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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평점 :
<Las Meninas(궁녀들), 부분> 디에고 벨라스케스 作 (1656년)
에스파냐의 궁정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여러 작품을 남겼으나, 그중 유명한 것은 왕녀 마르가리타를 그린 작품들이다. 위 그림은 마르그리타 공주와 그 주위에 궁녀들이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공주 주변에는 '세상의 모든 빛이 집중된 것 같이' 빛나고 있다. 반면에 오른쪽엔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일그러진 표정을 한 여자 난쟁이 궁녀가 있다. 여자 난쟁이의 뚱뚱한 몸과 일그러진 표정은 어린 마르가르타 공주와 비교되어 더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그림의 주인공은 마르그리타 공주이지만 벨라스케스는 이 작품의 제목을 <Les Meninas(궁녀/시녀들)>라 지었다. 첫번째 아이러니. 혹은 비교대상을 더욱 부각시켜 드러내고자 했던 것을 더 빛나게 한 예술가의 잔인함.
마르그리타 공주는 15세에 오스트리아의 레오폴드 1세와 결혼했으나 22세가 되던 해 넷째 아이의 출산 도중 사망했다. 후에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벨라스케스의 그림과 마르그리타 공주의 비극적 삶에 영감을 얻어 피아노 독주곡을 작곡했으며 후에 관현학곡으로 편곡했다. 그게 바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다. 파반느는 궁중무곡을 가리키는 단어다. 죽은 왕녀인 마르가르타를 기리는 곡이었으면 조곡이 되어야 할텐데 무곡이라 명했다. 그리고 곡은 무곡임에도 불구하고 서정적이고 애잔함을 느끼게 한다. 무곡이라 하기엔 제목의 '죽은 왕녀'라는 제목의 중압감이 느껴지고, 조곡이라기엔 꽤나 서정적이고 애잔한 곡. 두번째 아이러니.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역시 이런 아이러니에서 시작한다.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한 남자 이야기.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일까? 이거 자기 기만 아닌가? 대한민국 일반 평균치의 남자들이 어떤 존재인데... 얼마전 방영한 [재밌는 TV 롤러코스터]의 [남녀탐구생활]에서 밝힌 남자의 연령별 이상형을 보면 다음과 같다.
▲ 남자의 나이대별 이상형
10대 남자의 이상형 : 예쁜 여자예요.
20대 남자의 이상형 : 예쁜 여자예요.
30대 남자의 이상형 : 예쁜 여자예요.
40대 남자의 이상형 : 예쁜 여자예요.
50대 남자의 이상형 : 예쁜 여자예요.
60대 남자의 이상형 : 예쁜 여자예요.
이런 게 남자다... 하지만 박민규는 시침 뚝 떼고 이 말도 안돼는 러브스토리를 진행한다. 그것도 정극으로. 첫 장(章)을 읽었을 때 난 박민규가 변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글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12월 겨울의 눈내린 교외.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는 두 남녀. 만남. 헤어짐. 그리고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여기까지 읽었을 때 난 박민규가 '작심하고' 러브스토리를 쓰는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러브스토리가 아니다. 두 번째 장부터 박민규의 우스꽝스럽지만 슬픈 우리들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두 주인공은 사랑을 한다.
이 소설에서 박민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추의 굳어진 관습을 무력화시킨다. 아름다움이 시선을 끌듯 추함도 시선을 끈다. 그 둘은 양극단에 위치해있지만, 본질적으로 통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과 추함은 나이가 들면서 묻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우리는 유한적인 아름다움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박민규의 표현을 빌린다면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빛을 조금씩 더 얻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처럼. 세상의 빛을 받고 있는 저 마르그리트 공주처럼. 그 옆에 있는 추한 궁녀처럼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세상의 빛을 받으면 무엇이 남는데?
우리의 삶은 '와와'와 '쯧쯧'에 지탱되어 왔다. 조금만 잘하면 '와와', 조금만 잘못하면 '쯧쯧.' 성장기때에만 이러는 줄 알았는데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명문대를 나오면 '와와' 그렇지 않으면 '쯧쯧.' 대기업에 다니면 '와와', 그렇지 않으면 '쯧쯧'. 연봉이 시원하면 '와와' 그렇지 않으면 '쯧쯧.' 이토록 남들이 정해놓고 남들의 '와와'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는 모습이 '이상적이고 바른' 롤모델로 정해져있는 2009년에 박민규는 "그렇게 아둥바둥 살 필요 있어? '와와'소리 안 들으면 어때? '쯧쯧' 소리 좀 들으면 어때? 네가 행복하면 그만이지. 자, 내 얘기 한 번 들어봐봐."라고 슬며시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난 실제로 그 선동에 넘어갔었다. 작년에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고 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지금 직장에 다니고 있다. 연봉이나 복지는 저번 회사보다 확실히 떨어지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나와 가족을 위한 시간을 보장받는다. 똑똑하게 살지는 않지만 행복하게는 살고 있다. 그리고 박민규는 내 이런 선택을 존중하기라도 하듯 이번 소설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금 2009년은 (<삼미...>를 발표한) 1998년보다 점점 더 황폐해지고 있다. 국가는 부유해지고 있으나 개인의 삶은 점점 더 피폐해지고 있다. 이런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은 '사랑'뿐이다. 비록 그 사랑이 '슬픈 해피엔딩'일 지라도.
사랑이 있으면, 사랑을 하면, 비록 상처받을지라도 이 힘든 세상을 '같이'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덧붙임
1. 박민규 작가의 인용은 점점 더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것 같습니다. <지구영웅전설>에서는 마블코믹스의 히어로들을,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는초창기 프로야구를, <핑퐁>에서는 인터넷 덧글과 엘엘쿨제이를,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는 벨라스케스, 라벨, 비틀즈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의 관심사가 대중문화에서 순수예술쪽으로 넓어지는 것 같으나, 그의 글을 읽으면, 이런 구분 자체가 무의미한 것 같습니다. '순수'문학과 문학의 구분이 무의미한 것 처럼요.
2. 뒤의 Writer's Cut을 처음 읽었을 때는 '사족'이라 생각했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왠지 슬퍼지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제 '해피엔딩'은 소설에서나 기대해야 하는 것일까요?
3. 지금껏 박민규 작가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만 글을 써 왔습니다. 팬의 입장에서는 그가 쓴 3인칭 관찰자 시점의 글을 읽어보고 싶은 바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