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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가는 먼 집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118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4월
평점 :
어디서 읽었는데...를 연발하면서 읽는다. 역시 전에 읽었던 시집이다.
이 시집을 읽는 내 마음에 잔뜩 비가 들이친다. 누군가 터뜨려버려 미처 꽃필 기회를 갖지 못한 보라색 도라지 꽃을 보며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 같은 시인. 시인에게 부끄럽다. 아, 나는 왜 봉긋한 도라지 꽃봉오리만 보면 달려가 펑 소리가 나도록 눌러댔을까?
저 누각
장마 우중에 아버지와 나는 산을 올랐습니다 산이래야 일테면 베개머리모양 가벼운 거였지만 산행은 일테면 베개머리를 괴고 누운 한 마음같이 무거운 거였지요뽀얀 물안개가 꼼짝도 않고 그러나 움직임의 경계를 지우며 우리가 내버리고 온 다른 등성이를 감싸고 있었는데 다만 연보라의 안개 저쪽에는 어떤 우중인지 그리고 우중 아니래도 상관은 없었습니다.오다 오다 서럽더라 의내여 바람이여 아버니와 나는 인간의 육으로 들어가 즙액의 탕을 만들어내는 곤죽의 땀과 그러나 말라 비틀어진 마음의 한켠이 기울어져 이대도록 멀고 긴 길을 나었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요. 저 아른거리는 물안개 저편 저편이래봤자 손으로 젖치면 열릴 거였지만 그러나 손을 내밀기는 천근처럼 무거웠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성큼성큼 물안개를 건너가더니 다시 나오지 않았고 망연히 쳐다보는 나는 아련히 올라간 마음의 끝을 좇아 몸으로 빗장을 삼은 아버지가 아팠습니다 아픈 아버지의 아련한 몸이 세계의 나무처럼 누각 끝의 풍경을 건드리고 풍경은 물안개를 건드리고 긴긴 세계의 경계를 만들어내는 것을 나는 망연히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