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분야의 책을 이렇게나 오랜동안 깊이 고심하며 읽었던 때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참 부지런히도 내달렸던 나날이다. 물론 그 마음을 보채는 일이 활력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에 좋았다. 달 초가 되면 신간 목록의 책들을 훑어보고, 어떤 책을 읽게될까 하는 바람부터 내 손에 책이 전해지기 까지, 또한 다 읽고 나서 어떤 물음들이 내게 던져졌나 글을 써보는 과정들이 있었기에 참 소중하게 느껴진다. 거의 모든 책이 내 좁은 앎의 문턱에서 힘겹게 오르내리며 조롱하는지도 몰랐지만, 기쁨과 때로 크고 작은 감동을 전해주기도 하여서 고마운 이유다. 9기 평가단을 하는 내내 예술이 가져다 주는 풍요로운 기운들을 잔뜩 코로 들이쉬고 조금 더 나은 날숨을 내뱉게 되어 행복하다.    

 

- 신간평가단 활동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책과 그 이유   

 

<지혜로 지은 집, 한국건축>은 우리가 살아온 '집'에 대한 역사와 깊은 성찰을 담은 책이다. 전무하다 싶을 정도로 알지 못한 한국건축의 재료와 쓰임에 관한 것부터, 집의 정신적 세계관까지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한국건축의 철학에는 어떤 섬세함이 숨어 있는지 알게 된 게 가장 큰 소득이다. 틈 하나에도 어떤 과학적인 구현이 이루어졌는지 상세한 그림 설명과 함께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지혜로 지은 집, 한국건축>은 한국건축의 아름다움을 과학적이고도 섬세한 성찰의 면모로서 전해주는 아주 성실하고 인상깊은 책이었다.  

  

 

 

 

- 신간평가단 도서 중 내맘대로 좋은 책 베스트 5 

  

미술사라는 말만 들어도 읽기도 전부터 그 방대한 역사와 구분을 어찌 다 알겠는가 하는 한탄부터 나오게 마련이다. 그런데 진중권의 서양미술사는 어떤 특정한 유명작가로 대표되는 미술사가 아닌 철학적 역사적 중심에서 자연스럽게 태동된 미술사의 뿌리를 더듬는 책이다. 읽는 내내 모더니즘시대의 위대한 면모가 왜 더욱 돋보이던가를 알게 되었는데, 특히 사회적인 목소리를 냈던 격렬한 예술이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손철주의 글은 놀랍도록 시적이고 단아한 얼굴을 해서 마치 옛 시인을 만난 것 같은 착각을 들게 한다. 소박했던 옛사람들과 자연과 사물들을 한 장의 그림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되는 것도 좋았고, 작가가 유심히 바라본 소소한 즐거움을 한장 한장 글로 넘겨 보는 일도 좋았다. 계절이 바뀌거나 여유로운 감정이 드는 순간마다 자꾸 꺼내 읽어보고 싶어지는 책일 것 같다.

 

 

 


  

이 책은 한국 건축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 무지함을 새삼 반성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한국인이면서도 내가 사는 땅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했구나 하는 자조감이 이 책을 더욱 파고들라고 부축였다. 작은 돌 하나에도 쓰임이 있는 실용과 속깊은 지혜로움의 더해짐을 세심하게 바라보게 된다. 어떻게 '집'으로 완성되었는가를 아는 일은 정말 소우주의 탄생과정을 아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성찰에 반하고 그만큼 오랜시간을 공들여 읽게 되는 책이다.

 

 

 

 

 

 세계적인 건축가인데도 그 어떤 외부의 가르침 없이 독학으로 이 자리까지 오게된 점이 놀라웠다. 그의 건축에 대한 철학은 언제나 '떠남'에 있었다. 자발적 방황에서 오는 삶에 대한 물음표가 그가 지은 기둥과 지붕 위를 더돌며 아름답게 빛날 수 있었던 것 같다.  

 

 


 

 

굽시니스트의 정치 만화를 읽으면서 그가 어떻게 세상이 바뀌길 바라는지 한숨 섞인 자조와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젊은 작가의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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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화가들의 반란, 민화]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정병모 교수의 민화읽기 1
정병모 지음 / 다할미디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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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화가들의 반란, 민화>를 읽고 있자니까 입가에 저절로 미소를 머금게 된다. ‘익살스러움’의 천진난만한 기운들이 눈과 마음을 맑게 정화시켜주는 듯 하고, 저잣거리에서 복닥거리며 들려오는 소리가 색색의 풍요로움으로 전해진다. 민화를 보는 일은 그득하고도 다양한 삶의 면면을 목격하는 일처럼 자꾸 들여다보게 되는 일이다. 마치 시간을 멈추게라도 해서 그 안의 이야기를 모두 머릿속에 기록하라는 것만 같이 자주 정지하게 만든다.
우리가 민화를 두고 왜 위대한 예술인지를 논할 때 이유를 들라면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해학의 면모와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가장 인상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그림 안의 사람이 웃고 있기라도 한다면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마저 든다. 단순히 그 옛날 어느 시대를 살아간 사람이겠거니 하는 인상을 뛰어 넘은, 이들도 나와 같이 웃고 삶의 희로애락을 느꼈을 어느 개인의 역사로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간을 맞을 때마다 어떤 경지의 숭고함마저 느끼게 된다. 마치 해학이라는 미학의 일면을 한참 넘어서서 슬픔마저 밀려오는 순수의 세계, 우주의 영원 따위를 상상하게 되는 희미한 순간이다. 
 

민화는 ‘예술’이라는 거대하고도 고유한 영역의 무게에 감히 접근하지 못하다가 어쩌면 제멋대로일 수 있는 방식으로 태어난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예술이다. 대다수의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어 소박한 정취만으로 그 모든 것이게 하는 그림 한 장의 위력은 실로 엄청나다.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그래서 그 자체만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아프고도 다행스럽기도 한 독특한 태생의 예술 민화. 민화는 특정 계급이 향유하던 엄숙주의, 고급성을 상실한(물론 의도된 상실이어서 아름다운) 진중의 틀을 벗어내고, 사람 냄새 물큰 풍기는 ‘익살스러움’의 재치를 한껏 뽐내는 예술이어서 좋다. 자연과 사물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포착하고, 특별할 것 없는 사람들의 소박한 일상을 그려냈기 때문에 민화는 우리네 뒷모습을 참 많이 닮았고 그래서 더 특별하다.


민화의 또다른 면모 가운데 익살스러움과 버금가는 매력을 들자면 그 중 으뜸은 역시 ‘일탈’과 ‘자유로움’일 것이다. ‘예술’이라 함은 그 본질이 ‘상식’과 ‘관습’적인 것에 틀을 벗는데 있다. 거기에 이왕이면 인간의 가장 솔직한 단면을 마음껏 구현해 낸 것이어야 좋다. 전통과 관습의 틀을 깨고 마음껏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구사한 민화는 숙명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손에서 만들어져 도드라진 매력이 없다. 그렇지만 기존의 예술과 비교하여 위대한 점이라면 민화가 가장 솔직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당당히 말한다는 것이다. 터부시되는 금기를 상징으로 교묘히 배열하고 가장 들추기 어려운 부분만을 적나라하게 다루는 호기가 있다. 이전까지의 예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권위의 상실, 타락의 외침이다. 그래서 민화는 예술의 가장 근본적인 층위에서 그 본연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는 예술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사실 기존 예술에서 특정한 계층의 사람들이 어떤 사고와 방식으로 예술을 향유했는지 예측 가능성을 뛰어넘는 일은 거의 없다. 유교와 관습 따위를 어떻게든 중시하면서 양반문화를 예술에 구사하여왔는지 몇 편의 작품으로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거의 문자로도 기록된 바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은 이런 민화로나마 알도리가 없다. 민화의 솔직함과 자유분방함은 단도직입적이고, 때로 진지하여서 십장생도와 같은 예술작품으로는 아주 뛰어난 예술흐름을 선두할만큼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고즈넉하고 진중하기만 한 기존의 예술작품과는 다르게 항아리와 병풍, 일상생활의 물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생동감 넘치는 면도 지금의 생활 밀착형 예술의 흐름을 선두한 면면일 것이다.
서민 화가들의 다채로운 상상의 나래는 닭 한 마리를 그리더라도 있는 그대로가 아닌 분석하고 재구성한 새로운 닭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다. 꼬리를 한껏 감추고 호쾌한 기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호랑이는 또 어떠한가. 권위가 땅으로 쳐 박혀 고양이도 웃고 갈 정도의 순진무구한 표정의 양반이 보이는 듯도 하다. 이렇게 우스꽝스럽고 제멋대로의 자연의 재구성은 사실 당시 계급 문화와 사회의 단면을 비집는 ‘일탈’ 행위였다. 마음껏 놀리고 풍자하고 재미있게 웃고 떠들 수 있는 용기에서 조용히 일어난 민화는 그래서 예술의 사회적 쓰임으로서 그 질적 양상을 좀 더 다양하고 넓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는지도 모른다.


책을 보면 민화를 세계에 알리려는 저자의 오랜 숙원의 목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우리의 그림이 세계에 어떤 식으로 전해지고 그 의미를 찾아가는지 그 위상을 자세히 전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민화의 다양성이 자세한 그림과 함께 설명되어 있어서 민화의 특징을 알기에 용이하다. 우리 민화가 사람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실용성 있는 장식이 되기도 하고, 주술이 되기도 하며, 상징으로서의 예술적 가치로 남은 것도 높이 평가할 일이다. 많은 예술적 의의가 있겠지만 민화가 인간의 소박한 바람에 의해 투영된 매개체로서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는 사실은 민중의 삶이 왜 더욱 위대한 일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서민들의 마음과 염원의 유토피아를 가능케 하는 온 삶, 과거 혹은 미래의 세계관을 매개해주는 민화의 매력은 그래서 차고도 넘친다. 왜 민화 한 점을 보면서 그 때의 자연이, 사람들이, 그곳의 이야기들이 내게 쏟아져 흐르는지 그 이유를 오랫동안 생각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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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억속의 색]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우리 기억 속의 색 -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청소년권장도서
미셸 파스투로 지음, 최정수 옮김 / 안그라픽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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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 중에 최초의 기억을 자극하는 감각이라면 역시 시각일 것이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장면을 '흰색'이라는 강렬한 이미지로 기억한다. 엄마가 입원한 병원에서 고아가 된 것 처럼 막 울고 있던 나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에서 처럼 카메라가 360도 트래킹을 하며 나를 내려다보는 것으로 이미지화 되어있다. 기억은 어떻게든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틀어지고 변형되는 듯하다. 어렴풋하지만 목이 터져라 울던 내 울음소리, 이윽고 손에 백원을 쥐어 주던 '흰색' 옷을 입은 아저씨의 음성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흰옷을 입은 사람은 의사였던 것 같다. 상냥하게 ‘왜 우니?’라고 물어와 준 의사 덕분에 나는 이내 울음을 그쳤고 내가 생각하는 '흰색'의 이미지는 '황량함과 외로움'인 동시에 날 구원해준 '상냥함'의 색이다. 

 

우리가 본다는 것에 대한 인상은 인지체계에 거의 모든 것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듣고 알게 되는 감각은 어떤 이미지를 형성하기 힘들기 때문에 당연히 시각의 전형을 빌릴 수밖에 없고, 이는 다른 감각들도 마찬가지다. 시각은 여느 감각에 비해 가장 사실적이고 있는 그대로의 ‘바라봄’을 우리 뇌리에 옮겨 심는다. 물론 오류도 있을 수 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대로의 변형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러한 부작용에 따른 변형이 어떻게 보면 사람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인간적인 매력 가운데 하나이지 싶기도 하다. 어쨌든 시각으로 우리는 거의 모든 이미지로의 '앎'을 그려내어 살아간다.


<우리 기억 속의 색>은 프랑스 색의 학자 미셸 파스투로가 전 생애를 걸쳐 바라본 색의 향연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기억하는 최초의 기억부터 해서 거의 모든 삶의 전반을 돌아보게 만든다. 구체적으로 색을 통해 관통하는 인생의 이색적인 회귀를 보여주는 한편 색에 깊이 관여하는 역사, 문화적인 색의 고찰을 깊이 성찰한다. 크게 일곱 챕터로 나누어 기억을 위한 색이라는 주제로 의복, 일상생활, 예술과 문학, 스포츠, 신화와 상징, 취향, 단어들에 이르는 총망라된 색의 모든 것을 다뤄낸다. 아닌 게 아니라 이토록 색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본 일이 있었던가 싶게 기억에 입힌 색을 만져보고 그것은 내게 어떤 의미였던가를 돌아보게 하는 시간을 준다. 특히 알지 못했던 색에 얽힌 역사적 일이라던가, 상징하는 색의 서로 다른 의미, 명명함의 애매함 등을 알게 된 것은 색의 또 다른 이면을 알게 해주는 소중한 정보다.

   

색에 대한 이론을 전달하는 방식 대신 그의 어법은 내내 그 개인의 삶에서 배어나온 색의 향기를 맡게 해주는 식이다. 그래서 그의 산문을 읽는 것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쉽고 경쾌한 보폭으로 같이 걸어가는 느낌을 준다. 어떤 특정 색을 통해서 삶을 알고 역사와 시대와 문화를 알게 해주는 것, 분명 이색적인 삶의 성찰이다. 사실 이 책은 색을 구분 짓거나 각각의 인상을 말하려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색이 어떤 식으로 진화하여 왔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색이 서로 엉키고 다른 둔탁하다거나 부드럽거나 한 다른 감각들과 어울러져 기억하게 한다. 색은 어느 나라에서고 통용될 수 없는 ‘다름’을 본질로 한 저마다의 정의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셸 파스투로가 보는 색은 언제나 ‘차이’를 강조하는 색으로 그 의미를 ‘알 수 없음’에 근거하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 어떠한 색을 강조하기 보다는 다만 색조가 있을 뿐이고 그것은 ‘아마도’와 ‘완전히 아닌’ 사이의 숭고함으로 삶의 색을 말하고자 함이다. 
앞으로 살아갈 수많은 날의 색감들이 내 인생의 색을 어떻게 물들이게 될 지, 내 옆의 수많은 인생들의 색이 나를 좀 더 풍요롭게 발현시켰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드는, 그런, 짙은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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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히라노게이치로의 전작 <책을 읽는 방법>을 보면 책을 '천천히' 읽어야 그 안에 담긴 의미들을 다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어찌보면 당연한 주장이어서 처음에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만약 너무 재미있는 책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불과 몇시간 안에 독파하지 않을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들었다. 단숨에 읽힐 만큼의 책이라면 굳이 천천히 읽는게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러나 히라노게이치로의 제안은 책을 아주 오래 음미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깊은 성찰의 자세를 엿볼 수 있는 그런 책의 장인정신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책을 다 읽었을 때 왜 굳이 천천히 읽어야 하는지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경험상 아무리 재미있게 본 책이라도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 그 내용을 더듬거려보지 않은 일이 거의 없다. 이는 책을 다만 눈으로만 읽고 느낀 탓이 클 것이다. 
이번 신간 <소설 읽는 방법>은 전 책에서 다 예시하지 못한 소설의 깊은 행간들을 찾아내는데 주목한다. 마치 작가가 심어 넣은 씨앗을 알알이 찾아내는 일처럼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의 깊은 관계들을 발견해내는 기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빨리 읽었던 오랜 습관의 제동이 이 기회로 뿌리까지 다 뽑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공지영작가가 지리산 친구들의 사는 이야기를 펴냈을 때 가장 궁금했던 사람이 바로 낙장불입 이원규시인이었다. 화려한 도시생활을 접고 오롯이 '나'를 위한 삶을 살아보겠다고 지리산생활을 시작한 그의 행보는 읽는 내내 참 순수하고 진짜 삶을 사는구나 하는 용기를 엿보는 것이었다. 그런 그가 도시생활을 접은 지 어언 14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그동안 시인의 발걸음은 지리산을 비롯 전국의 시골을 찾아 헤매는 진짜 방랑의 삶이었다. 그의 애마인 모터사이클로 홀로임을 즐기면서 자연과 사람과 함께한 세월을 보낸다.
수많은 마을에 가닿고,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느낀 시인만의 감수성이 긴호흡의 길로 태어났다니 정말 반갑다. 멀리 나는 새는 집이 따로 없다는 제목처럼 홀로 지내는 고독을 불행이라 생각하지 않고 무엇보다 깨어있는 삶, 항상 어디론가 떠나게 되는 방랑기질을 이 책으로 마음껏 부러워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된다.   

 

    

'절판된 책에 바치는 헌사'라는 문구가 눈길을 사로 잡는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책을 소장하고 싶어하고 서가를 빼곡히 장식할 수 있다면 이 또한 뿌듯한 일일 것이다.
<오래된 새책>은 책수집광 박균호씨가 그만의 책에 대한 철학을 소개하며, 각각의 책에 얽힌 흥미로운 사담을 담은 책이다. 수집하게 된 경로, 왜 오래된 책이 좋은가 하는 책과의 필연적인 만남들, 특히 절판된 책에 대한 헌사를 고백하는 내용이라니 각자의 사연과 비교해 보는 재미도 클 것 같다. 오래되었어도 마치 새책을 만난 일처럼 깊은 감동을 주는 책의 깊은 애정을 마음껏 드러내는 좋은 시간이 될 것 같다.  

  

 

외항어선의 생활기라고만 해도 무척 흥미로울텐데 <풋내기 마초의 초민폐 항해기>는 무려 19살 영국 소년 바블렌의 항해기란다. 대학입시의 스트레스와 학교생활에 염증을 느낀 바블렌이 어느날 갑자기 외항어선에 오르게 되면서 좌충우돌 민폐 항해가 시작된다. 온갖 투정을 부려온 철없는 삶과 안녕을 고하고 거친 아저씨들과 먹고 자며 요절복통 에피소드를 만들어가는 바블렌의 거친 이야기가 벌써 부터 큰 파도처럼 넘실대는 것 같다. 스스로를 마초라 부르는 소년의 찌질한 사회생활 첫경험이 어떤 식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성장해 나갈지 배가 접혀질 것 같은 요절복통 폭풍웃음이 기대되는 책이다.   

 

 

이정희, 고미숙, 김여진, 오소희... 이름만 들어도 각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배운 여자' 무려 17명의 언니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반가운 책이 나왔다. 너무 똑똑해서 조금은 주눅이 들것만 같은 그녀들의 뒷이야기는 의외로 훈계조의 지침서가 아니라 그저 평범하기만 한 그녀들의 일상 혹은 인생에 대한 담담한 고백조로 담아냈다고 한다. 특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나'가 아닌 '우리'가 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란 조언, 끊임없이 지금의 '나'를 돌아보고 질문하게 하는 '배운 녀자'들의 수다에 깊이 빠져들고 싶다. 따뜻한 인생으로 만들어나갈 비타민, 에너지를 충전할만한 좋은 이야기 책일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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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신간평가단 2011-10-11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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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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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현대예술이 태동되던 시절 당시민들에게 얼마만큼의 큰 충격을 주었을지, 그들의 경멸스런 폭언과 호들갑스러운 얼굴을 상상하는 일은 현대예술을 보여주는 가장 흥미로운 일면이다. 예술은 전에 없이 극치의 정점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 파격과 충격의 소용돌이에 봉착하였다. 하지만 그 당시 보수주의자들의 눈에 이 가속은 그저 추락의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 
21세기인 지금, 우리는 현대예술을 가장 아름다운 예술적 도약의 시기로 돌아본다. 아직도 대중이 보기에 아름답지 않거나 미디어아트같은 낯선 예술을 만나면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다는 호소를 하긴 하지만 어쨌든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는 분명히 그 전의 의미와는 크게 변했다. 이런 식으로 오기까지 20세기의 사람들에게 예술의 반역은 어떻게 기성의 사유를 위협했을지 상상할수록 재미있어진다. 이 시기의 위대한 추락이 예술의 한계를 또다시 확장시킨 셈이니 말이다.


당연하게도 19세기까지의 예술은 그 목적이 하나의 극명한 지점으로 귀결되곤 했다. 그것은 바로 ‘아름다움’ 이라는 명제이다. 미의 추구야말로 예술의 본질이니 진리와도 같은 불변의 가치였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예술은 더 이상 ‘아름다움’만을 예술이 갖추어야 할 요건이 아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혁명적이고 위대한 시대였던 20세기 초반의 미술운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그 이전까지의 예술은 새로움을 추구한다거나 하는 것이 전혀 중요한 시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움을 터부시하고 기존에 있는 것과 흡사할수록 존중받던 시대였다. 신을 모방하는 일로부터 출발한 예술의 역사를 상기해보자. 신의 가장 가까운 존재인 인간, 신을 재현해내는 기술이나 높이 평가하던 시대였으니 기술로서의 예술장이나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시대였다. 작가 고유의 새로움은 신이 준 영역을 거부하는 행위였을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어 현대예술은 더 이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 심지어는 추하고 역겨운 것, 기성품을 예술이라 우기는(?) 상황에 까지 오게 된다. 이러한 예술의 시대의 도래가 가져온 충격효과는 가히 상상하기 어려운 사유체제 전반의 혁명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격렬한 시대를 그래서 우리는 예술사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기라 부르는 이유이다.




이 책은 주로 제들마이어라는 문화보수주의자의 논리를 분석하는 것을 참고하며 구성한다. 현대예술에 적대적이던 제들마이어의 태도가 결국 현대예술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들이나 호의적인 평단의 시각보다도 더 객관적일 수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가장 대척점에서 비판할 것을 찾다보니 엄격하고 정교함의 아이러니가 발휘된 것일까. 예리하고 객관적인 분석적이어서 어쩌면 이 흐름을 인정하기 어려웠다기 보다 이미 매력에 빠진게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섬세하다.

현대예술은 흔히 아방가르드의 시대라고도 불린다. 이의 근본적인 맥락은 삶이 변해야한다는 급진적 사고에서 출발한다. 예술이 더 이상 머물거나 한걸음 정도 내딛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20세기의 아방가르드 시대 예술은 당시 체제와 급변하는 환경에의 급진적 사유의 전환이 반영된 결과다. 영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고상한 차원의 것이 아닌 사회에 적극적으로 반영이 될만한 도구가 되고, 밀접한 관계 속에서 쓸만한 피드백을 주고받는 꼴이 되었다. 대놓고 자본의 수단이 되거나 정치적 구호로 쓰이기도 하고, 예술이 더 이상 예술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는 모순의 방점까지 찍는 등 수없이 많은 사조의 탄생과 소멸을 오간다. 
 

또한 현대예술 이전의 예술은 스토리텔링이 있던 신화적이고 문화적인 요소가 지배하였지만 이후의 시대에는 이를 의도적으로 완전히 배제하려다보니 점점 추상성을 띄게 된다. 그러나 극한의 기호를 배제해 버렸을때 그 의미가 상실되어버린 상태가 과연 예술일수 있을까란 문제가 생겨나게 된다. 그래서 정신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다. 근원적인 것을 진지하게 바라본다는 시각은 문명 이전의 그림에 관심을 갖는 표현주의같은 사조의 발전도 가져오게도 된다. 
뿐만 아니라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기계화된 문명과 학살의 큰 충격은 '광기'로 표출됨으로서 기술의 합리에서 도망치는 행위로 표현되기에 이른다. 예술가의 역할을 슬며시 숨겨 놓음으로서 의식의 통제를 받지 않는 초현실주의가 태동한 것이다. 이러한 끊임없는 사회 변화에 따른 사유의 전환이 궁극적으로 예술을 변화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 셈이다.
순수한 예술의 상태에서 추상화가 되기까지, 또는 바우하우스나 구축주의자들에 의해 예술이 기술과 따로 분리되지 않는 기술적 구축이 이루어지기도 하는 일 등은 미술사에서 가장 획기적이고도 전혀 새로운 맥을 짚어내야 하는 예술의 본질을 흔드는 사건이었다. 


아방가르드의 급진성은 주어진 상황이나 체계를 비판하게 하고 결국 내가 사는 세상을 마음껏 조립함으로서 의미의 폭을 넓히는 행위였는지도 모른다. 사회적 진보를 가능하게 한 예술은 이런 식으로 발전되어 간 것이다. 아마 더 이상 이보다 더 급변하는 시대는 없을거란 생각을 하니 이들의 열성적 태도를 자꾸 들여다 보게 된다. 다 알기도 힘들만큼 수많은 사조가 탄생하게 된데에는 이러한 역사적 정치적인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그 다양함들은 사회의 변혁에 혁혁한 공을 세웠고, 우리가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한 질서들을 만들어 나갔다. 언제나 현실보다 더 나은 삶으로의 몸부림이 예술 안에는 이런 식의 새로움으로 발현된 것이다. 격렬함 뿐인 예술의 한 시기가 왜 이토록 애처롭고 야단스럽게 아름다웠는지 이제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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