 꾼다. 그는 언젠가 '4천만이 볼 불후의 명작'을 만들 것이라 공언하는 모습은 이명세가 자신에게 다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혹은 길게 돌아 『잘 알지도 못하면서』구경남의 다짐 "나도 다음에 2백만 관객이 보는 영화를 만들테다."이 생각난다. 이종세의 공언에 비하면 구경남은 얼마나 현실적(!!)인가!) 하지만 그가 영화를 찍는 것은, 연기를 하는 것은, 결국 범죄가 되어버리고, 그 영화는 4천만 국민이 다 보는 TV뉴스로 전이되고 만다. 그는 영화가 결국엔 현실을 능가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그것도 데뷔작에서!! 

   이종세의 공간은 두 개로 나뉘어져 있다. 하나는 그의 집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일하는 나이트클럽의 무대다. 그의 집 안엔 (덕수궁의) 벤치, (혜린 회사 앞의 빨간) 전화부스, (리버사이드 카페) 레스토랑의 탁자가 있다. 그리고 그 소품들은 『기쁜 우리 젊은날』에 등장했던 의미있는 소품이다. 그의 공간은 그 자체로 영화(세트장)이다.  

 

  

이주일의 무대에서 이주일이 낸 세금만큼 돈을 벌고 이주일의 노래를 불러 이주일이 되다. 

 

   이종세의 무대는 세 번 보여진다. 첫 번째는 그가 일상에서 밥을 버는 일터의 공간으로 보여진다. 그는 열심히 나이트클럽에 찾아온 손님들을 향해 연기를 한다. 두 번째는 선물의 공간이다. 텅빈 무대에서 갑자기 등장한 탈영병이 선물을 건네주듯 그가 탈취한 총을 주고 사라진다. 세 번째는 고백의 공간이다. 그는 그의 관객들을 향해 그가 처음으로 저지른 범죄를 고백하지만, 그 고백은 코미디로 여겨진다. 그가 꿈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범죄였고, 그 자리를 축하하기 위해 그의 동료들을 부른 후 그 무대위에서 이주일이 불러 유명해진 CCR의 「Susie Q」를 부른다. 세금 1억과 목표액 1억, 개그맨의 정점과 영화감독의 꿈. 종세의 무대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무대이다.   

 

 

 야간 열차는 멈추고 영화 예술은 죽음을 맞이한다. 한 여름 오후의 '꿈' 혹은 '망상'

 

   그의 망상이 끝나는 지점은 아침의 기차 삼등열차객실이다. 앞에 언급했던 트뤼포의 말. "영화 예술은 어두운 밤을 뚫고 달리는 야간 열차와 같다." 그들은 어두운 밤을 뚫고 달리는 야간 열차를 타고 종착역에 도착했다. 야간 열차가 도착하고 아침이 오면, 영화 예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예술에 완성은 없다. 열차가 멈추고 아침이 오면, 그것은 끝나는 것이다. 더이상 달릴 수 없는 기차를 보며 이명세는 영화감독의 예술적 죽음을 생각한 것이 아닐까?  

 

   20여년전의 영화이기때문에 녹음이나 편집 등, 영화 기술적인 면에선 지금의 영화들과 비교해보면 좀 참담한 순간들이 있다. 그러나 그가 만들어내는 여름날 오후의 몽롱하고 권태롭고 나른한 몽상을 한번쯤 경험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후회하지 않을 영화다. 

 

 

*덧붙임  

1. 오선영이 등장할 때 이종세가 보던 영화는 프란시드 포드 코폴라 감독의 『커튼 클럽(The Cotten Club)』입니다. 이후의 운명 혹은 망상이 어떻게 진행되어질지를 보여주는 재밌는 장면입니다. 그 후 극장에서 나와 이종세의 집에 갔을 때 이종세가 오디오에서 트는 음악은 같은 감독의 『대부』 테마곡입니다. ^.^; 

2. 캡쳐한 이미지는 태흥영화사/아인스엠앤엠에 귀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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