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20세기 무서운 세상이었구나. 무서운 세상을 온몸으로 헤쳐 나갔던 사람들이구나. 내가 살고 있는 21세기가 지나면 또 21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이들의 이야기가 등장하겠지. 21세기도 무서운 세상이니까--;;

 그나저나 이 책을 읽고 '나 참 무식하다'고 탄식했다. 솔직히 내가 아는 인물이 체 게바라와 체 게바라 평전에서 등장한 파블로 네루다와 살바도르 아옌데, 안네의 일기의 안네, 일본인이면서도 일본의 제국주의에 온몸으로 항거한 가네코 후미코, 안중근, 김구, 홍범도, 윤동주, 김지하, 박노해, 윤이상 밖에 없으니! 나의 무식은 그 이면에 세계사와 역사 등 교과교육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글쎄, 가치 중립인 교육의 장에서는 다루기 힘든 가치 지향의 내용이라 이런 사람들의 삶을 직접 조명하지 못했던 것이겠지' 생각하면서도 내 고등학교 시절 이들의 삶을 들려줬던 선생님이 계셨더라면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도 더 많이 자라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이라도 이 책에서 이 사람들을 만나게 해 준 작가에게 감사를!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은 그들의 생애를 모두 비춰주지 못한다. 그래서 또다른 책 읽기를 권하는 책인듯 하다. 작가는 다만 이들을 기억하라고, 이름만이라도 알아달라고, 그들의 묘비에 묵념이라도 함께 하자고 독려하는데 이 책의 의미를 부여하는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은 - 사랑의 여섯 가지 이름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 푸른숲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튤슈, 미안해. 이십사시간 너를 생각하는 것을 내 일로 삼아야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어. 내가 지금 있는 이 도시는 너를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곳이야. 내가 변명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를 네가 아니다만 이렇게 변명이라도 해야 덜 미안할 듯해서^^ 튤슈, 네가 좋아했던 메타세콰이아 나무들이 이곳에 참 많아. 지금은 온통 갈색으로 물들어 있지. 이렇게 갈색으로 물들어버린 메타세콰이아 나무를 보며 괜시리 슬퍼하던 네가 그리워. 미칠듯이 보고 싶어. 너를 사랑해. 튤슈.

 아지즈 네신은 초정상 시인이다. 짧은 이야기를 통해 전혀 짧지 않은 우리네 이야기를 모두 담아내는 것. 이것이 어디 정상적인 인간일 수 있으랴?^^ 아지즈 네신의 책은 이렇게 넌지시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던지고 그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게 전달하는데 그 매력을 발산한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보며주는 아지즈 네신. <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은>에서는 '사랑, 깨닫는 순간 죽을 수밖에 없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의 바다에 독자들을 빠뜨린다. 정신없이 이야기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야 흠뻑 젖은 채 자신을 바다에 비친 제 모습을 보게 된다. 이 때 바다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게 되고,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며 그들을 진정 '사랑'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는 것. 아, 이 얼마나 대단한가?

 사랑은 평행선이다. 독수리와 익투스가 그렸던 평행선처럼. "모든 여자는 자신의 바다, 그리고 모든 남자는 자신의 하늘을 품고 있어. 아니면 반대로 모든 여자는 자신의 산을, 모든 남자는 자신의 바다를 품고 있지. 그들은 상대방의 낯선 매력에 빠져들곤 하지, 하늘과 바다는 수평선에서 서로 맞닿을 수 있지만 절대 하나가 될 수 없고,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함께 나눌 수 없지." 라며 하나됨을 강요하는 것이 사랑이라 믿는 어리석음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이 어리석음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것이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나 역시 어리석기 때문에. 참나무와 인형처럼 하나되기에 열중하다가 재가 되어버린 그들의 사랑 또한 이러한 이기심이 불러온 화가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작가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거리두기만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조각상의 사랑의 경우, "물론 서로를 사랑할 순 있겠지. 하지만 우리 사아에는 항상 어떤 틈,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해. 우린 어쩔 수 없이 떨어져서 서로를 바라보고 닿지 않는 곳에서 서로를 그리워해야 해."라고 말하는 여자 조각상에게 남자 조각상은 "아냐, 이렇게 포기할 순 없어! 할 수 있을 거야. 난 널 항상,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이 사랑할 거라고 굳게 믿어"라고 외치며 그녀의 손에 닿도록 온몸을 던진다. 결국 '가지런히 마주한 두 개의 손. 그들의 손가락 끝이 아슬아슬하게 맞닿아 있었다'에서 볼 수 있듯이 남자 조각상은 성공했다.^^ 사랑은 위대하다. 사랑은 불멸의 문이다. 다만 불멸의 문은 열기 어렵다. 그것이 항상 문제이다.^^

마지막 이야기, '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은'에는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는 나에게 "튤슈를 사랑합니다."라고 동문서답하는 비정상적인 아저씨가 등장한다. (아지즈 네신의 특기.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인물은 비정상이 아니라 초정상의 인물이다.) "이 세상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저는 튤슈만을 사랑해왔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도 그녀만을 사랑할 겁니다.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일에 목을 매고 있죠."라고 말하며 우리 모두에게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이야기. 말해 무엇하랴? 오늘, 해도 얼굴을 가린 싸리눈 하나 둘 흩날릴 듯한, 이런 오늘, 우체국으로 달려가 꽁꽁 언 손으로 튤슈에게 전보나 쳐야겠다. 튤슈 너를 사랑해, 튤슈 사랑해 너를, 사랑해 튤슈 너를, 너를 사랑해 튤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도세자의 고백
이덕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는 승리한 자의 기록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책. 사도세자의 고백

 왕의 아들이 뒤주에 갇혀 죽었다! 그리고, 죽인 사람은 다름아닌 그의 아버지였다. 미쳐버린 세자에게 왕위를 계승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로 자신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죽일 수밖에 없었던 그의 아버지가 가련하다는 생각을 했었던 때가 있었다. 이런! 역사는 승리한 자의 기록임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이 책에 감사한다. 역사의 뒤안길을 낱낱이 파헤쳐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볼 기회를 준 것에 말이다. 그것도 내가 그 시간 그 공간에 함께 있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전달해 준 것에 무지무지 감사해하고 있다.

 조선시대 왕은 모든 것을 다 누리고 가진 신과 같은 존재인 줄만 알았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모든 것을 제압하며 자신의 신념을 꿋꿋이 밀고나가는 존재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왕권이 무너져가던 조선후기에는 신하들의 당파싸움에 휘말리는,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혈육도 져버리는 나약한 존재였음을 이 책을 보게 되었다.

 영조, 그는 나약했다. 태평성대라 불릴만큼 정치를 잘 했다던 그는 아들이 무서워 아들을 제거해버리는 나약한 존재였다. 왕권교체의 정당성에 목 맨,남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연연했던 가련한 군주다.  사도세자, 그는 정신병자가 아니라 왕이 되기 위한 준비에 철저했던, 확고한 신념과 의지을 가진 왕자였다. 그가 뒤주 안에 갇혔던 여드레, 죽어가면서 자신의 신념에 굴하지 않았던 자신을 원망했을까 아니면 자신을 이렇게 서서히 죽여가는 아버지를 원망했을까? 아무도 모른다. 역사는 승리한 자의 말만 기록에 남기니 말이다.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도 철저하게 패배했던 그래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던 사도세자의 본래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이 전부 사실이라는 장담은 못한다. 그것은 작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가 역시 자신의 사관을 가지고 성실히 진실을 추적하고 그것을 기술하는 것 뿐일테니 말이다. 하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현재 알려진 사도세자의 정보는 분명 왜곡된 것이라는 점이다. 작가가 추적한 바 이 책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작가의 성실한 추적을 믿는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 사도세자가 자신의 궁 앞에 군기붙이와 말을 땅 속에 감추었다고 했는데, 이것이 설사 노론의 공격에 대비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치더라도 이러한 행동은 분명 영조에게 충분히 위협이 되었으리라 본다. 사도세자 역시 자신의 생명에 위협이 되는 아버지를 제거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최선의 방어는 최선의 공격'이었던 조선시대 왕조에서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닐까? 그 공격에 한 발 늦은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함으로써 끝난 역사이야기가 아닐까? 만약, 사도세자의 공격이 한 발 앞섰더라면 아버지가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았을까? 작가는 사도세자가 그런 마음을 추호도 갖고 있지 않았다고 여러 가지 정황을 바탕으로 얘기하지만...충분히 바뀔 수 있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역사, 이제 보이는 대로 볼 수 없을 듯하다. 진실이 무엇인지 눈 똑바로 뜨로 봐야겠다. 솔직히 대선을 앞두고 있는 현 정계 역시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 하지 않을까 싶다. 정적을 쳐내기 위한 잔혹한 세계에서 거짓이 난무하고, 그 거짓들 틈에서 진실을 찾아내야 하는 숙제를 우리에게 주는 것이 선거가 아니던가? 참, 눈 크게 뜨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진실을 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눈부신 하얀 빛의 할머니와 칠성이. 나는 차라리 그 빛을 따라 바리도 가버렸으면 했다. 12살 바리가 가족과 고향을 떠나 아버지와 이별하고, 언니를 잃고, 할머니를 잃고, 칠성이를 잃으면서 이미 바리는 아귀지옥, 불지옥, 피지옥으로 기어들어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지옥이었구나. 서로 물고 뜯는 지옥, 한 쪽에서는 굶주려 죽고, 또 한 쪽에서는 전쟁 때문에 죽고...우리가 세상에 지어놓은 지옥, 불길과 연기가 끊이지 않는 지옥.

 바리가 지옥을 지나 아니 지옥에서 무장승을 만나고 그나마 가족이 생기면서 다소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하지만 샹 언니가 나타나고 '산타클로스의 선물'만한 빨래를 들고 샹과 순이를 남겨두고 빨래방에 가겠다고 말하는 순간 내 가슴은 정말 철렁했다. 그러고는 원망했다. 샤먼이라면서 왜 나도 짐작하는 것을 너는 짐작하지 못하는 거야?! 이어지는 순이의 죽음 앞에 나는 바리를 원망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승과 저승 중간에서 그들을 이어주고 불쌍한 넋을 위로하는 그 넋을 위로함으로써 산 자들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주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존재였지 그렇다고 자신에게 닥치는 앞 일 모두를 내다보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만큼 마음이 아팠을 뿐이다.

 순이의 죽음으로 바리는 불바다, 피바다. 기러기 깃털도 가라앉는 모래바다를 지나 무쇠성에 간다. 생명수를 가지러. 그리고 죽은 자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결국 무쇠성에 도착한 바리는 넋살이꽃을 꺾어 여러 넋을 구원한다. 그리고 밥해 먹는 보통 물을 마셔보고는 생명수가 아님에 실망하여 돌아온다. 하지만 뒤늦게 자신이 마셨던 물이 생명수임을 까막까치를 통해 알게 될 뿐이다. 어쨌든 돌아오는 길,죽은 자의 질문에 대답해준다. 바리는 순이가 자신과 함께 있음을 깨닫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후 바리는 압둘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할아버지, 세상을 구해낼 생명의 물이 있다면 좋을까요? 그걸 얻을 수만 있다면......' 할아버지의 대답 속에 생명수가 무엇인지 힌트를 숨기고 있다. 작가의 의도겠지?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우리는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가? 힘센 자의 교만과 힘없는 자의 절망이 이루어낸 지옥에서 우리는 교만한 힘센 자에게 빌붙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경찰차와 앰뷸런스 경적소리가 가득한 거리에서 울고 있는 바리와 알리를 따라 나도 울고 있다. 분단과 대립, 종교, 모든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과 사랑. 그녀의 눈물이 생명수이길 빌면서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갈호수 2007-10-07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망이 존재해야만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 그래서 희망을 버려선 안된다는것 비롯 현재 살아가는 모습에서 모든이들이 힘들고 또 괴로워하지만 우린 사람사이에서 희망을 다시 발견해야하는점 그리고 그 중심에서 내가 있다는것 서평잘 읽었습니다.
 
아리랑 12 - 제4부 동트는 광야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숨막히게 처절한 해방 전 우리 민족의 삶. 러시아에서 중국, 동남아, 하와이까지 우리 민족이 내쫓긴 체 핍박받는 장면을 훑어내 보여주느라 아니 그들이 끈질기게 견뎌낸 수난의 역사를 보여주느라 작가의 발과 펜이 얼마나 닳았으며 작가의 가슴은 얼마나 시커멓게 변했을까?  감히 어떻게 이 책을 내가 평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없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다만 깨달았을 뿐이다. 지나간 우리 민족의 아픔은 가르칠 수 있는 대상(우리는 역사시간에 '그땐 그랬지'라고 배우며 주먹 불끈 쥐어보고 그 시간 끝나면 잊어버리곤 하지 않는가?)이 아니며(느끼게 해 주어야 한다. 우리가 곧 차득보요, 연희네며, 지삼출이고, 송수익이며, 필녀요, 보름이고, 서무룡이요, 양칠성이고, 정상규요, 정도규라는 사실을 느끼게 해 주어야 한다.), 과거는 단순히 과거로 끝나는 것(현재진행형의 과거?)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부끄럽다. 땀 냄새로 얼룩진 이 책의 주인공들에게 말이다. 땀 냄새로 얼룩진 그들이 '껍데기를 벗겨야 할 인종'들이라 말한 이들을 여지껏 처단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오히려 끌려다녔던 해방 후 역사가 너무도 부끄럽다.

 책 속의 인물에서 내 모습을 본다. 신세호. 아마도 나는 이 인물 같은 성향을 가졌으리라 본다. 그래서 더 오줌대감 신세호의 아픔에 공감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신세호가 송수익의 강인한 신념과 거침없는 실천력을 부러워했던 것처럼 나 역시 가열하게 이 세상에 대한 올곧은 신념으로 맞서고 싶어하나 전혀 그렇지 못한 나약한 인간임을 매일 한탄만하는 인물이니까. 나같은 인물이 너무 많아서 항상 정의가 승리하지 못하는 것(그렇다고 내가 부정의 편이라는 말은 아니다. '좋은게 좋은 거지'라는 생각으로 침묵하는 인간이라는 말이다.)은 아닐까 생각하며 신세호의 시커멓게 탄 가슴을 쓰다듬는다. 

 책을 덮고 나니 더 가슴이 먹먹해진다. 굳세고 굳센 만년장수 송수익의 감옥에서의 죽음, 배포만큼 덩치 큰 공허 스님의 허탈한 죽음, 금예가 보고 싶어 몸달았던 필룡이의 죽음, 위안부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한 순임이, 돌아오는 길 중국인들에게 맞아 죽는 이주 농민들....이를 어쩌나. 가슴만 아프다. 차득보는 돌아와서 연희네를 만났기를 두 손 모아 빌어보는 밖에!

 대장정에 내 가슴도 갈갈이 찢어진 듯하다. 그러나 한 가정을, 한민족을 파탄으로 몰고간 뼈아픈 역사가 거듭되지 않게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한다. 수많은 송수익과 공허, 오삼봉이와 차득보,윤일랑을 위하여 묵념. 그리고 또 수많은 양칠성이와 장덕풍, 장칠문, 이용구, 박정애와 민정환과 이광수에게 돌팔매를. 

 아리랑은 끝나지 않는 노래임을 확인하며 이 책을 덮는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07-09-14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권이니 다 읽으셨군요. 저도 '아리랑' 보면서 내 역사관과 민족의식을 다졌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봐야 할 책으로 강추!!
아리랑을 두 번 읽었고, 김제의 아리랑 문학관도 두번이나 다녀 왔지요.
제 서재에도 아리랑 문학관 다녀와서 올린 글이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