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모토 세이초의 미스터리 단편집 <잠복>입니다. 총 여섯 권으로 기획 중인 '마쓰모토 세이초 단편 미스터리 걸작선'의 첫 번째 책이죠. 출세작인 <점과 선(1958년)>이 나오기 직전, 1955-1957년 사이에 발표한 단편들 중에서 선별했습니다. 초기작이지만 이후 작품들과 작풍 차이가 크지 않습니다. 잠언 같은 명 문구들의 빈도는 적지만 겉치레 없는 문장의 강렬함은 이미 갖추어져 있습니다. 부조리한 사회 구조가 인간을 궁지로 몰아넣는 주제의식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잠복>은 마쓰모토 세이초의 원류를 찾아가기 위해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초기 단편집은 일종의 요식 행위, 즉 작가의 팬들을 위해 마련된 시시한 습작 성지 순례가 아닙니다. 세이초는 그 주제의식과 문장의 스타일 모두를 이미 이루어 놓고 시작했으니까요. 그가 단편 '잠복'을 쓸 때 '내가 읽고 싶은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했다지만, 그 결심은 이미 자신을 어떤 궤도에 올려 놓은 뒤에 비로소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 이 단편집에서 누구나 한때는 습작 시절이 있었다거나 하는 저급한 위안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역작'은 글을 쓰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쓰디쓴 교훈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 결심 이외에 또 무엇이 필요했는지를 <잠복>이 확인시켜 줍니다. 재능에의 찬탄이 아니라 감히 따라할 엄두가 나지 않는 노동량에의 감탄입니다.

 

살벌할 정도로 깎여나간 짧은 문장들은 천재적인 면모 대신에 비극적인 노동의 땀냄새를 풍깁니다. '소거하는 노동'으로 만들어진 과묵한 문장들이 그의 주제의식과 얼마나 잘 맞아떨어지는지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세이초의 소설 속에서는 대적할 수 없는 '이 세계 자체'에 부딪혀 익사하는 사람들 투성이입니다. 몸부림치지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몸부림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무용無用하지만 절박합니다. 세이초의 문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심하지만 절박합니다. 화려하거나 큰 소리를 낼 수가 없습니다. 질식하는 사람이 비명을 지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죽어간다'는 20세기 인간의 메시지는 이 높이와 이 크기로 이야기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주제와 방법이 맞물려 있습니다. 세이초는 알고 있었고 그렇게 행했습니다. 그러니 마쓰모토 세이초의 <잠복>에서 우리가 뭔가를 배워야 한다면, 그 메시지는 바로 "나는 도대체 무엇이 하고(쓰고,그리고,찍고,만들고,노래하고) 싶은 걸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이 좋은 '데뷔작'의 요건이 아닐까요?

 

 

 

 

 

 

 

 

마침 <잠복>은 알라딘 북펀드 참여자들의 목록이 처음으로 내지에 실린 첫 책이기도 합니다.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셈이죠. 알라딘 북펀드가 좋은 책을 잉태하는 데 실제로 일정 역할을 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잠복>이 북펀드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는 사실이 개인적으로는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북펀드가 좋은 데뷔작으로 데뷔한다, 고 하니 좀 우스운 조합 같습니다만 꽤나 상서로운 듯도 합니다(하하).

 

북펀드와 마쓰모토 세이초, 모두의 '시작'에 행운을 빕니다.

 

 

 

 

 

 

 

 

북펀드 참여 리스트를 기입한 도서가 처음 발간된 기념으로 참여하신 분들의 닉네임을 열거해 봅니다.

일종의 명예의 전당입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무명객, gauri_5c, BRINY, diletant, azzi42000, smchoi1211, 베쯔, tting, 로빈, 마그, albam, 뿡뿡, hrmhs, hkjuju, hoonii, oculus, 특급변소, jspecial, 서란, 미완성, summit, 바람향, galapagos5, 나노하, 이매지, 보리, 또라, takeda, 책사는사람, 세기말, 무채색, 쿠자누스, 꽈당, 루나, 고철, 셜록윤, eimo, ~*, 발없는새, 무조건무료배송, 마팔다, 지니, 히카루, 집오리, dencihinji, yel99, asd7007, 하루, 양언니# , 시간여행, 손님, sabrina, 재는재로, 몽쁘띠, 물음표, floweroftime, 러브캣, 옹달우물, 쁘띠아망, KOEMMA, jinnyjinny, hakobiya, hyunchansi, 물의 여행자, 손님, 푸른바람, Secondhand, 토실여왕, 매그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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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그늘 2012-06-22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래 만난 가장 아름다운 리뷰!

외국소설/예술MD 2012-06-22 13:07   좋아요 0 | URL
근래 만난 유일한 댓글! 하하

바이킹 2012-06-22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북펀드에 투자했는데 이렇게 이름 실린 것 보니까 저까지 설레네요 ;ㅁ;ㅋ

외국소설/예술MD 2012-06-25 15:55   좋아요 0 | URL
네, 책에 직접 이름이 실리는 건 특이한 경험이죠. 즐거운 기억으로 남게 될 겁니다. ^^

히버드 2012-06-25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른 북펀드에 투자했지만 윗분 말씀처럼 이름이 실린 것을 보니 괜히 마음이 행복해집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12-06-26 13:06   좋아요 0 | URL
네, 이 시스템이 좀더 안정적으로, 출판사에도 더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잘 진행되었으면 좋겠습니다.잘 돼야 할텐데 말이죠. ㅎㅎ

꼬마별 2012-06-27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신기하네요
서평의 일부분이 책 뒤나 앞에 쓰여지는 건 봤어도 이런 것은 좋은 책을 만들어내는데 독자도 한 몫 했다는
좋은 취지가 된것 같아요
저도 해보고 싶네요

외국소설/예술MD 2012-07-11 01:48   좋아요 0 | URL
북펀드에 많은 참여 부탁 드립니다. 좋은 취지의 프로모션이에요. ㅎㅎ

재는재로 2012-06-29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기하네요 제이름이 실린다니 이런경험은 언제 또 해보겠어요 즐거운 추억이 될것 같네요

외국소설/예술MD 2012-07-11 01:49   좋아요 0 | URL
아 여기에 참여하셨나요? 독서생활의 좋은 기념품이 될 겁니다. ^^

skysoo17 2015-03-10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 아름다워요^^*

비로그인 2015-03-10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