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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여름 - 포켓북 한국소설 베스트
구효서 지음 / 일송포켓북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낯설다 [형용사]
1. 서로 알지 못하여 어색하고 서먹서먹하다.
2. 사물이 눈에 익지 아니하다.
(출처: 표준 국어 대사전)
구효서의 소설 『낯선 여름』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굳이 국어사전을 펼칠 필요는 없다. '낯설다'의 의미는 우리 모두 알만큼 '낯선' 단어는 아니니까.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왜 작가는 제목에 '낯선'이란 단어를 선택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작가 구효서에게 '낯설다'는 어떤 의미였을까?
소설의 인물은 효섭, 보경, 민재, 동우다. 효섭과 민재는 그저 아는 사이일 뿐이고, 민재와 동우는 부부사이다. 이야기는 효섭의 회상과 보경의 편지가 교차되면서 진행한다. 하나의 이야기가 보경의 시점으로 진행되면, 효섭이 보경을 때론 회상하고 때론 다른 이야기를 꺼내며 진행하는 식이다.
소설은 다분히 통속적이다. 보경은 이상적인 가정에서 살고 있는 여자다. 그녀에게는 일요일 아침에 스파게티를 준비해주는 남편이 있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있다. 모든 것이 자신에게 맞추어져 있는 삶, 그래서 그녀의 가정은 더할나위 없이 완벽하다. 그러나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 그 완벽함 앞에서 그녀는 그녀자신도 모를 이유없는 눈물을 흘리고 우연히, 효섭을 만난다. 그녀가 갑자기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 앉았을 때, 우연히 운좋게 그녀를 도와준 사람이 효섭이었고, 후에 그녀가 집에서 또다시 다리가 풀렸을때 그녀는 남편 대신에 효섭을 생각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남편은 항상 고마운 존재였지만, 효섭은 그녀가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그녀를 '나쁜년'이라 쉽게 단정할 수 있을까? 완벽한 일상속에서 갑자기 찾아오는 균열, 그 균열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울림은 불가항력이다. 이것은 남편이나 자식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닌, 본인 스스로가 해결해야 할 일이다. 보경도 그런 삶의 매너리즘에 빠진 것 뿐이다. 그저 그녀의 그 작은 틈새에 효섭이 들어가 있었을 뿐.
효섭은 사랑다운 사랑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사내다. 그는 몇 몇 여자들과 사귀었으나 그녀들과 헤어진 후에도 그게 사랑이었는지 의심스러워 한다. 그녀가 진정 사랑에 빠진 여자는 결혼 첫날, 황망스럽게도 갑자기 죽었다. 그것도 자다가. 죽음같은 잠에 빠진 후 아침에 일어났을 때 사랑하는 여인이 죽어있다면, 그 충격은 얼마나 클까? 상상하기조차 싫은 일이다. 그 일을 겪은 후 그는 우연히 보경을 만난다.
매 해, 때마다 찾아오는 그 해 여름은 그들에게 이상했다. 친숙한 여름이 아닌, '낯선' 여름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생각하지 않던 효섭에게도, 완벽한 일상에서 살아가던 보경에게도. 그저 갑자기 찾아온 일상의 균열 속에서 그들은 낯설게 만나고 낯선 관계를 가졌다. 세상이 '불륜'이라 부르는 그들의 관계는 결코 친숙해 질 수 없는 '낯선' 관계다. 그 모든 게 이 여름에 시작됐다.
『낯선 여름』은 분명 유치하고 통속적이다. 하지만, 우리 인생은 뭐 안그런가? 대단한 것 하나 없는 유치하고 통속적인 인생이다. 효섭과 보경은 그들의 유치하고 통속적인 일상에서 그들만의 '새로운' 추억을 만들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박수쳐줄 일이지만, 그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 효섭 주위에 맴돌고 있는 민재와 보경의 남편인 동우는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랑은 윤리로 재단할 수 있을까? 개인과 개인이 걸쳐 있는 사랑에 교집합과 여집합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 통속소설은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세상 엘리트들의 표본추출 같은 동우(부정적인 의미가 아닌 긍정적인 의미로서다. 그는 정말 이상적인 남편이자 아버지다)는 소설의 마지막, 효섭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인다. 삶 전체를 이성과 배려로 재단한 그도 사랑 앞에선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랑은 이성이나 배려같은 것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고. 아내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던 그가, 그녀의 행복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할 때의 그 충격은 얼마나 컸을까. 사랑은 당사자들을 기쁘게도 하지만,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우리는 그 상처를 '배신감'이라고 한다.
어쩌면 이 모든 게 '결혼'이라는 제도 때문에 생긴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결속해주는 것은 결혼이라는 제도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여있으면, 다른 사람을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는 안된다. 사랑이 제도가 되면서 윤리가 되었다. 우리에겐 간통죄라는 법적 구속력까지 있다. 아니, 어쩌면 제도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소유하고 싶은 인간의 욕심때문이 아닐런지.
너무 쓸데없는 생각까지 해버렸다. 『낯선 여름』은 이들의 여름뿐 아니라, 내 감정, 생각도 낯설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가 선택한, '낯설다'는 단어는 이런 모든 감정을 설명하기에 조금 부족한 것 같다. 여러 단어를 생각해 봤지만, 우리말에 맞는 단어는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딱 맞는 단어는 아니지만, 내 느낌과 어느 정도 맞는 단어를 영어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그 단어는 'eerie'다.
eerie [iri]
strange, mysterious and frightening
[출처: Oxford Advanced Learner's Dictionary]
* 덧붙임
구효서 작가의 『낯선 여름』을 읽게 된 계기는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때문입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낯선 여름』을 원작으로 한 작품입니다. 홍상수 감독은 항상 자신의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드는데 데뷔작만큼은 예외였습니다. 그래서 궁금한 마음에 원작을 읽었습니다.
소설은 영화와 흡사한 게 거의 없습니다. 등장인물의 이름 정도? 그리고 아주 희미한 설정들 뿐. 나중에 기회가 되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낯선 여름』을 같이 언급해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