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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소설이며, 오로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고 일러준 작가의 세심한 배려에 감사한다. 글쎄 까마득히 먼 옛날의 얘기이면서 오늘날에도 어김없이 느끼곤하는 '강자 앞의 약자'인 우리 얘기이기에 하마터면 '소설로만' 읽지 않을 뻔했으니 말이다.^^
작가의 섬세함에 매료된 책, 남한산성. 왕이 남한산성에 있었던 47일 간의 이야기를 쓴, 그것도 스펙타클한 전쟁 장면(?)도 없는 소설 책 <남한산성>이 울컥 눈물까지 불러냈다.
"성 안의 시간은 빛과 그림자에 실려 있었다. 아침에는 서장대 뒤쪽 소나무 숲이 밝았고, 저녁에는 동장대 쪽 성벽이 붉었다. 빛들은 차갑고 가벼웠다. 아침에는 소나무 껍질의 고랑 속이 맑아 보였고, 저녁에는 성벽에 낀 얼음이 노을에 번쩍였다. 해가 중천에서 기울기 시작하면 밝음의 자리와 어둠의 자리가 엇갈리면서 북장대 쪽 골짜기에 어둠이 고였다. 행궁 마당에는 생선 가시 같은 비질 자국이 선명했고, 저녁의 빛들이 가시 무늬 속에서 사위었다.(중략) 자리에 들기 전 임금은 때때로 오품, 육품 지방 수령들을 불러들여 성 밖의 길들을 물었다. .....세상의 길이 성에 닿아서, 안으로 들어오는 길과밖으로 나가는 길이 다르지 않을 터이니, 길을 말하라." 흘러가는 시간을 너무도 선명하게 문장으로 그려내는 능력도, 막막하고 답답했던 상황을 장면으로 엮어내는 능력도 감탄을 자아낸다. 이 작가, 소나무 끝에 부는 바람도 잡아낼 것 같다. 게다가 그 바람이 부는 이유도 나에게 멋지게 설명해 줄 것 같은데?^^ 또, 구중궁궐 신하들에게 물어서 세상의 길을 알던 왕, 신하들에게 물어야만 세상의 길을 걸을 수 있던 왕. 자신의 무능을, 부덕을 탓하느라 애간장이 녹아버린 짠한 왕을 애처로워 쓰다듬는 듯한 작가의 모습이 보인다. 게다가 먹을 것을 주면 왕도 내어주는 사공 같은 백성도, 그 백성을 안쓰러워하면서도 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그 백성을 베어버리는 김상헌 같은 신하도 품어버리는 작가의 능력이란!
"전하,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치욕은 죽음보다 가벼운 것이옵니다. 군병들이 기한을 견디듯이 전하께서도 견디고 계시니 종사의 힘이옵니다. 전하, 부디 더 큰 것들도 견디어주소서.",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못할 짓이 없고, 약한 자 또한 살아남기 위하여 못할 짓이 없는 것이옵니다." 최명길의 말처럼 왕은 살아남기 위해 남한산성에서 나와 칸의 앞에 무릎을 꿇는다. '강자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릎을 꿇어야하나 맞서 싸우다 죽어야하나?' 누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면 대답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왕의 선택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대답하지 못한다. 다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라고 생각할밖에.
칸을 따라 가야하는 세자의 손을 잡은 아비, 왕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울컥 눈물이 난다. 왕도 세자도 울컥 눈물이 났을 것이란 생각에 말이다.
고요했지만 치열했을 남한산성에서의 47일을 선명하게 그려준 작가에게 감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