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방문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어떤 방문>은 세 명의 감독이 참여한 옴니버스 영화다. 하지만 얼마 전에 개봉한 <오감도>같은 영화를 떠올리는 것은 곤란하다. 이 영화는 상업영화로 기획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루하거나 어렵지는 않다. 영화는 찡하다가 웃기고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이것은 이 영화에 참여한 홍상수, 가와세 나오미, 라브 디아즈의 역량때문이다. 

   <어떤 방문>은 전주국제영화제의 한 섹션인 [디지털 삼인삼색]에서 시작한 프로젝트다.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젝트]는 세 명의 감독을 선정한 후, '선정한 세 명의 감독에게 전주국제영화제 프리미어 상영을 전제로 5천만원의 제작비를 지원하고, 디지털 카메라와 디지털 편집 장비를 이용하여 각각 30분 분량의 디지털 영화를 제작하'는 프로그램이다. 작품의 주제나 내용엔 일체 간섭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번에 참여한 세 감독의 작품을 보고, 세편의 영화에서 '누군가가 어딘가를 방문'하는 공통점이 있어 제목을 이렇게 선정했다고 한다. 잘 지은 제목이다. 세 영화 모두 '누군가의 방문'으로 인해서 사건이 벌어지니까. 

   <어떤 방문>은 세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영화는 가와세 나오미 감독이 연출한 <코마 Koma>, 두 번째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첩첩산중>, 세 번째는 라브 디아즈 감독의 <나비들에겐 기억이 없다>이다. 개인적으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각각의 영화는 각각의 존재감을 지니고 있다. 아마도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 같은데 나에겐 다행히 다 마음에 든 경우라서 행복했다.   

 

 

<Koma> 감독 - 가와세 나오미 

   <코마>의 내용은 간단하다. 시간대별로 간단히 정리하자면, 먼 옛날 '코마'라는 조용한 마을에 한 남자가 방문한다. 그는 우연히 한 아이의 목숨을 구하고 아이의 아버지는 감사의 뜻으로 족자를 선물한다. 시간은 흘러 현재가 되고, 그의 손자인 강준일은 족자를 돌려주기 위해 코마를 방문한다. 그는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간단하고 담백한 내용인데 그 속엔 숨은 알레고리가 마구 엉켜있다. 

   영화 제목 <코마>는 의학용어인 coma가 아니라 Koma라는 지명이다. 이곳 사이타마현의 코마사토(高麗鄕)는 옛날 고구려의 유민이 일본에 건너와 흩어져 살다가 모여서 만든 마을이다. 이곳엔 고구려의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일본속의 한국. 주인공인 강준일은 한국사람인지 재일교포인지 분간이 안간다. 일본말이 능통한 것으로 보아 재일교포 3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코마사토 주변을 감싸고 있는 작은 산은 미와산이다. 미와산에는 슬픈 전설이 있다. 밤에만 찾아오는 신랑의 정체가 궁금해 신랑의 옷에 실꿴 바늘을 꽂고 다음날 아침 그 실을 따라 갔더니 큰 나무 밑둥에 바늘이 꽂혀 있고 신랑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 이 전설을 바탕으로 한 일본의 전통 가무극 노(能)와 춘향가의 [사랑가]. 일본과 한국의 관계가 이런 수많은 알레고리로 걸쳐져 있다. 

   하지만 가와세 나오미는 이런 딱딱한 주제를 생각하게 하기 보다는 자연과 음악으로 '느끼게' 해준다. 숲, 나무, 빛나는 햇살. 자연과 동화되는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꼭꼭 숨겨 놓은 알레고리를 생각하기 보다는 '느끼게' 하는 것은 가와세 나오미의 뛰어난 역량인 것 같다. 

 

 

<첩첩산중> 감독 - 홍상수 

   이번 영화 관람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작품이다. 솔직히 다른 두 편이야 어찌되든 이 영화만 건지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운좋게도 다른 두 편까지 건진 셈이었다. 홍상수는 지금까지 항상 장편만을 찍어왔다. 때문에 그의 영화가 단편이라는 물리적인 시간을 견딜 수 있을까하는 궁금증이 있었는데, 그는 단편이든 장편이든 그만의 영화를 만든다. 

   영화는 미숙(정유미)이 친구 진영(김진경)을 만나러 전주에 내려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전주엔 대학 은사이자 옛 애인인 상옥(문성근)이 있다. 그런데 미숙이 자신의 친구 진영이 상옥과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옛 애인인 명우(이선균)를 부른다. 

   <첩첩산중>이라기 보다는 점입가경이 더 어울릴 정도로 이야기는 '그렇게 안되었으면'하는 방식으로 흐른다. 그 와중에 펼쳐지는 인간의 치사한 위선과 유치함이 쉴새없이 까발려진다. 영화 보는 내내 하도 웃어서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홍상수는 예쁜 화면을 만들기보다는 근사한 사건을 만든다. 그의 영화에서 기억나는 '화면'은 없으나 기억나는 인물이나 사건이 많은 까닭은 그가 인간에 관심이 많아서 일것이다. 

   영화의 처음은 아파트 건물로 시작하고 끝은 모텔 건물로 끝난다. 제목인 산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산'의 이미지란, 도시의 아파트나 모텔같은 높은 직사각형 건물들인 것일까 생각해본다. 

 

 

<나비들에겐 기억이 없다> 감독 - 라브 디아즈 

   라브 디아즈 감독은 필리핀 출신이다.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필리핀 영화를 본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필리핀은 우리에게 그저 값싼 동남아 여행지 정도로만 인식될 뿐이다. 한국에 수많은 필리핀 노동자들이 살아가지만, 우리에겐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필리핀이 에스파냐, 미국, 일본에 점령됐었다는 역사를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필리핀의 공영어는 타갈로그어와 영어이고 영화에서도 이 두 언어가 함께 쓰인다. 

   영화의 내용은 금광회사가 철수하자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페르딩, 산토스, 윌리가, 어렸을 때 캐나다로 이민을 간 마사가 돌아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영화는 필리핀의 어두운 현실을 반영하듯 흑백으로 촬영됐고, 무기력한 심정을 보여주듯 고정된 카메라로 길게 진행된다. 게다가 화면비율은 (이전의 두 영화들과 달리) 폐쇄공포증이 느껴지는 1.33:1이다. 화면이 움직이지 않아 상당히 지루할 수 있지만, 주변의 불안요소들로 영화적 긴장감을 유지한다. 

   그렇다고 영화적인 장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죄를 짓기 전에 미리 성당에서 속죄하는 모습이나, 거사에 돌입할 때 축제의 가면을 쓰고 숲을 지나는 모습. 그리고 갑자기 나비가 떼로 날아오르는 모습은 이 지독한 현실같은 영화에 어떤 마법같은 순간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어렸을 때의) 친구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죄의식 때문인지, 아니면 범죄의 막연한 공포때문인지 모를 '통곡'을 본다. 

   언뜻보면 지루한 흑백 다큐멘터리로 느껴질 수 있지만, 이 영화는 현재 필리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돈 앞에 굴복할 수 밖에 없고 그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현실을 차분히 보여준다. 이런 영화는 쉽게 찾아오는 영화가 아니다. 반드시 놓치지 말고 봐야할 영화다. 

 

 

   지난 15일 오후 3시에 홍대 상상마당에서 <어떤 방문>을 관람했다. 추운날 일요일 오후인데도 불구하고 좌석은 다행이 매진됐다. 그러나 들리는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 약 1,000명이 안 되는 관객이 이 영화를 관람했다고 한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지구의 내일'을 걱정하는 영화는 많이 있다. 하지만 '나의 내일'을 걱정하는 영화는 흔치 않다. 이 영화의 우연한 방문을 통해서,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내일에 대한 고민을, 해결까지는 아니더라도, 생각해보고 위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면 좋겠다. 

 

 

*덧붙임   

   <첩첩산중>에서 이선균 씨가 연기한 명우는 소설가입니다. 미숙(정유미)에 따르면 명우는 어떤 소설로 상을 타고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그런 명우가 영화 내내 들고 있는 책은 김연수 작가의 <밤은 노래한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명우는 (아마도) 김연수 작가를 모델로 한 것 같습니다. 

   김연수 작가는 홍상수 감독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평단과 박스오피스를 석권한 유명 감독으로 나옵니다.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공연희(엄지원)에 따르면 그는 공연희를 강간한 '강간범'입니다. 그리고 <첩첩산중>에서 상옥(문성근)에 의하면, 명우는 그저 자신만을 따라하는 버릇없는 '개자식'입니다. 

   정리하자면, 홍상수 감독은 두 편의 영화에서 김연수 작가를 '강간범'이자 '개자식'으로 만든 셈인데, 그 의도가 심히 궁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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