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
고미숙 지음 / 사계절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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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얼마전 도서관을 갔다가 홍명희의 대하소설 『임꺽정』을 만났다. 새롭게 출간된 개정판이었는데 그 고운 모습에 절로 손길이 갔다. 워낙 유명한 임꺽정이지만 사실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는 터라 궁금한 마음에 살짝 책을 꺼내 들었지만, 10권의 책들이 내뿜는 그 위용에 이내 멈칫했다. 책 읽는 속도가 느린 내게 10권을 넘나드는 대하소설을 시작하는 건 언제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언젠가 읽으리라 다짐하며 다시 책을 내려 놓았다.

그런데 얼마전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열혈 마니아인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웬일로 홍명희의 대하소설 『임꺽정』을 들고 나왔다. 이름하야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마이너리티한 표정을 한껏 내뿜는 일러스트의 책표지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는다. 연이어 열하일기 관련 책들을 출간하며 내내 열하일기하고만 지낼 것 같던 그녀가 갑자기, 뜬금없이 임꺽정이라니. 처음엔 조금 의아했다. 그러나 이런 의문은 책머리의 글들을 읽다보면 금세 풀린다. (참고로 홍명희의 『임꺽정』은 사계절 출판사에서 나왔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을 처음 알게 된 건 작년에 우연히 만났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를 통해서였다. 연암의 열하일기를 청소년용으로 쉬운 말로 풀어 쓰고 읽기 편하도록 내용을 재구성한 책이었는데, 지루할 거란 처음의 예상과 달리 무척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우연히 만난 이책을 통해 열하일기의 숨겨진 재미를 맛볼 수 있었던 것도 좋았지만, 그보다 어렵게만 느껴지던 고전을 이토록 쉽고 유쾌하게 들려주는 작가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반가웠다. 나중에 알고보니 저자는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으로 이미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인기 작가였다.

그런 까닭에 '고미숙'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이책을 선택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도서관에서 살짝 맛보았던 '임꺽정'에 대한 궁금증도 한몫 했음을 부인하진 않겠다.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을 언제 읽을지는 기약할 수 없지만 '임꺽정'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는 게 없고 궁금한 게 많았다. 그래서 이책의 등장은 더없이 반가웠다. 그리고 표지의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라는 글이 무색하지 않게 무척이나 유쾌한 책읽기였다.


책은 크게 경제, 공부, 우정, 사랑과 성, 여성, 사상, 조직이라는 7개의 꼭지로 이루어져 있다. 꺽정이를 비롯해 그와 함께 청석골을 이끌었던 유복이, 봉학이, 돌석이, 천왕동이, 오주, 막봉이 같은 칠두령은 물론이고 청석골 원조 도적패인 오가와 배신의 아이콘 서림이, 꺽정이의 스승이자 모든 사상의 교두보였던 갖바치 등 『임꺽정』에 등장한 주요 인물들을 살펴봄으로써 저자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각각의 테마가 모두 재미있었지만 특히 '공부'와 '여성' 부분이 재미있었다. 꺽정이와 친구들은 모두 노는 남자다. 전문용어로 일명 '백수'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얹혀 살면서도 기죽지 않는다. 항상 자신에게 당당하다. '이태백'이라는 신조어가 생기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떠올릴 때 이들의 모습은 놀랍다. 또한 꺽정이와 친구들은 무식하다. 엘리트 코스는커녕 정규 과정조차 제대로 밟지 못했다. 신분이 하나같이 미천한 까닭도 있었지만 천성적으로 글공부와는 거리가 먼 이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제각각 분야에서는 '달인'이었다. 봉학이는 활의 달인, 유복이는 표창의 달인, 천왕동이는 축지법과 장기의 달인, 돌석이는 돌팔매의 달인, 하다못해 서림이는 속이기의 달인이다. 지금처럼 입시나 취업 같은 특정 목표를 위한 억지 공부가 아니라 단지 재밌고 잘 하고 싶다는 이유로 반복해 달인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노는 것이 배우는 것으로 이어진 삶이다.

『임꺽정』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여성 인물들이었는데, 이들은 우리가 흔히 조선시대 하면 떠오르는 그런 수동적인 여인들이 아니었다. 집안의 권력은 가정 내 거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하던 여성에게 있었고 시집살이 만큼 데릴사위가 흔했기에 고부간의 갈등보다 장모와 사위 간의 갈등이 더욱 빈번하게 등장한다. 여성의 재혼에 대해 범죄시하지 않았고 재산에 대해서도 권리를 가졌으며 성에 대해서도 당당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조선시대의 이미지는 사림에 의해 성리학적 이념이 사회를 지배하던 조선 중기 이후로, 그 이전 시대였던 『임꺽정』의 여성들의 모습은 활기찼고 생기가 넘쳤다. 그와 함께 성리학의 지배로 이후 여성들의 이런 활기가 그대로 묻혔다는 점은 참으로 애석하다.

마지막으로 청석골을 이끄는 칠두령의 모습도 감동적이었다. 싸울 때는 가장 먼저 앞장 서서 싸우고, 도망갈 때는 마지막까지 남아 끝을 지키는 그들의 모습은 이 시대의 지도자들이 진정 배워야 할 모습이 아닐런지.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은 벽초 홍명희의 대하소설 『임꺽정』을 고전평론가 고미숙의 유쾌한 시선으로 낱낱이 파헤친 재미있는 고전 해설책이다. 지난 여름 사계절 출판사로부터 소설 『임꺽정』에 대한 강의를 의뢰받으면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열하일기』를 지나 한창 루쉰에게 빠져있던 작가로 하여금 『임꺽정』에 한눈을 팔게 만들었고, 팔딱거리는 『임꺽정』의 매력에 작가가 본의 아니게 빠져들면서 이책이 태어났다. 

조선시대 입말로 씌여졌다는 『임꺽정』처럼 고미숙의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또한 입말체로 씌여져 더욱 쉽게 다가왔다. 『임꺽정』이 궁금하지만 나처럼 그책을 읽을 엄두를 못내고 있다면 우선 이책부터 들어보자. 『임꺽정』에 대한 작가의 유쾌한 입담에 정신없이 빠져들게 될 것이다. 또한 이미 『임꺽정』을 읽어본 독자라면 이책을 통해 자신과 저자의 관점을 비교해 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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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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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도날 (The Razor's Edge) | 서머싯 몸 |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06 


예전에 에드워드 노튼이 출연했던 영화 〈페인티드 베일〉을 본 적이 있다. 한 여자의 일생을 통해 삶과 사랑에 대한 의미를 잔잔하게 풀어내는 이야기가 좋았다. 그 영화의 원작이 『달과 6펜스』로 유명한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이라는 이야기는 듣고는 원작소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읽어보질 못했다. 그러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통해 『면도날(민음사,2009)』을 먼저 만났다. 학창시절 『달과 6펜스』를 읽긴 했지만 논술 대비용이라 서머싯 몸의 작품을 제대로 만나는 건 이책이 처음인 셈이다. 그리고 그 첫만남은 기대 이상으로 즐거웠다. 『면도날』은 『달과 6펜스』, 『인간의 굴레에서』와 함께 서머싯 몸의 3대 장편소설로 꼽히는 작품이란다.

고전문학을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닌 데다가 책도 예상외로 두꺼워서 책을 읽기 전부터 혹시 지루하지는 않을까 싶은 걱정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예상과 달리 흡인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충격적이거나 도발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전개가 빠른 소설도 아니다. 물론 소설 속 인물들이 겪는 사건들을 평범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며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하지도 않는다. 작중 화자의 회고를 통해 전개되는 이야기는 오히려 물 흐르듯 담담하고 차분하다. 적당히 세속적인 면을 띠지만 한편으론 철학적이고 현학적이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한 번 책을 잡으면 웬만해선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500 페이지를 훌쩍 넘기는 두툼한 책의 책장이 쉬지 않고 넘어간다.


『면도날』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평범한 삶을 거부한 채 모험을 떠난 래리와 그녀의 약혼녀 이사벨, 이사벨을 사랑하는 래리의 친구 그레이, 감수성이 예민한 소녀 소피, 이사벨의 외삼촌 엘리엇, 파리 화단의 여자 수잔, 그리고 유명한 작가이자 그들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해주는 화자인 '나'가 있다. 『면도날』은 이들의 만들어내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서로 날실과 씨실처럼 얽히고 설키면서 진행된다.

미국 시골마을의 밝고 쾌활한 소년 래리는 비행에 대한 막연한 기대에 1차 세계대전에 조종사로 참전한다. 그러나 비행의 흥분도 잠시, 전쟁 중 친한 동료가 자신의 눈앞에서 숨을 거두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깊은 충격에 빠진다. 전쟁이 끝나고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래리의 마음 속 혼란은 가라앉질 않는다. 대학으로의 복학도 탐나는 취직 자리도 마다한 채 독서와 사색으로 자신의 세계에 침잠하던 래리는 마침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질문의 답을 찾아 편안하고 안락한 삶이 보장된 미국을 떠나 파리로 향한다. 삶의 근원적인 의문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찾기 위한 래리의 길고 고독한 여행길은 그렇게 시작된다. 

래리를 깊이 사랑하지만 그가 원하는 삶의 방식에 동조할 수 없었던 약혼녀 이사벨은 결국 래리 대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있는 그레이와의 결혼을 택한다. 잘 나가는 증권회사 사장이었던 그레이는 미국의 부흥기와 함께 큰 부를 누리지만 곧이어 덮친 대공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파산하고 만다. 시를 사랑하던 감수성 예민하던 소녀 소피는 불의의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을 견디지 못해 삶을 놓아버리고, 파리의 화가들 사이를 전전하며 밑바닥 인생을 사는 수잔은 그럼에도 삶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사교계에 입성한 후 갖은 노력으로 입지를 다져온 엘리엇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면도날』은 특이하게도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작중 화자로 작가 자신이 등장한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지식을 활용해 표현하자면 1인칭 관찰자 시점인 셈이다. 서머싯 몸이라는 이름의 유명 작가인 '나'는 책의 첫머리에 『달과 6펜스』 같은 실제 자신의 작품을 거론하며, 이책의 이야기는 소설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알고 지낸 한 청년이 선택한 독특한 방식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꾸밈없이 가능한 그대로 옮긴 글이라고 말한다. 그와 함께 생존자들의 보호를 위해 이름은 익명으로 바꿨다고 덧붙인다.

이쯤되면 독자들은 작중 화자인 '나'가 실제 작가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작가가 만들어낸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인지, 또 이책의 이야기가 소설인지 아니면 정말 누군가의 삶을 기록한 에세이인지 슬슬 헛갈리기 시작한다. '나'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혹은 그 모든 것이 그의 상상에서 나온 허구일지라도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너무나 태연한 태도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나', 즉 소설 속 작가 서머싯 몸 덕분에 책을 읽는 내내 등장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이 진짜처럼 생생하게 다가와 책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면도날』의 가장 중심축을 이루는 건 래리의 삶이다. 래리는 안락하고 편안한 자신의 미래를 과감히 내던지고 스스로 고행길을 자처한다. 보통의 사람들, 그러니깐 이사벨이나 그레이 같은 이들은 상상도 못할 뿐만 아니라 납득할 수 없는 삶의 행로를 래리는 무심히 걸어나간다. 삶과 죽음, 선과 악 같은 정답이 없는 삶의 본질적인 의문에 자신만의 답을 찾기 위해 미국을 떠난 그는 프랑스의 탄광, 독일의 농장, 수도원,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거쳐 인도에 이르는 길고도 다양한 여행을 통해 마침내 자신만의 답을 만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한 자기완성을 위해 세상이 말하는 것과는 다른 삶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다.

래리의 삶 못지 않게 작가는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그의 주변인들의 인생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이사벨, 그레이, 엘리엇, 소피, 그리고 수잔이라는 전형적인 인물과 개성적인 인물을 적절히 배합해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이끌어낸다. 가장 현실적인 인물인 이사벨과 그레이는 돈과 일을 통해 자신들의 행복을 완성하고, 상류사회의 사교계에 삶의 전부를 걸었던 엘리엇은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초대장을 손에 쥔 채 눈을 감는다. 세상이 던진 시련에 무너진 소피와 그것을 꿋꿋하게 이겨낸 수잔은 각각의 길을 찾는다. 


작가는 래리의 선택이 숭고하다고 치켜세우거나 이사벨이 속물적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다양한 사람들의 선택한 다채로운 삶을 행로를 그저 보여줄 뿐이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에 대한 판단은 고스란히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그와 함께 등장 인물들이 만들어가는 저마다의 삶에 애정을 표함으로써 누구의 삶이든 그만의 가치가 있는 것이라 말한다. 이책의 이야기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결국은 성공담이 되었다는 작가의 마지막 말처럼 이책의 인물들은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 그게 성공이든, 자유든, 혹은 죽음이든 그들은 최선의 방법을 택했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행복을 얻었다. 

책을 읽기 전부터 궁금하던 제목의 의미는 책속에서도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단지 책의 맨 앞에 실려있는 '면도날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그러므로 현자가 이르노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어려우니라.'라는 키타 우파니샤드의 인용문에서 그 의미를 추론해 볼 뿐이다.


『면도날』은 구원이라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전혀 무겁지 않은 유쾌한 소설이었다. 어렵지 않고 간결한 문체와 탄탄하고 흡입력 있는 스토리, 사랑스러운 캐릭터와 중간중간 빛을 발하는 냉소적이지만 유쾌한 그의 유머 등은 서머싯 몸에 대한 호기심을 호감으로 바꿔놓았다. 코드가 맞는 작가를 만난다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덕분에 그의 다른 작품들은 무척 궁금해지기 시작했는데, 우선 전부터 읽어보고 싶었던 『인생의 베일』과 줄거리마저 희미해져 버린 『달과 6펜스』를 먼저 찜해 놓아야겠다. 기회가 닿는다면 놓치지 말고 만나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나처럼 고전 문학을 좋아하지 않은 독자도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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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 - Chaw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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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는 좀 늦었지만, <차우>를 본 건 개봉날이었다. 식인 멧돼지가 나오는 괴수 영화라는 점 외에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단지 엄태웅이나 정유미, 장항선 등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이 나온다는 것 정도의 정보만 알고 영화관을 찾았다. 예상외로 사람들이 좀 있었다. 개봉작이니 당연한 건지도. 여튼 영화가 처음 시작하자마자 조금 후회를 했다. 혼자서 괴수 영화를 보러 오는 게 아니었는데, 공포 영화도 안 보면서 웬 괴수영화!하며. 초반에 멧돼지가 잘근잘근 씹는 소리를 내며 점점 피를 튀기는 장면은, 으, 그 소리만 생각해도 소름이 돋았다.

그렇게 조금은 힘을 준 첫장면이 지나면 살인사건 수사가 진행중인 한가한 시골마을과 음주단속을 하느라 정신없는 서울의 풍경이 교차된다. 장난삼아 '아무데나'라고 써넣었던 것이 발단이 되어 서울에서 시골로 발령이 난 김순경 엄태웅은 치매 걸린 엄마와 임신한 아내와 함께 작은 시골 마을에 도착한다. 시골 경찰서에 가서 한가하게 시간이나 죽이라던 주위 사람들의 말과 달리 김순경이 도착할 때쯤 마을은 원인 불명의 살인사건으로 뒤숭숭하고, 손녀를 잃은 천 포수는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 짐승, 그것도 거대한 짐승이라고 경고한다.

수확철에 이른 주말 농장으로 도시 사람들이 물밀듯 밀려오면서 조용한 시골 마을 전체가 들썩이고 있을 때 엄청난 크기의 멧돼지가 나타나는 사고가 발생한다. 마을 유지인 농장 주인은 유능한 백 포수를 기용해 거대 멧돼지를 잡는 데 성공하지만, 암컷을 잃은 수컷이 곧 마을로 내려올 거던 천포수의 경고는 얼마후 그대로 재현된다. 손녀의 원수를 갚고 마을 사람들을 위험에서 구하려는 전직 포수인 천 포수와 한때 그의 제자였던 백 포수, 살인 사건을 맡았던 신형사와 논문을 위해 그들에게 끼여든 동물 생태 연구가가 추격대를 이루고, 갑자기 사라진 엄마를 찾으려는 김 순경이 합류하면서 그들의 아슬아슬한 모험이 시작된다.

<차우>의 가장 큰 볼거리는 아무래도 제목처럼 차우, 거대 식인 멧돼지일 것이다.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등치에서부터 관객을 압도하는 변종 식인 멧돼지는 영화 초반부터 마지막까지 종횡무진 뛰어다니며 영화 속 사람들과 관객들을 공포로 밀어넣는다. 차우 혼자 나오는 장면에서는 무척이나 자연스럽지만, 한 화면에 사람과 겹쳐지면 어느 정도 CG티가 난다. 몇 장면들은 확연히 보일 정도였다. 그렇지만 한올한올 생생하게 움직이는 차우의 털들이나 움직임 등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아쉬운 장면이 없진 않았지만 식인 멧돼지라는 괴수 차우의 모습은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보인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알았는데, 차우를 잡으러 추격대가 들어서는 산속 풍경은 미국 로케이션이란다. 산속 풍경이 조금 특이하다 싶긴 했지만 설마 그곳이 미국숲일 줄이야! 그런 평범한 풍경을 찍기 위해 굳이 미국까지 로케이션을 했다는 것과 정작 로케이션을 했으나 화면상 돈들인 티가 거의 나지 않는다는 점이 너무 황당했다. 그럴 돈이 있으면 CG에 조금 더 신경을 쓰지, 싶은 생각도 들고 말이다. 조금 이국적인 풍경을 내는 산속 풍경은, 오히려 시골 마을의 그것과는 이질적인 느낌만을 남긴 게 아닌가 싶다.

스토리는 아무래도 아쉬움이 남는다. 스케일이 큰 영화들이 흔히 저지르기 쉬운 부실한 드라마는 <차우>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도 배우들의 연기는 좋았다. 특히 강력한 포스를 뿜으며 영화의 중심을 잡아주는 장항선의 연기는 이 영화에서도 빛난다. 엄태웅과 정유미, 박혁권 등의 연기도 괜찮았다. 윤제문 또한 독해 보이면서도 어눌한 백 포수를 잘 표현했다. 다만 전체적인 스타일이나 분위기가 <그림자 살인>과 좀 비슷하다 싶었다. 물론 나만의 느낌인지도 믈겠지만.

<차우>는 인간의 욕심으로 만들어낸 변종 식인 멧돼지라는 괴물이 다시 인간을 습격하는 참극을 통해 자연을 거스르는 인간의 욕심에 대해 경고한다. 또한 인간에게는 괴물이지만 자신의 새끼를 위해서는 위험까지 무릅쓰는 모습을 통해 부성애를 부각시킨다. 차우 또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을 습격했을 뿐, 인간이 만들어낸 피해자일 뿐인 것이다. 

이런 약간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지만 <차우>는 전체적으로는 그저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오락 영화이자 여름을 시원하게 만들어줄 괴수 영화다. 영화는 공포감 만큼이나 웃음을 이끌어낼 만한 장치들을 전반에 해두었는데, 그것들이 개인적으로는 무척이나 썰렁했다. 분명 웃긴다고 넣은 장면 같은데 이걸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마지막에 실소하게 되는 그런 장면들이 당황스러웠다. 전체적으로 이 영화에서 구사하는 유머들이 좀 촌스럽다고나 할까. 

그런데 영화평을 보니 다들 정말 웃겼단다. 나의 유머 코드가 특이한 건가, 생각해 봤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걸. 이 영화의 유머들이 촌스럽다고 생각한 것은 정작 나뿐이었을까.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쨌거나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내겐 영화속 유머들이 별로 웃기질 않았다는 것이다. 영화 본 후에 알았는데 <차우>의 감독이 <시실리 2km>를 만들었던 감독이란다. 공포물은 거의 안 보는 터라 그 영화도 보질 않았는데, 웃음 코드가 조금 독특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었다. 어쩌면 전작을 봤더라면 감독의 유머 세계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개인적으로는 영화 속 유머들이 내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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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7월5주)
















이번주 가장 기대되는 영화는 아무래도 이 두 편 <업>과 <국가대표>가 아닐런지!

<업>은 애니메이션 사상 최초로 칸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은 애니!
디즈니의 애니는 최소한 기본은 해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대부분 그 이상의 즐거움을 준다는 점에서
<업>은 여러모로 기대를 갖게 하는 애니다.
꼭 보고 싶어졌는데, 아쉽게도 우리 동네에는 더방판만 상영을 한다. -_-;
그래서!! 귀차니즘을 무릅쓰고 자막판 상영하는 먼 동네로 원정가기로 했다. ㅎㅎ

<국가대표>는 올여름 최고 기대작 3편 중의 한 편!
사실 이번주 가장 기대하던 영화여서 개봉날 바로 보러 갔는데,
기대감을 완전히 충족시켜 주지 못한 아쉬움에 <업>보다 조금 밀렸다. ㅎㅎ
그래도 스키점프라는 독특한 스포츠의 소재로 인간 승리를 담아낸 스포츠 드라마이고,
마지막 올림픽 경기 장면이 엉성한 드라마의 아쉬움을 어느 정도 보상해준다.
더운 여름 시원한 눈을 보는 것도 어느 정도 기분 전환이 될 수 있을 듯.
너무 큰 기대만 하지 않고 본다면 웬만큼 즐길 수 있는 영화다.




















올여름 우리 영화 빅3중 하나인 <해운대>는 빠른 호흡으로 300만을 넘겼다.
개봉한지 한주가 지났지만 여전히 다크호스로 머물러 있다.

<차우> 또한 거액을 들인 괴수영화.
조금 엉성하고 웃음이 어색했음에도 식인 멧돼지라는 소재가 개성을 발휘,
관객들에게 어느 정도 어필하고 있는 영화.

두 영화 모두 가볍게 즐기기에 무리없는 영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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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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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기대작으로 꼽히는 김용화 감독의 <국가대표>가 개봉했다. 개봉을 꽤나 기다리고 있었던 터라 개봉하자마자 달려갔다. 사실 전날 시사회로 볼 수도 있었는데 귀차니즘에 그냥 돈을 내고 봤다. 사실 영화 보고 나오면서 조금 후회했다. 시사회로 봤더라면 본전 생각나지 않고 조금 더 가비얍게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서..;

<미녀는 괴로워>로 큰 성공을 거둔 김용화 감독이 3년간의 기획과 7개월 간의 촬영 끝에 완성한 영화 <국가대표>. 스키점프라는 조금은 낯선 종목을 소재로 한 스포츠 드라마다. 얼마전 역도를 소재로 한 영화 <킹콩을 들다>가 개봉해 꽤 좋은 성적을 보였는데, <국가대표>는 어떨지 모르겠다. 관객들이 <킹콩을 들다>만큼 울어주고 감동해 줄런지.

<국가대표>는 앞서 말했듯 '스키점프'라는 독특한 스포츠 종목을 소재로 한다. 종목 자체가 '눈'을 전제로 하고 있고, 동계올림픽을 무대로 하는 만큼 스케일은 훨씬 커졌다. 영화 후반부의 동계 올림픽 경기 장면은 <킹콩을 들다>와는 확연한 스케일의 차이를 보이며 왜 이 영화에 그렇게 많은 돈이 들어갔는지를 두눈으로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경기 장면 만큼은 돈 들인 보람을 느낄 수 있다. 그 공포감과 짜릿함이란! 마치 점프대를 함께 뛰어오른 것 같은 생생함을 영화 곳곳에서 잡아낸다. 멋지다!

그러나 <국가대표>는 후반부의 멋드러진 경기 장면을 보이기까지 예상외의 엉성한 드라마로 일관한다. 엄마를 찾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와 국가대표가 된 입양아라는 설정 외에 다른 선수들의 캐릭터 또한 기존의 스포츠 영화에서 보여주는 틀에서 크게 벗어나질 못한다. 배우들의 연기도 나쁘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눈에 쏙 들어올 만큼 빛을 발하지는 못한다. 다만 고생은 많이 했겠구나,라는 생각은 충분히 든다. 정말 고생 많이 한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국가대표>의 가장 큰 약점은 엉성한 드라마다. <미녀는 괴로워>의 감독의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영화 내내 틀에 박힌 캐릭터들이 예상 가능한 일들을 펼쳐나간다. 뭔가 웃기려고는 하지만 제대로 포인트를 집어내지 못하고 겉도는 웃음은 <차우>를 볼 때의 그 어색함을 다시 느끼게 해줄 정도였다. 물론 주인공 차헌태를 통해 입양아에 대한 문제를 짚어내고, 모자간의 또는 가족간의 사랑을 찾아내는 것은 좋다. 그런데 이야기가 온전히 뭉치지 못하고 겉도는 게 아쉽다.

이 영화를 보면서 다시 한 번 비인기 스포츠 종목의 선수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고된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적설량이 그리 많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눈 위에서 펼치는 종목 선수가 겪어야 하는 온갖 고생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스키점프에 비하니 역도 선수의 설움은 그나마 나아보일 지경이고, 인기 종목인 축구와 야구에 대한 지원이 부족하다는 말은 오히려 배부른 투정으로 들릴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그 종목들 또한 아주 풍족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예전에 우연히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온 <쿨러닝>을 보며 얼마나 많이 웃고 울었는지 모른다. 눈물나게 웃으면서도 마지막에 가슴이 짠해지는 감동을 선사하는 영화였다. <국가대표>를 보기 전까지 아마 많은 관객들이 우리나라의 <쿨러닝>을 기대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웃음이나 감동 모두 기대치를 뛰어넘지는 못한다. 씁쓸하다.

그럼에도 별 4개를 던지는 건,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동계 올림픽의 경기 장면 때문이다. 가장 많은 돈이 들었을, 또한 가장 공을 들였을 그 장면은 그런 노력을 그대로 보여준다. 공포감 최고의 높이에서 출발해 살인적인 속도로 점프대를 내려와 착지하기까지 선수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잡아낸 경기 장면은 단연 이 영화의 백미다. 그리고 내내 실망스러웠던 영화의 마지막을 후끈 ~ 달아오르게 하며 훈훈하게 마무리해주는 역할을 한다.

마지막 장면 때문에 <국가대표>는 그냥 한 번쯤은 즐기며 볼 만한 영화로 마무리 됐다. 좀 더 개성있는 캐릭터들과 탄탄한 드라마로 엮어주었더라면 볼거리와 감동을 함께 전해주는 맛깔스런 영화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영화관을 나서며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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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8-01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