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왕가위 감독, 노라 존스 (Norah Jones)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My Blueberry Nights)』는 왕가위 감독이 처음으로 미국에서 영어로 찍은 영화다. 그는 홍콩을 벗어난 다른 나라에서 영화를 찍은 적이 있어도, 배우는 항상 중국어를 사용하는 배우를 기용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노라 존스, 주드 로, 나탈리 포트만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서양 배우들을 기용했다. 중국인들이 미국에서 찍는 영화가 아닌, 그곳 미국에 사는 사람들로 찍는 왕가위의 영화라니. 설정만으로도 기대감이 넘치는 영화였다. 그러나 영화는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를 오간다.  

   영화의 내용은, 이번에도 역시, '사랑'영화다. 하지만 전작인 『화양연화』와 『2046』에서 이미 '어른'의 사랑을 보여준 왕가위는 이번엔 실연의 치유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의 주인공 엘리자베스(노라 존스)는 남자 친구에게 차인 후, 미국 전역을 돌아다닌다.(영화에 나오는 곳은 멤피스와 라스베가스지만, 아마도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사랑을 보면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나간다. 그리고 종종 그녀가 실연당했을 때 그녀를 위로해준 카페 주인 제레미(주드 로)에게 일방적인 편지 연락을 한다. 

   먼저 절반의 실패. 전작 『2046』에서 왕가위는 한국, 중국, 일본의 다국적 배우들과 작업을 했다.(아쉽게도 심혜진은 촬영은 했지만, 편집돼서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굉장히 흥미롭고 좋았다. 하지만, 헐리우드 배우들의 출연은 왕가위 영화의 그 정서를 휘발시켰다. 그들의 모습은 아름답고 매혹적이지만, 어딘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진다. 왕가위 특유의 스타일이 살아 있을 뿐, 그 특유의 '통절한' 정서는 사라졌다. 그래서 이 영화는 마치 외국의 한 감독이 왕가위 스타일을 모방해 영화를 찍은 것 같은 가짜 냄새가 난다. 진짜 왕가위가 찍었는데도. 『무간도』라는 귤이 헐리우드에 와서 『디파티드』라는 탱자가 됐듯이,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도 다른 문화권으로 건너가면 전혀 다른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런지. 그리고 그 문화적인 너비는 이쪽의 문화에서 저쪽의 문화로 각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각색하거나 윤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 그런데 그렇게 해서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결국 우리는 우리 이외의 사람들을 평생 이해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마치 『화양연화』의 <Yumeji's theme>과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의 <Yumeji's theme>의 차이처럼.

   절반의 성공은 왕가위의 시선이 조금 더 넓어졌다는 것이다. 『타락천사』에서 잠깐 나온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화양연화』를 관통하는 '어른들'의 관계가 이곳 미국에서도 그려진다. 그런 빗나가고 엇갈리는 관계를 통해서, (스스로 기억에서) 사라져가는 것과 물건을 통해서 끝까지 간직하려는 필사적인 마음이 이번 영화에 나타나 있다. 중경삼림의 비누와 수건같은 마음을 가진 소품들이 이번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신한다. 연인들이 버리고 간 열쇠와 남편이 남기고 간 계산하지 않은 영수증, 도박으로 딴 재규어, 그리고 팔리지 않아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운명의 블루베리 파이까지. 사소한 물건들이 각자의 마음속에 큰 의미로 남게 된다. 물론 이런 깨달음은 모두 실연 후에 오는 것이다. 누군가를 잃어버리고 그 누군가가 의미 있는 존재로 남게 되지만, 결국 그 존재는 없고, 대체물로 그 존재를 대신하는 아픔이 이 영화에 베어있다. 

   시간과 거리로 환산된 실연의 아픔을 치유한 엘리자베스가 제레미와 '달콤한' 키스를 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제레미가 간직했던 수많은 연인들의 '열쇠'는 모두 각자의 주인들에게 돌려주었다. 그 열쇠는 각자의 사연을 가진, 각자의 마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였다. 이제 그는 엘리자베스의 열쇠만을 간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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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지 2009-12-03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경삼림도 좋은데, 개인적으론 화양연화를 가장 재미있게 본 거 같습니다.

Tomek 2009-12-04 09:38   좋아요 0 | URL
저는 『춘광사설』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습니다. 군대 있을 때 처음으로 외박나와서 꾸리꾸리한 여관방에서 혼자 봤었습니다. 영화 마지막에 장국영이 '통곡'하는 모습에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네요.

『중경삼림』은 고등학교 때 봤을 땐 굉장히 흥겨운 영화라 생각했었는데, 몇 년 전에 다시 봤을 땐 상당히 '메마른'영화여서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

『화양연화』와 『2046』은 결혼하고 나서 다시 보니 처음 봤을 때 보다 그 의미가 다르게 느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