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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에는 영어 원서로 접했으나, 후에 『On Love』라는 딱딱할 수 있는 영문 제목이 서정적인 시구로 탈바꿈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우리글 개정판 제목에 이끌려 또다시 읽게 되었다. 줄거리는 의외로 단순하다. 화자인 "나"가 클로에 라는 여자를 만나면서 사랑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담아냈다.
소설의 구성 단계인 위기나 절정 부분을 쉽사리 감지할 수 없는 전개 방식으로 속도를 내어 한번에 끝까지 박차를 가해 읽기는 쉽지 않았으며, 책을 완전히 내려 놓고 나서 과연 이 책이 무엇을 얘기하려 했는가에 대해서 한마디로 개념화 시키기는 어려웠기에, 픽션이라기 보단 알랭드 보통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사랑에 대한 essay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집어들었던 책의 결말 부, 연인이었던 클로에가 자신의 직장 동료 윌에게로 떠났음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절망감과 모진 복수의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하려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서야 겨우 이게 "소설이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책은 essay와 novel의 위치를 오간다. 장르 상 소설의 형식을 빌려왔을 뿐 내용은 지금까지 읽었던 연애 소설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남녀간의 애절하고 격정적인 연애 이야기의 상당한 허울을 벗어버리고 온전히 인간이 인간에게 가질 수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그 열정을 주고 받는 "관계"에 중점을 두었다.
또한 이 책에서 양적으로 우세하게 차지하고 있는, 화자가 끊임없이 이끌어내는 자신의 사랑, 그것이 미치는 감정과 정신 그리고 육체에 대한 성찰적인 분석이 인상적이다. 사랑이라는 '현상'에 대한 철학적 해부와 분석, 과연 사랑에 '구조'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는지도 몰랐던 나로서는 처음부터 시종일관 중심을 잃지않고 그것을 살펴보고 헤아려 짐작해가는 화자의 놀라운 탐구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른바 논문처럼 사랑과 그 관계에 관한 범위의 내용들을 전반적으로 다루어 산만할 수 있는 내용을 각 장마다 제목을 붙여 명료하고 깔끔하게 쓰여졌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현상에 대한 심층적 구조를 이해를 하기에는 어렵지 않았던게 아닐까 싶다. 그런면에서 사유하게 만드는, 의미있는 문장들은 심심찮게 발견되는 재미역시 소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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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운명이라는 것을 만들어 낸다. 우리가 비행기에서 누구를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것에는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외에 아무런 의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생기는 불안. 즉, 우리의 사랑이 보장 받지 못한다는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낭만적 운명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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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우리 내부에서 찾을 수 없는 완벽함을 찾으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합을 통해 인간 종에 대한 불확실한 믿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이상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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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타락한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이상적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서 사랑을 한다.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어떤 면에서 나보다 낫다고 믿어야만 한다면, 상대가 나의 사랑에 보답을 할때 잔인한 역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묻게 된다. '그/ 그녀가 정말로 그렇게 멋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나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마르크스 주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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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행복의 약속이다' 스탕달은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클로이의 얼굴은 내가 좋은 삶과 동일시하는 특질들을 암시했다. 그녀의 코에는 유머가 있었고, 주근깨는 순수를 이야기했고, 치아는 관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해버리는 당돌한 태도를 암시했다.
(아름다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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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마시멜로한다고 말하자, 그녀는 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것이 자기가 평생 들어본 말 중 가장 달콤한 말이라고 대답했다. 그때부터 사랑은 우리에게 단순한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입에서 맛있게 녹는, 지름 몇밀리미터의 달콤하고 말캉말캉한 물체였다.
(사랑 말하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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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자신에 대한 느낌은 달라진다. 우리는 조금씩 남들이 우리라고 생각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자아는 아메바에 비유할 수 있다. 아메바의 외벽은 탄력이 있어 환경에 적응한다. 부조리한 사람은 나에게서 부조리한 측면을 끌어낼 것이다. 그러나 진지한 사람은 나의 진지한 측면을 끌어낼 것이다. 누가 나를 수줍어한다고 생각하면, 나는 아마 결국 수줍어하게 될 것 이다. 누가 나를 재미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계속 농담을 할 가능성이 높다.
(나의 확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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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종말과 삶의 종말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후자의 경우에는 그래도 죽음 뒤에 우리가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위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계의 끝이 반드시 사랑의 끝은 아니며, 더군다나 삶의 끝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아는 연인에게는 그런 위안이 없다.
(행복에 대한 두려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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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희비극의 시나리오로 풀려나갔다. 한편에는 여자를 천사와 동일시하는 남자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사랑을 병과 거의 동일시하는 천사가 있었다.
(수축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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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거부가 종종 도덕적 언어, 옳고 그름의 언어, 선과 악의 언어의 틀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마치 거부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것,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 당연히 윤리의 한 지류에 속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거부를 하는 사람에게는 악하다는 딱지가 붙고, 거부를 당한 사람은 선의 화신이 되는 일이 많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중략) 사랑의 거부가 아무리 불행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사랑을 이타성과 동일시하고 거부를 잔인성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정말로 사랑을 선과 동일시하고 무관심을 악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중략) 사랑의 종말은 이타주의와 이기주의, 도덕성과 비도덕성 사이의 충돌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두 충동 사이의 충돌로 나타난다.
(선악을 넘어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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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을 차근차근 곱씹어 되새기다 보면, 사랑에 한번쯤 빠져봤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회의와 의문에 대한 결코 의식하지 못했거나 언급되지 않는 그 복잡 미묘한 순리에 대한 근본적인 진리, 즉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하겠지만 현재 진행 중이거나 혹은 과거완료형 사랑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모순과 결점에 대한 강한 공감대로서 위안을 주는 '살펴보기'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에는 사랑했던 두 명의 남녀가 보인다. 지나간 사랑을 붙들려고 애쓰는 남자의 애원에 아무런 답도 없이 지겨운 얼굴을 보이며 시큰둥하게 떠나는 여자의 모습은 결코 우리에게 소원하거나 낯설지 않은 그림이다. 때로 붙들기도 하고 떠나기도 했던 주인공이 우리였던 적도 있었을 것이다. 사랑은 그렇게, 별다른 사건이나 큰 이유없이 우리에게 그 변덕스러움을 드러내고 마는것이다.
그런 면에서 알랭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남녀의 격한 감정의 진이 묻어나는 질퍽하고 강렬한 여타의 로맨스 소설보다 훨씬 현실적으로 우리가 하는 평범한 사랑에 가장 근접한 모습을 띄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비범하지 않은 우리들처럼 소설속 화자도 결국 달갑지 않지만 용인해야 하는 사랑의 시들음까지, 그 현상들의 모든 장점과 약점, 강점과 결점을 받아들이고 이내 낙천적인 마음으로 새로운 사랑을 다시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