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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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도날 (The Razor's Edge) | 서머싯 몸 |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06 


예전에 에드워드 노튼이 출연했던 영화 〈페인티드 베일〉을 본 적이 있다. 한 여자의 일생을 통해 삶과 사랑에 대한 의미를 잔잔하게 풀어내는 이야기가 좋았다. 그 영화의 원작이 『달과 6펜스』로 유명한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이라는 이야기는 듣고는 원작소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읽어보질 못했다. 그러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통해 『면도날(민음사,2009)』을 먼저 만났다. 학창시절 『달과 6펜스』를 읽긴 했지만 논술 대비용이라 서머싯 몸의 작품을 제대로 만나는 건 이책이 처음인 셈이다. 그리고 그 첫만남은 기대 이상으로 즐거웠다. 『면도날』은 『달과 6펜스』, 『인간의 굴레에서』와 함께 서머싯 몸의 3대 장편소설로 꼽히는 작품이란다.

고전문학을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닌 데다가 책도 예상외로 두꺼워서 책을 읽기 전부터 혹시 지루하지는 않을까 싶은 걱정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예상과 달리 흡인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충격적이거나 도발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전개가 빠른 소설도 아니다. 물론 소설 속 인물들이 겪는 사건들을 평범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며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하지도 않는다. 작중 화자의 회고를 통해 전개되는 이야기는 오히려 물 흐르듯 담담하고 차분하다. 적당히 세속적인 면을 띠지만 한편으론 철학적이고 현학적이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한 번 책을 잡으면 웬만해선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500 페이지를 훌쩍 넘기는 두툼한 책의 책장이 쉬지 않고 넘어간다.


『면도날』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평범한 삶을 거부한 채 모험을 떠난 래리와 그녀의 약혼녀 이사벨, 이사벨을 사랑하는 래리의 친구 그레이, 감수성이 예민한 소녀 소피, 이사벨의 외삼촌 엘리엇, 파리 화단의 여자 수잔, 그리고 유명한 작가이자 그들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해주는 화자인 '나'가 있다. 『면도날』은 이들의 만들어내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서로 날실과 씨실처럼 얽히고 설키면서 진행된다.

미국 시골마을의 밝고 쾌활한 소년 래리는 비행에 대한 막연한 기대에 1차 세계대전에 조종사로 참전한다. 그러나 비행의 흥분도 잠시, 전쟁 중 친한 동료가 자신의 눈앞에서 숨을 거두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깊은 충격에 빠진다. 전쟁이 끝나고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래리의 마음 속 혼란은 가라앉질 않는다. 대학으로의 복학도 탐나는 취직 자리도 마다한 채 독서와 사색으로 자신의 세계에 침잠하던 래리는 마침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질문의 답을 찾아 편안하고 안락한 삶이 보장된 미국을 떠나 파리로 향한다. 삶의 근원적인 의문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찾기 위한 래리의 길고 고독한 여행길은 그렇게 시작된다. 

래리를 깊이 사랑하지만 그가 원하는 삶의 방식에 동조할 수 없었던 약혼녀 이사벨은 결국 래리 대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있는 그레이와의 결혼을 택한다. 잘 나가는 증권회사 사장이었던 그레이는 미국의 부흥기와 함께 큰 부를 누리지만 곧이어 덮친 대공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파산하고 만다. 시를 사랑하던 감수성 예민하던 소녀 소피는 불의의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을 견디지 못해 삶을 놓아버리고, 파리의 화가들 사이를 전전하며 밑바닥 인생을 사는 수잔은 그럼에도 삶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사교계에 입성한 후 갖은 노력으로 입지를 다져온 엘리엇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면도날』은 특이하게도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작중 화자로 작가 자신이 등장한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지식을 활용해 표현하자면 1인칭 관찰자 시점인 셈이다. 서머싯 몸이라는 이름의 유명 작가인 '나'는 책의 첫머리에 『달과 6펜스』 같은 실제 자신의 작품을 거론하며, 이책의 이야기는 소설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알고 지낸 한 청년이 선택한 독특한 방식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꾸밈없이 가능한 그대로 옮긴 글이라고 말한다. 그와 함께 생존자들의 보호를 위해 이름은 익명으로 바꿨다고 덧붙인다.

이쯤되면 독자들은 작중 화자인 '나'가 실제 작가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작가가 만들어낸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인지, 또 이책의 이야기가 소설인지 아니면 정말 누군가의 삶을 기록한 에세이인지 슬슬 헛갈리기 시작한다. '나'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혹은 그 모든 것이 그의 상상에서 나온 허구일지라도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너무나 태연한 태도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나', 즉 소설 속 작가 서머싯 몸 덕분에 책을 읽는 내내 등장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이 진짜처럼 생생하게 다가와 책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면도날』의 가장 중심축을 이루는 건 래리의 삶이다. 래리는 안락하고 편안한 자신의 미래를 과감히 내던지고 스스로 고행길을 자처한다. 보통의 사람들, 그러니깐 이사벨이나 그레이 같은 이들은 상상도 못할 뿐만 아니라 납득할 수 없는 삶의 행로를 래리는 무심히 걸어나간다. 삶과 죽음, 선과 악 같은 정답이 없는 삶의 본질적인 의문에 자신만의 답을 찾기 위해 미국을 떠난 그는 프랑스의 탄광, 독일의 농장, 수도원,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거쳐 인도에 이르는 길고도 다양한 여행을 통해 마침내 자신만의 답을 만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한 자기완성을 위해 세상이 말하는 것과는 다른 삶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다.

래리의 삶 못지 않게 작가는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그의 주변인들의 인생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이사벨, 그레이, 엘리엇, 소피, 그리고 수잔이라는 전형적인 인물과 개성적인 인물을 적절히 배합해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이끌어낸다. 가장 현실적인 인물인 이사벨과 그레이는 돈과 일을 통해 자신들의 행복을 완성하고, 상류사회의 사교계에 삶의 전부를 걸었던 엘리엇은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초대장을 손에 쥔 채 눈을 감는다. 세상이 던진 시련에 무너진 소피와 그것을 꿋꿋하게 이겨낸 수잔은 각각의 길을 찾는다. 


작가는 래리의 선택이 숭고하다고 치켜세우거나 이사벨이 속물적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다양한 사람들의 선택한 다채로운 삶을 행로를 그저 보여줄 뿐이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에 대한 판단은 고스란히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그와 함께 등장 인물들이 만들어가는 저마다의 삶에 애정을 표함으로써 누구의 삶이든 그만의 가치가 있는 것이라 말한다. 이책의 이야기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결국은 성공담이 되었다는 작가의 마지막 말처럼 이책의 인물들은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 그게 성공이든, 자유든, 혹은 죽음이든 그들은 최선의 방법을 택했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행복을 얻었다. 

책을 읽기 전부터 궁금하던 제목의 의미는 책속에서도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단지 책의 맨 앞에 실려있는 '면도날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그러므로 현자가 이르노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어려우니라.'라는 키타 우파니샤드의 인용문에서 그 의미를 추론해 볼 뿐이다.


『면도날』은 구원이라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전혀 무겁지 않은 유쾌한 소설이었다. 어렵지 않고 간결한 문체와 탄탄하고 흡입력 있는 스토리, 사랑스러운 캐릭터와 중간중간 빛을 발하는 냉소적이지만 유쾌한 그의 유머 등은 서머싯 몸에 대한 호기심을 호감으로 바꿔놓았다. 코드가 맞는 작가를 만난다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덕분에 그의 다른 작품들은 무척 궁금해지기 시작했는데, 우선 전부터 읽어보고 싶었던 『인생의 베일』과 줄거리마저 희미해져 버린 『달과 6펜스』를 먼저 찜해 놓아야겠다. 기회가 닿는다면 놓치지 말고 만나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나처럼 고전 문학을 좋아하지 않은 독자도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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