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
고미숙 지음 / 사계절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전 도서관을 갔다가 홍명희의 대하소설 『임꺽정』을 만났다. 새롭게 출간된 개정판이었는데 그 고운 모습에 절로 손길이 갔다. 워낙 유명한 임꺽정이지만 사실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는 터라 궁금한 마음에 살짝 책을 꺼내 들었지만, 10권의 책들이 내뿜는 그 위용에 이내 멈칫했다. 책 읽는 속도가 느린 내게 10권을 넘나드는 대하소설을 시작하는 건 언제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언젠가 읽으리라 다짐하며 다시 책을 내려 놓았다.
그런데 얼마전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열혈 마니아인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웬일로 홍명희의 대하소설 『임꺽정』을 들고 나왔다. 이름하야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마이너리티한 표정을 한껏 내뿜는 일러스트의 책표지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는다. 연이어 열하일기 관련 책들을 출간하며 내내 열하일기하고만 지낼 것 같던 그녀가 갑자기, 뜬금없이 임꺽정이라니. 처음엔 조금 의아했다. 그러나 이런 의문은 책머리의 글들을 읽다보면 금세 풀린다. (참고로 홍명희의 『임꺽정』은 사계절 출판사에서 나왔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을 처음 알게 된 건 작년에 우연히 만났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를 통해서였다. 연암의 열하일기를 청소년용으로 쉬운 말로 풀어 쓰고 읽기 편하도록 내용을 재구성한 책이었는데, 지루할 거란 처음의 예상과 달리 무척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우연히 만난 이책을 통해 열하일기의 숨겨진 재미를 맛볼 수 있었던 것도 좋았지만, 그보다 어렵게만 느껴지던 고전을 이토록 쉽고 유쾌하게 들려주는 작가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반가웠다. 나중에 알고보니 저자는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으로 이미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인기 작가였다.
그런 까닭에 '고미숙'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이책을 선택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도서관에서 살짝 맛보았던 '임꺽정'에 대한 궁금증도 한몫 했음을 부인하진 않겠다.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을 언제 읽을지는 기약할 수 없지만 '임꺽정'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는 게 없고 궁금한 게 많았다. 그래서 이책의 등장은 더없이 반가웠다. 그리고 표지의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라는 글이 무색하지 않게 무척이나 유쾌한 책읽기였다.
책은 크게 경제, 공부, 우정, 사랑과 성, 여성, 사상, 조직이라는 7개의 꼭지로 이루어져 있다. 꺽정이를 비롯해 그와 함께 청석골을 이끌었던 유복이, 봉학이, 돌석이, 천왕동이, 오주, 막봉이 같은 칠두령은 물론이고 청석골 원조 도적패인 오가와 배신의 아이콘 서림이, 꺽정이의 스승이자 모든 사상의 교두보였던 갖바치 등 『임꺽정』에 등장한 주요 인물들을 살펴봄으로써 저자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각각의 테마가 모두 재미있었지만 특히 '공부'와 '여성' 부분이 재미있었다. 꺽정이와 친구들은 모두 노는 남자다. 전문용어로 일명 '백수'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얹혀 살면서도 기죽지 않는다. 항상 자신에게 당당하다. '이태백'이라는 신조어가 생기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떠올릴 때 이들의 모습은 놀랍다. 또한 꺽정이와 친구들은 무식하다. 엘리트 코스는커녕 정규 과정조차 제대로 밟지 못했다. 신분이 하나같이 미천한 까닭도 있었지만 천성적으로 글공부와는 거리가 먼 이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제각각 분야에서는 '달인'이었다. 봉학이는 활의 달인, 유복이는 표창의 달인, 천왕동이는 축지법과 장기의 달인, 돌석이는 돌팔매의 달인, 하다못해 서림이는 속이기의 달인이다. 지금처럼 입시나 취업 같은 특정 목표를 위한 억지 공부가 아니라 단지 재밌고 잘 하고 싶다는 이유로 반복해 달인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노는 것이 배우는 것으로 이어진 삶이다.
『임꺽정』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여성 인물들이었는데, 이들은 우리가 흔히 조선시대 하면 떠오르는 그런 수동적인 여인들이 아니었다. 집안의 권력은 가정 내 거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하던 여성에게 있었고 시집살이 만큼 데릴사위가 흔했기에 고부간의 갈등보다 장모와 사위 간의 갈등이 더욱 빈번하게 등장한다. 여성의 재혼에 대해 범죄시하지 않았고 재산에 대해서도 권리를 가졌으며 성에 대해서도 당당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조선시대의 이미지는 사림에 의해 성리학적 이념이 사회를 지배하던 조선 중기 이후로, 그 이전 시대였던 『임꺽정』의 여성들의 모습은 활기찼고 생기가 넘쳤다. 그와 함께 성리학의 지배로 이후 여성들의 이런 활기가 그대로 묻혔다는 점은 참으로 애석하다.
마지막으로 청석골을 이끄는 칠두령의 모습도 감동적이었다. 싸울 때는 가장 먼저 앞장 서서 싸우고, 도망갈 때는 마지막까지 남아 끝을 지키는 그들의 모습은 이 시대의 지도자들이 진정 배워야 할 모습이 아닐런지.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은 벽초 홍명희의 대하소설 『임꺽정』을 고전평론가 고미숙의 유쾌한 시선으로 낱낱이 파헤친 재미있는 고전 해설책이다. 지난 여름 사계절 출판사로부터 소설 『임꺽정』에 대한 강의를 의뢰받으면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열하일기』를 지나 한창 루쉰에게 빠져있던 작가로 하여금 『임꺽정』에 한눈을 팔게 만들었고, 팔딱거리는 『임꺽정』의 매력에 작가가 본의 아니게 빠져들면서 이책이 태어났다.
조선시대 입말로 씌여졌다는 『임꺽정』처럼 고미숙의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또한 입말체로 씌여져 더욱 쉽게 다가왔다. 『임꺽정』이 궁금하지만 나처럼 그책을 읽을 엄두를 못내고 있다면 우선 이책부터 들어보자. 『임꺽정』에 대한 작가의 유쾌한 입담에 정신없이 빠져들게 될 것이다. 또한 이미 『임꺽정』을 읽어본 독자라면 이책을 통해 자신과 저자의 관점을 비교해 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