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구경하는 사회 - 우리는 왜 불행과 재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가
김인정 지음 / 웨일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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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문해력은 안녕하십니까?

요새 핫한 키워드 중의 하나가 문해력이다.

글자 그대로 문해력은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다.

숏폼이 유행하고, 동영상으로 학습하다보니 실제 글을 읽고 해석하는 능력이 떨어졌음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여기 있다.

바로 고통에 대한 문해력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이해하는 능력이 점점 쇠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고통을 구경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고, 같이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구경거리처럼 지켜만 볼 뿐인 것이다.

내 일이 아니니까, 그저 매끈하기만 한 고통

도대체 매끈한 고통은 어떤 고통일까?

저자의 표현 그대로라면 타인의 고통을 보는 것이 이제는 별 다른 가치의 혼돈을 가져오지 않는다.

이는 단지 고통을 구경하는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이 고통을 중개하는 사람들, 즉 언론인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고통을 보여줄 수 있고, 어떤 고통을 보여줄 수 없는지에 대한 논쟁

고통을 스펙타클하게 보여주고 싶은 욕망과 가치 사이의 갈등..

여기서 뉴스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말한다.

즉, 말 그대로 대박치는 뉴스, 핫한 뉴스를 독점 발표하고 싶은 욕망들과 사람들이 뉴스로 인해 받게 될 가치의 혼란 등에 대한 사전 판단 등이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고통의 포르노 시대가 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언론인이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인지에 대해 저자는 끊임없이 고민한다.

폭력적 소비의 유해 저널리즘이 될 것인가?

사회적 공감의 기폭제 역할을 하는 윤리적 저널리즘이 될 것인가?

자신의 선택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

또 자신의 의도와 달리 그 결과가 어디로 치닫게 되는지에 대한 저자의 끊임없는 고민을 읽고 있노라면

지금의 뉴스 기사들이 과연 '어떤 가치'를 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들도 던지게 된다.

그저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한 뉴스

선정적이고, 아무런 중심 가치를 전달하지 못하는 뉴스

지나친 TMI만 남발하는 뉴스

특히 최근 남현희, 전청조 관련한 뉴스들은 도대체 어디까지 우리는 뉴스라고 봐야 할지라는 고민도 하게 된다.

이러한 뉴스들의 범람은 과연 바람직한가?

(29) 고통을 중개하는 일에는 윤리적 딜레마가 따라붙는다.

전달하는 선택을 하는 순간, 동시에 다른 행동을 할 책임을 방기하게 된다는 딜레마.

끊임없이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살아가야 하기에 이를 딜레마라고 표현해야 하는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딜레마라는 표현 하에 '책임'을 경감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었는지 조금은 삐딱한 시선으로도 쳐다보게 된다. 소위 말하는 기레기들에 대한 면죄부를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일까..

고통을 증가하는 일에 따르는 윤리적 딜레마,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동참하는 우리들이 가져야 할 자세,

사회적 공통 테마가 수렴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공통 테마 수렴을 위해서는 우리들이 먼저 생각해야 한다.

어느 것이 옳은 방향이고, 어느 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인지..

이러한 담론을 올바르게 형성할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과연 지금 시대에 이러한 담론의 장이라고 할만한 공간이 있을까?

극과 극으로 치닫는 정쟁 가운데서

우리 사회에 시급하게 필요한 사회적 담론들에 대한 논의는 뒷전인 것 같아 씁쓸해진다.

적어도 이러한 책들을 통해 담론의 필요성, 소비적 언론의 행태에 대한 심각성을 일깨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 시대인 것 같다.

*출판사 지원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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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 왜 개혁은 항상 실패할까? 2023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박영서 지음 / 들녘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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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서 우리 삶을 뒤흔드는 현재진행형의 문제

바로 '토지' '부동산'의 문제이다.

집 한칸, 땅 한 마지기도 없는 나로서는

부동산은 여전히 먼나라이야기이다.

그런데 저자 박영서님은 안그래도 어려운 부동산 이야기를 시대를 뛰어 넘어 이야기한다.

바로 조선 시대의 부동산이야기다.

조선 사람들이 토지 불균형 문제에 대해 품었던 고민,

그 해결을 위해 노력했던 방안들..

같은 땅 덩어리인데 시대만 달리할 뿐..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나는 그동안 부동산에 대해서 나와 크게 상관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소유에 대한 관심이 크게 없어서이다.

그러나 저자는 부동산 문제는 한 국가가 가진 총체적 문제라고 말한다.

(11) "부동산 문제는 저출생 문제처럼, 한 국가가 가진 총체적 문제의 원인이면서 결과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원인들이 있어서 부동산 불균형이 나타나지만, 동시에 부동산 불균형으로 인한 어떤 결과들이 나타난다는 의미지요. 그래서 부동산 개혁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습니다."

거기에 사실 지금과 같은 '개인 소유'의 땅 개념도 조금 차이가 있다.

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의 토지제도는 왕토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왕토 사상은 '하늘 아래 모든 토지의 소유자는 왕'이라는 것으로 조세 시스템이 이 '왕토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한번도 우리나라가 강력한 왕권 국가 라는 생각을 못했는데.. 이렇게 보니. 제법 왕권이 쎈 나라였구나 하는 생각이 듬)

그러나 이 사상을 가지고 있음에도 자꾸만 토지제도가 무너졌기에 개혁론자들은 '원래대로' 돌리기를 원했다.

'모든 토지의 국유화'와 '경작자에게 직접 분배'라는 간단하지만 실현은 어려웠던 아이디어들.

실현이 어려웠던 이유는.. '권력자'들 때문이다.

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힘을 가진 '권력자들'은 자신의 토지는 가지기를 원했다.

결국 그래서 조선의 토지개혁은 자꾸만 한쪽이 기울어진 채로 이루어졌다.

유토피아의 꿈을 꾸었으나. 시작부터 삐그덕 댈 수 밖에 없었던 조선의 토지개혁.

여기에는 늘 '작은(?) 예외와 타협'이 존재했고, 머리 좋은 사대부들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법은 있으나 그 법망을 피해 얼마나 많은 사리사욕들이 채워지는지..

주어진 대로 세금을 다 내면 바보라는 소시를 듣는..

절세가 미덕처럼 여겨지는 시대라는 것은.. 씁쓸하지만 우리의 현실이다.

이렇게 법과 원칙의 교묘한 선타기를 통해 축적한 재산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것은 '법과 원칙'따위는 통하지 않는 연산군이라는 사실이 웃픈 일이다. 지금도 아마 제대로 된 개혁을 위해서는 '연산군'과 같은 미친 00이 나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조선시대 역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등장하는 인물, 사건 등등에 얽힌 토지와 집 이야기가 재미있다. 그냥 역사서를 보면 알 수 없는 당시의 '흉작 현황'들, 그리고 그로 인한 조세 현황들을 볼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로운 책이다.

실거주자에게 살 곳을 이라는 희망이 무너진 조선이 과연 지금의 우리 사회와 다른 점이 있을까? 하는 한숨이 나오기도 하는 책인데.. 과연 우리는 지금 이 시점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만 이 수렁을 탈출 할 수 있을까?

저자는 희망을 포기하지 말라고 하는데..

정말 희망이 있기는 한 것일까? 저자가 말하는 '살(live) 권리'라는 것이 사회적 담론이 형성되어야 할 일인데, 그러한 담론이 형성되기까지는 또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조선의 부동산정책, 주거 정책의 변천과정과 그 실패과정들을 통해 지금의 상황을 돌아볼 수 있었던 책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출판사 지원도서로 읽고 솔직하게 리뷰를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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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문화 소비 트렌드 - 지금 눈여겨봐야 할 문화소비자들의 욕망
신형덕 외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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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심코 한 작은 행동들.

그 행동들에 숨겨진 의미들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그 행동들에 대해 '소비'와 관련하여 키워드를 잡았다.

2023년에는 <문화 트렌드 2023>이라는 이름으로 현상을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했다면,

이번에는 <2024 문화 소비 트렌드>라고 하여 '소비'라는 이름이 붙었다.

책을 읽는 내내 .. 왜 굳이 '소비'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아! 하는 깨달음이 왔다.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사람들이 누굴까?

단순히 '시대의 문화 흐름' '문화 트렌드'가 궁금한 사람들이 아니다.

바로 마케팅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마케팅은 왜 하는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소비'를 유도하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2023년에 비해 2024년에는 조금 더 '마케터'들을 고려해서 책을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재미있다.

지금 시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새 '유튜브'나 'TV'에서 유행하는 것, 거리에서 유행하는 것, 소비의 유행 등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우리들의 소비'가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지,

고객들의 관심이 무엇에 쏠리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냥 '여기'에 관심있어하네..

라는 빅데이터의 분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왜 거기에 관심이 있는지

어떤 요인들이 그 안에 숨겨져 있는지까지

마치 양파껍질 까듯이 벗겨 간다.

생소한 용어들도 많다.

리스크 어버서..

레이지어터..

피핑 톰..

낯설지만 의미를 보니.. 지금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내 모습이며 우리들의 모습이다.

23년을 보내며 내가 열광했던 컨텐츠들이 어떤 트렌드 흐름 속에서 나오는 것인지

요새 관심가는 것들이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지... 한마디로 재미있다.

특히 유행에 민감한 사람들이라면 자신이 요새 관심있어하고 소비하고 있는 것들이 어떤 이름으로 해석되고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도 심심치 않은 재미를 줄 걸로 생각된다.

스마트 스토어를 포함하여 '사장'님이신 분들은 이 책을 통해 내년 판매전략 혹은 광고 전략을 세울 수도 있어 보인다.

복고풍의 제품을 소개한다거나,

창작 캐릭터를 만든다거나 하는 부분들이다.

마케터들의 입장에서는 이 책은 옆에 두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연출 방향이 시대적 흐름에 맞는지,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 요소가 있는지도 한번 체크해볼 수 있을 듯 하다.

(115) "사람마다 삶에서 감동하는 부분이 다르기에 개인의 고유한 기준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지금의 시대는 '각자의 기준'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시대이다. 이것이 누군가와 비슷한 삶을 따르는 것일수 있고, 그 와중에 나만의 개성을 따르는 삶일 수 있다.

과거에 비해 획일화를 선호하지 않는 세상.

이러한 세상에서 나의 취향을 찾아가고, 나만의 기준을 세우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 노력의 일환이 다양한 분야에 대한 책 읽기가 아닐까?

평상시 자주 읽는 책과는 결이 조금 다르지만..

덕분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돈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알 수있었던 책 [2024 문화소비 트렌드] 출판사 지원으로 잘 읽고, 솔직하게 리뷰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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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에세이를 쓰겠습니다
가랑비메이커 지음 / 문장과장면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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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유형의 책을 좋아하세요?"

책을 좋아한다는 걸 아는 사람들이 묻는 통상적인 질문이다.

대답은 그때 그때 달라진다.

어떤 날은 역사책, 어떤 날은 철학책이 되곤 한다.

"그럼 별로 안좋아하는 책은요?"

오늘까지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결 같았다.

"에세이요!"

"왜 에세이를 싫어하세요?"

"작가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생각, 감정을 지나치게 나에게 강요하는 것 같아요."

작가가 머물렀던 공간으로 초대한다는 초대장이 나는 별로 반갑지 않았다.

작가의 생각과 감정과 감각까지 공유한다는 것이 꼭 필요한가?

그래서 책[오늘은 에세이를 쓰겠습니다]를 보면서도

'과연 내가 이 책을 읽고 나면 에세이를 좋아할 수 있을까?'

라는 우려 반, 기대 반이 섞인 감정을 가지고 책을 읽었다.

처음 시작은 우리는 왜 글을 써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들이다.

공감한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글을 써야 하는 이유일뿐, 내가 에세이를 읽어야 할 이유는 아니야!

라는 반감이 들었다. 그러다가 다음 문장을 만났다.

(40) "작가의 존재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글일수록 독자는 더욱 글에 빠져들게 됩니다.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기대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것이죠.

우리가 우리를 깊이 생각하고 깨닫게 될 때, 그때의 글은 깨끗하게 닦인 거울이 됩니다.

작가는 글을 통하여 자신을 돌아보고

독자는 작가의 고백에 자신을 투영하여 마음껏 음미하고 향유할 수 있게 됩니다."

나는 그동안 에세이를 '거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의 전기나 평전을 읽는 기분으로, 그의 생각과 감정을 평가했다.

과연 그 안에 나를 비춰볼려고 했던가?

내용 요약하고, 핵심 주제 찾고, 키워드 뽑아내는 식으로 참고서적 텍스트로만 책을 대했다.

책의 문제가 아니었다.

책을 대하는 나의 자세가 문제였다.

이 부분을 깨닫고 나니 가랑비메이커 작가의 책 [오늘은 에세이를 쓰겠습니다]를 보는 내 시선이 달라졌다.

'글은 원래부터 쓰던 사람이나 쓰는거지 뭘' 이라며 아니꼬운 시선들이

'그렇다면 나도 이제는 내 안의 생각을 담아 써볼까?' 하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특히 에세이라는 것이 일상적 쓰기와 다른 문학적 쓰기라는 것이 와닿았다.

블로그에 남기는 이 책 리뷰도 일상적 쓰기에 지나지 않았다.

이를 문학적 쓰기로 바꾸기 위해서는 분명한 문학적 목표를 가지고 구조화된 글쓰기가 필요하다.

책을 읽고 그에 대한 감상을 폐쇄적으로 쓰게 되면 이는 일상적 글쓰기이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를 향하여 독립적인 한편의 글로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도록 쓴다면 이는 문학적 글쓰기이다.

작고 일시적인 파급력을 보여주고 폐기되는 것이 일상적 쓰기라면,

문학적 쓰기는 크고 지속적인 파급력을 가졌기에 깊은 사유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그동안 나의 책 리뷰는 일상적 쓰기에 불과했다.

책을 내가 이렇게 읽었고, 책이 좋았어요..로 끝나는 단순한 감상문에 불과했다.

거기에 조금 더 하면 마케팅 차원에서 "이런 분들께 추천해요" 정도랄까?

여기에 나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를 가지고, 나의 생각과 경험을 포함시킨다면

이는 문학적 글쓰기, 에세이가 된다.

욕심이 난다.

천편 일률적인 도서 감상문이 아닌

나만의 색깔과 향기가 묻어나는 에세이로 표현하고 싶다.

에세이의 고전이라고 볼 수 있는 몽테뉴의 수상록(Essai)도 그가 독서하는 도중에 발견한 깨달음들을 담아내고 있다.

몽테뉴의 독서와 사색의 결과들을 담은 [수상록]처럼 나의 글들도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온전한 사유를 담아내길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감사하게도 [오늘은 에세이를 쓰겠습니다]에 잘 담겨 있다.

남은 것은 책의 내용처럼 '글감'을 찾아, '주제'를 건지고, '하나의 주제'로 '생생하게' 그려지는 개성적인 글을 쓰는 것이다.

이제는 책을 읽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으로 성장해 나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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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의 노래·아이와 전쟁 책세상 세계문학 7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송기정 옮김 / 책세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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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의 노래 / 아이와 전쟁 / 르 클레지오 / 책세상

✔️르 클레지오 작가의 자전적 소설

✔️만연체 글이 아니어서 쉽게 술술 읽히는 매력

✔️세계대전을 그렸으나 지금 현재의 전쟁 중인 나라들의 모습도 함께 그려지는 이야기

✔️ 특히 팔레스타인을 생각하면서 읽으면 더 좋음

✔️전쟁이라는 키워드가 가지는 무거움과 아픔을 지나치게 무겁지 않게 전달하는 책

✔️ 한국을 좋아한다는 작가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짐.

(54) "물론 세상은 변했다.

풍속도 복장도 달라졌고, 고유의 언어도 다소 잊혔다.

하지만 어느 날 저녁, 누군가 그곳 황야에서,

비가 오고 바람이 불 때,

개 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집과 멀린 떨어진 곳에서 그 악기를 연주한다면,

사라졌다고 믿었던 모든 것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올 것이다. "

아마도 르 클레지오는 <브르타뉴의 노래> 글을 쓰면서 백파이프 연주를 계속해서 듣지

않았을까

책을 읽는 내내 아련한 느낌의 고향 가곡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르 클레지오의 이야기 [브르타뉴의 노래]에는 어떤 갈등 요소도 특별한 등장인물이 없다.

주인공은 오직 '브르타뉴' 지역 뿐이다.

저자인 르 클레지오가 어린시절 만났던 '브르타뉴'에 대한 추억들

그리고 지금의 시점에서 만난 '브르타뉴'의 변화된 모습들.

이에 대한 짧은 단상들이 이야기를 이루고 있다.

(57) "어른이 되어 다시 브르타뉴에 갔을 때,

나는 도리포로스를 찾아 보았지만 도리포로스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 그러고 보니 결국 창을 가진 자는 인간이었다! (...)

이 작은 존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삶의 주기가 사라졌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분명 감자의 수확량은 늘었다.

하지만 브르타뉴의 땅에는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었다."

(80) 해안가 마을에서는 야생초를 경작할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 사회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곳은 토끼와 노루와 여우를 위한 세상이지 인류를 위한 세상이 아니었다. 아니면 지금은 사라져버린 다른 종의 인류를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야기 속에는 인간들의 무지함 혹은 편의성을 위해 희생된 다양한 생물종들의 소멸의 모습이 그려진다.

다양성의 부재, 다양성의 소멸이라는 어찌보면 무거운 주제가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내리고 있다.

과거에는 '다양성'을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인간'만이 살아남기 위해 나머지들을 무참하게 멸종시켜버린 것일까?

(59) "브르타뉴, 특히 어머니가 가장 좋아했던 퐁라베 지방, (....) 그곳은 전쟁과 파괴의 고장이다."

(73)"브르타뉴에 있을 때면 나는 전쟁이 끝나고 5년이 지난 후 그곳이 어땠었나에 대한 기억을 되찾고자 토르슈곶을 방문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요즘 아이들도 토르슈에 오지만, 그 아이들은 다른 것을 본다."

또한, 작품에는 '세계대전'이라는 어둡고 무거운 시기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무거운 서사가 계속되기 보다는 '브르타뉴'의 입장에서,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황을 적당한 무게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묘사들이 그려내는 삶의 모습은 긴 시간의 흐름 속에 찰나처럼 지나가는 우리네 인생에 대한 모습들이다.

(77)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던 시기였지만, 우리는 그런 것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랬기에 우리는 유년기 시절에 우리가 경험했던 것들이 영원히 지속되리라 믿었을 수도 있다."

(83) 내가 아는 세상 이전에 다른 세상이 있었음을, 나는 그저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에 불과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저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로서 내가 바라보는 '브르타뉴'는 존재 자체는 변하지 않은 채 잠시 외향이 변해가고 있는 모습이다.

별것 아닐 수 있는 문장이지만 문장 속에서 어딘가 모를 쓸쓸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것이 단지 '브르타뉴' 여서가 아니라.. 우리 주변의 모든 장소들에도 이러한 "쓸쓸함"이 머물 수 있다.

다만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일 것이다.

(89) 브레즈 아타오('브르타뉴여 영원히') (...) 마치 브르타뉴 사람이면 프랑스인은 될 수 없다는 듯이, 마치 그 두 개는 서로 완전히 반대어라는 듯이 말이다. 혹은 그 모든 것은 그저 지난 시대 이야기일뿐이며, 지금은 막연하고 아무 쓸모도 없는 향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98) 사실 브르타뉴에는 타인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오랜 전통이 있다. 아마도 이주와 족외혼이 그들의 유전자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은 프랑스 지방 중 드물게 팔레스타인의 입장을 지지한 지역이다.

이 책 [브르타뉴의 노래]를 읽기 전까지는 프랑스의 '브르타뉴' 지역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이 지역이 특별히 팔레스타인을 지지한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그리고 더 흥미로운 것은 유럽은 각 지역마다의 특색이 어딘가 살아있구나 하는 느낌이다.

우리나라에서 이와 같은 생생함을 그려내면 오히려 '지역색'을 드러낸다고 하여 부정적 평가를 받기 쉬울 텐데 말이다.

사실 특별한 지역색을 가지고 있는 편은 아니기 때문인지, 이러한 '지역색'이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하게도 느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국가'라는 이름 하에 정말 중요한 각 지역마다의 특색을 상실해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유독 이 생각이 강하게 든 것은 아마도 최근 '서울 편입'과 관련된 들썩들썩한 경기도 일부 도시들의 이야기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106) 나는 바로 그런 이들에게 이 소소한 이야기를 바치고 싶다. 이것은 고백이나 추억 앨범이 아니다. 그저 단조로우면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브르타뉴의 노래다. 지금도 폭풍우 속에서 '노래하는 바위'가 부르는 노래, 그 오래된 지난날 밤 축제의 열기 속에서 우리 조상들이 브르타뉴의 전통악기 비니우와 봉바르드의 날카로운 음악을 배경으로 발을 구르며 반복하여 전하던, 바람이 실어간 노래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각자의 특색에 따라 '각자의 노래'를 찾아가고 계승해나가는 것은 아닐까?

굳이 '서울'로 대동단결하는 모습이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생각도 든다.

책속의 두번째 수록 작품인 [아이와 전쟁].

작가 자신이 겪은 전쟁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가 지금 이 시점에 더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매일 빼놓지 않고 들리는 팔레스타인 아이들의 소식 때문이다.

책 속의 내용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폭격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고 죽어가고 있는 아이들

(116) 나는 캐나다 폭탄으로 터져버린 고막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타격을 받았거늘, 하물며 그토록 무겁고 강력한 폭탄에 대해, 콘크리트도 뚫을 수 있고 지하 3층에 있는 적까지도 타격하도록 만들어진 폭탄에 대해 요즘 아이들은 어떤 기억을 가질까?

아이들은 어떻게 전쟁 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가?

부상당하지 않더라도, 한 번이 아니라 열 번, 스무 번의 폭발음을 들어 익숙해질지라도, 사람들이

"전쟁이다"라고 말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라도 말이다. 어떻게 그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르 클레지오의 말처럼 전쟁으로 인한 부상이나 죽음보다도 전쟁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살아야만 하는 아이들..

운좋게도 나는 전쟁을 잠시 중단한 나라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직접적으로 겪지 않았다.

전쟁을 준비하는 일을 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전쟁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와 ..

태어나보니 전쟁 중이었던 아이..

둘 중 누가 더 전쟁을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과연 전쟁에 대해 무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작금의 사태때문에 더욱 마음이 무거워지고, 가슴 한편이 아파지는 이야기 [아이와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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