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지 약 500매 분량이 추가되었다고 해서 화제인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입니다.

출판사에도 번역 관련 문의가 여러 차례 왔다고 하네요. 어떻게 바뀌었길래 그렇게 많은 분량이 추가가 되었느냐는 거죠.

 

해서, 여러분들의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해드리기 위해 출판사에서 원고 일부를 미리 받아 공개합니다.

 

비교 대상이 될 기존 번역 부분은 출판사와의 논의 끝에 여기에는 게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재번역 여부를 가장 궁금해하실, 기존 번역본을 소장 중인 분들께서 우선 판단을 내려보심이 어떨까 합니다.

 

공개되는 부분은 총 세 파트이며, 혹시 모를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스토리 진행 상 매우 중요한 부분은 다루지 않았습니다.

 

다소나마 궁금증이 풀리셨길 바랍니다. ^^

 

 

 

 

 

 

 

1.
(문학동네판 64~66쪽)

“최근 여기에 세키네 쇼코라는 사람이 찾아온 적이 있습니까?”
청년이 눈동자를 굴리며 기억을 더듬는 표정을 지었다.
“세키네 씨요?”
“네. 이름 한자는 1장, 2장 할 때의 장章에다, 그 뭐냐, 삼수변을 거꾸로 한 것 같은 부수가 붙은 겁니다만.”
“아하, 후지와라 쇼시의 쇼彰 말이죠?”
어느새 통화가 끝났는지 여자 사무원이 말했다.
“후지와라 미치나가의 딸이자 이치조 천황의 왕비였던 쇼시.”
“더 모르겠는데요.” 청년이 혼마에게 미소를 지었다. 혼마가 허공에 글씨를 써보였다.
“맞아요, 그거예요.” 여자 사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쇼시라는 사람은 무라사키 시키부(*겐지 이야기의 작가-옮긴이 주)가 모셨던 왕비였던가요?”
혼마가 묻자 그녀는 미소를 머금었다.
“네, 맞아요.”
청년은 점점 더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머리를 긁적이더니 하던 일을 계속하려는지 커다란 서류첩을 펼쳤다.
혼마도 고전에는 매우 약했지만, 예전에 지즈코가 문화센터에서 ‘겐지 이야기 읽기’라는 강좌를 들은 적이 있어서 한동안 툭하면 그 얘기를 듣곤 했다.
“경쟁자인 데이시라는 왕비 곁에서는 세이 쇼나곤(*헤이안 시대의 여성 작가-옮긴이 주)이 시중을 들었죠? 당시 조정에 시대를 대표하는 두 재녀才女가 있었잖습니까.”
“그랬죠. 나중에 데이시의 생가인 나카노칸파쿠 가문이 허망하게 몰락해버려서 두 재녀의 처지는 완전히 달라졌지만.”
스스로도 별걸 다 기억한다 싶어 놀랐다. 지즈코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는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며 건성으로 대답하기만 했는데.
그 기억을 떠올리자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정신을 차리고 본론으로 돌아갔다.
“사진이 있습니다.”
주머니에서 세키네 쇼코의 이력서를 꺼내 사진만 보이도록 접어서 내밀었다. 다시 흥미가 생겼는지 청년이 일어서서 책상을 돌아 나왔다.
“……낯선 얼굴인데요. 최근에 왔던 사람들은 대체로 기억하는데.”
“저도 보여주세요.” 여자 사무원이 말했다. 청년이 혼마에게 이력서를 받아들더니 접은 상태 그대로 들고 가서 보여주었다.
“딱 봐선 모르겠네요. 우리 의뢰인이었던 분인가요?”
“오 년 전쯤에 미조구치 선생님에게 개인파산 수속을 의뢰했습니다.”
“오 년 전이면 제가 없었을 때군요.”
청년이 그렇게 말하며 이력서를 돌려주었다. 이번에야말로 자기가 더이상 쓸모없겠다는 표정으로 의자로 돌아갔다. 여자 사무원이 책상에 양 팔꿈치를 짚고 생각에 잠겼다.
“우리 사무실에 들어오는 의뢰의 90퍼센트 정도가 그런 일이라 내용으로는 판단할 수 없지만…… 이름은 기억이 나는 것도 같은데.”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장소이니 이렇다 할 반응이 없는 것도 당연하다. 혼마는 이력서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쇼코, 쇼코라…… 흐음, 분명히 들어본 것 같은데……”
“보나마나 그때도 이치조 천황이 어쩌니저쩌니 했겠죠?”
청년이 놀리자 여자 사무원이 웃었다.
“그랬겠지. 드문 이름이잖아. 보통은 그냥 평범하게 아키코라고 읽지 않겠어?”
심각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덧니 있던 그 사람인가?”
이렇게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건 쇼코가 최근에 이곳을 찾아오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변호사에게 의지하지는 않았다는 건가.
그때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혼마 씨인가요? 이거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순간적으로 엉거주춤 일어서며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자, 정확히 눈높이가 일치하며 시선이 마주쳤다. 노인이 서 있었다.

 

 

2.
(문학동네판 82~85쪽)

그리고 지금, 혼마는 가즈야와 함께 그의 약혼녀가 살던 집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 집의 공기는 혼마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냉랭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짧은 복도 왼쪽이 화장실과 욕실. 오른쪽이 조그만 부엌이었다. 벽 쪽에 냉장고와 그릇장과 전자레인지 받침대가 있고, 간신히 한 사람이 움직일 수 있을 만한 공간이 있었다.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스테인리스 싱크대는 얼룩 한 점 없이 반들반들하게 닦여 있고 만져보니 손가락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개수대 안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맥주 캔이 보였지만, 그것은 분명 가즈야가 지난번에 다녀갔을 때 던져놓은 것일 테다. 그 외에는 음식물 쓰레기 냄새도 나지 않고 전체적으로 매우 청결한 느낌이었다.
바깥바람 때문인지 환풍기 날개가 천천히 두 바퀴 돌고 멈췄다. 날개가 반짝거렸다. 혼마는 부엌에서 나왔다.
거실 역시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넓이는 다다미 여덟 장쯤 될까. 가로로 긴 직사각형 공간이고, 오른쪽 안쪽에 침대가 놓여 있다. 베개 위까지 커버를 끌어올려서 정돈해놓았다. 침대 헤드보드 부분은 작은 선반처럼 되어 있는데 거기에 둥근 갓을 씌운 스탠드와 문고본 두 권이 놓여 있었다. 『북미 나 홀로 여행』과 『최신 유럽 쇼핑 정보』. 두 권 다 기행물이지만 내용은 대조적인 듯했다. 표지가 휘어질 정도로 열심히 읽은 티가 나는 책은 『북미 나 홀로 여행』이었다.
침대 바로 옆에 원기둥 모양의 쓰레기통이 창 쪽으로 놓여 있었다. 이것도 안이 깨끗하게 비었다.
방에 본래 설치된 붙박이장 외에는 조금 큰 의류용 서랍장 하나와 조립식 책꽂이. 바퀴 달린 작은 서랍장 하나. 그리고 그 위에 무선 전화기가 올려져 있었다. 바닥에는 카펫이(감촉으로 보아 소재는 면 혼방이다) 깔려 있고, 둥근 원목 탁자와 그와 쌍을 이루는 의자 두 개도 보였다. 탁자 밑에는 옥수수 껍질로 짠 커다란 바구니가 있고, 그 안에 뜨다 만 스웨터와 뜨개바늘이 꽂힌 털실 뭉치 몇 개가 들어 있었다. 혼마가 그것을 손에 들자 가즈야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주려고 뜬다고 했어요. 다음 달에 스키장에 갈 예정이었거든요.”
“스키를 갖고 있었나?”
가즈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베란다 다용도실에 있습니다.”
창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가보니, 원래는 물건을 놔두면 안 되는 옆집과의 경계면에 통신판매 카탈로그 등에서 흔히 보이는 로커형 수납장이 놓여 있었다. 열어보니 새 스키와 스키 부츠가 든 커다란 케이스가 있었다. 양쪽 다 먼지막이 비닐 커버를 씌우고 셀로판테이프로 붙여놓았다.
“스키를 언제부터 탔지?”
어깨 너머로 묻자 가즈야가 곧바로 대답했다.
“재작년부터예요. 저랑 사귀고 나서 탔으니까. 저는 학생 때부터 탔지만.”
“그녀가 스키 도구를 갖춘 시기는?”
“그것도 재작년이죠. 처음에는 스키복만 샀고, 작년 여름과 겨울 보너스로 스키와 부츠도 마저 구입했어요. 같이 사러 가서 분명히 기억해요.”
그러고 나서 무척이나 중요한 얘기를 하는 표정으로 나지막이 덧붙였다.
“쇼코는 늘 현금으로 물건을 샀어요. 가게에서 할부를 권해도.”
혼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개인파산한 사람은 네가 알고 있는 ‘세키네 쇼코’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스키에는 ‘로시뇰’, 부츠에는 ‘살로몬’이라는 상표명이 보였다.
“이건 스키 용품 중에서 비싼 편인가?”
가즈야가 부츠 케이스를 살짝 만지며 말했다.
“그렇게 고급은 아니에요. 특히 조금 지난 모델들은 저렴한 편이고요. 새 모델도 한꺼번에 다 갖추긴 힘들지 몰라도 하나씩 사면 별로 부담되지 않죠. 초보자에게는 적당한 브랜드일 겁니다. 스키복은 ‘크레송’이었던가?”
그녀는 분에 넘치는 사치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부츠 케이스를 치워보니 뚜껑에 ‘가정용 공구세트’라고 적힌 상자가 한쪽 구석에 세워져 있고, 그 옆에 걸레로 꽁꽁 싸매둔 작은 병 하나가 있는 게 보였다. 손에 들기만 해도 코끝을 찌르는 자극적인 냄새가 났다.
“뭘까요?”
가즈야가 들여다보며 물었다.
“가솔린이야.” 혼마는 대답하고서 병을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고작 오 분 정도 밖에 있었을 뿐인데 벌써부터 손끝이 곱았다. 베란다는 이웃한 맨션의 벽 쪽으로 나 있고, 사생활 보호 차원인지 칸막이 위에 가리개용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채광이 몹시 나쁠  것 같았다.
“빨래는 어떻게 했을까?”
베란다에는 조그만 건조대 하나 보이지 않았다.
“빨래방을 이용했어요.” 가즈야가 대답했다. “이 집에는 세탁기를 둘 공간이 없습니다. 빨래를 말릴 만한 곳도 없고, 게다가 1층이라 속옷을 널기 꺼려진다고 했어요.”
실내로 들어온 혼마는 의자를 꺼내 앉았다.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구도 커튼도 별다른 고급 제품이 아니다. 다만 서랍장만은 푸조나무로 만든 듯한, 값이 꽤 나가는 물건 같았다. 오래 쓸 물건이니 좋은 걸로 마련하고 싶어 큰맘 먹고 산 건지도 모른다.
“여기 월세가 얼마쯤 하는지 아나?”
몸통 부분이 완성된 스웨터를 펼쳐놓고 바라보던 가즈야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혼마가 다시 똑같은 질문을 했다.
“아, 네…… 육만 엔이 좀 넘는다고 했습니다.”
“싸군.”
좁고 햇볕도 잘 안 들고 경비실도 없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도쿄 도내인데다 아직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건물이다.
“땅주인이 상속세 대책으로 지은 건물인가 봅니다. 이익이 너무 나도 곤란하겠죠. 쇼코는 이런 집을 찾아내는 게 특기라면서 은근히 자랑한 적이 있어요.”
그렇게 말하고 가즈야는 의아해하는 눈길을 던졌다.
“그런 건 왜 물어보시죠?”
혼마는 서랍장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조금 전에는 몰랐는데 살짝 비껴 서서 보니 정면 손잡이 옆에 덧칠한 흔적 같은 큰 얼룩이 보였다. 아마도 저것 때문에 가격이 깎였을 것이다.
이 집의 주인은 매우 합리적인 쇼핑을 할 줄 아는 여자였던 모양이다.

 

 

3.
(문학동네판 195~200쪽)

구리사카 가즈야가 이 이야기를 하러 집으로 찾아온 것이 월요일이다. 오늘은 금요일이니 이제 고작 나흘째다. 그런 단기간에 부상당한 무릎이 극적으로 회복될 리 없으니, 이것은 어디까지나 기력의 문제다 싶었다.
재활치료는 일주일에 두 번으로 정해져 있다. 원칙상으로는 월요일과 금요일이니 오늘은 무단으로 빠지는 셈이지만, 다리 상태를 고려하면 그다지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어딘가 미덥지 않은 프로그램에 따라 물리치료사에게 시달리는 것보다는 이렇게 돌아다니는 쪽이 훨씬 회복이 빠를지도 모른다고 열심히 자기정당화를 하는 스스로에게 쓴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또 전화해서 뭐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재활이라지만 병원에서 하는 건 아니다. 경찰병원에서 퇴원한 후 기능회복 트레이닝을 받는 게 어떻겠냐며 지인이 추천해준 스포츠클럽에 다니고 있는 것이다. 사립병원 몇 군데와 제휴를 맺어서 의사와 직접 연락을 취하며 체계적인 트레이닝을 해준다고 했다.
공립 사립을 막론하고, 도쿄 도내나 근교 의료기관은 하나같이 인력 부족과 자금 부족, 그리고 설비 부족으로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고민의 마지막 원인은 당연히 가파른 땅값 상승이다. 부지를 넓혀 건물을 증축하고 새로운 설비를 도입하려면 억 단위의 돈이 날아간다.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맨 먼저 포기해야 하는 재활시설 등은 외부 기관에 위탁하거나 제휴하는 추세인 모양이다.
혼마의 담당자는 올해 서른다섯 살이 된 오사카 출신의 여자 트레이너였다. 전국 규모 지점망을 가진 외식산업에 종사하던 남자와 삼 년 전 결혼했고, 남편의 전근 때문에 도쿄로 왔다. 인상도 좋고 소탈했지만 혼마가 굵은 땀방울을 뚝뚝 흘리며 낑낑거리고 있자면 카운터에 한쪽 손을 짚고 매정한 표정으로, “참말로 못 쓰겄네. 도쿄 남자는 이리 근성이 없다니까” 하는 밉살스러운 말을 툭툭 던지곤 했다.
뭐든 꿀꺽 삼켜서 곧바로 동화시켜버리는 도쿄라는 도시에 들어와도, 간사이 사람만은 신기하게 타고난 제 빛깔을 잃지 않는다. 간사이 사투리에도 강인한 생명력이 있다. 말끝이 이른바 ‘표준어’로 바뀌어도 억양만은 절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금세 간사이 출신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혼마는 그런 면에 일말의 동경을 품기도 했다. 자기는 도쿄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완전한 도쿄 사람이 아니고, 그렇다고 출신의 근거로 삼을 만큼 강렬한 ‘고향’의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도호쿠의 외딴 시골 마을에서 가난한 농가의 셋째아들로 태어난 혼마의 아버지는 스무 살 때 일자리와 먹을거리를 찾아 종전 직후의 도쿄로 나와서 경찰관이 되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도쿄로 나오고 싶어서 경찰관이 된 것이다. 당시 도쿄는 혹독한 식량 사정 때문에 지방에서 이주 오는 것을 제한했지만, 경찰관이 되겠다고 하면 무조건 옮겨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렇다 할 확고한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사회 정의를 위해 열의를 다해 일한 것도 아니다. 먹고사는 일, 하루하루의 생활을 위해 경찰관이 되었다.
그럴 수도 있었겠다고 혼마는 생각했다. 그 당시 일본인은 그때까지 굳게 믿어왔던 대의를 잃고, 끈 떨어진 목각인형처럼 그저 망연히 주위를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추가로 나온 음식 접시를 받아드는 것 같은 가벼운 마음으로 선뜻 새로운 대의를 찾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일을 시작했을 당시의 심경을 그대로 연장시킨 듯 지극히 담담하게 경찰관 인생을 보냈다. 마치 그런 아버지에게 감화된 양 혼마 역시 경찰관이 된 것을 어머니는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이런 것도 핏줄 때문인가?” 살짝 불길한 것이라도 대하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자기가 고생하고 살아서 그런지, 며느리인 지즈코에게는 처음부터 이상하리만큼 동정적이었다.
“헤어지고 싶으면 망설일 것 없다. 사토루 키우면서 살아갈 정도의 위자료는 내가 대신 슌스케한테 받아서 줄 테니까”라고 당당하게 공언했고, 혼마는 그런 행동에 적잖이 분개했었다. 지즈코는 그럴 때마다 대개 그냥 웃어넘겼지만.
그런 부모님도, 지즈코도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세 사람은 모두 북쪽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고향이 같았고, 지즈코는 니가타의 폭설 지역 출신이었다. 그래서 혼마는 부모님 댁을 방문해서 잡담을 나누다가도 문득문득 자기 혼자 겉도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이중에서 ‘고향’의 기억이 없는…… 뿌리가 없는 사람은 나뿐이구나, 하고.
지즈코는 “당신은 도쿄 사람이잖아”라고 했지만 혼마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스스로를 도쿄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가정을 꾸린 지리상의 도쿄와, ‘도쿄 사람’ ‘도쿄 토박이’라는 말에 붙는 ‘도쿄’ 사이에는, 너무도 명백해서 정의할 필요조차 없는 차이가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 차이는 예를 들면 ‘삼대가 잇달아 살지 않고서는 에도(*도쿄의 옛 이름-옮긴이 주) 토박이라 할 수 없다’는 식의 천박한 구분법에서 비롯한 것은 아닐 게 분명했다.
그 사람이 ‘도쿄와 피가 이어져 있다’고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 전적으로 그 한 가지에 달린 일이다. 그리고 그때의 ‘도쿄’는 ‘고향으로서의 도쿄’ ‘인간을 낳아 키울 수 있었던 도쿄’다.
그러나 현재의 도쿄는 더이상 인간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수 있는 토지가 아니다. 땅의 기운이 사라지고, 비도 내리지 않고, 경작할 괭이도 없는 척박한 황무지다.
이곳에 존재하는 것은 대도시로서의 기능뿐이다.
그것은 자동차와 매우 흡사하다. 제아무리 고급 사양에 성능이 뛰어나다 해도 사람이 그 안에서만 살아갈 수는 없다. 자동차는 타고 다니며 편리하게 사용하고, 이따금 정비를 맡기고 세차를 해주고, 수명이 다 되거나 질리면 새것으로 바꾸면 그만이다. 그것뿐이다.
도쿄도 그와 마찬가지다. 어쩌다보니 이 도쿄라는 차에 필적할 만한 성능을 지닌 다른 차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있더라도 개성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사용하게 된 것뿐이지, 본래는 언제든 갈아끼울 수 있는 부품 같은 것이다.
인간은 새것을 사서 대체할 수 있는 대상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새로 바꿀 수 있는 것을 고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도쿄에 있는 인간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뿌리 없는 풀이며, 대부분은 부모, 혹은 그 부모의 부모가 가지고 있던 뿌리의 기억에 매달려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뿌리의 대부분은 이미 힘을 잃었고, 이들을 부르는 고향의 소리도 이미 쉬어버린 지 오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부초 같은 인간이 늘어만 간다. 혼마는 자기도 그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업무상 이 대도시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의 얘기를 듣다가 상대의 말 속에서, 어미에서, 억양에서, 어휘 선택에서 그 사람의 ‘고향’을 또렷하게 추측하게 만드는 부분이 느껴질 때면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곤 했다. 무리지어 놀다 어느새 해가 지고, 친구들은 하나둘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자기를 불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정신을 차려보니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어린애 같은 심정이었다.
저녁 여덟시 삼십분. ‘라하이나’의 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 맞아준 스무 살가량의 아가씨는 말투에서 어렴풋하게 하카타 억양이 느껴졌다. 그렇다, 규슈도 흡인력이 강한 토지다.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여기서 일할 때 세키네 쇼코는 고향 우쓰노미야 이야기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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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트리스 2012-02-07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지고 있던 시아출판사 판과 비교하며 봤는데, 이런 식으로 분량이 늘어난 거라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시아출판사 버전을 이미 읽은 사람이라면 굳이 개정판을 읽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건 진행과는 무관한 부분에서 분량이 늘어나 있어 속도감은 오히려 떨어지는 듯 합니다. 물론 또 사서 읽고 싶다면 말리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개인적인 느낌일 뿐입니다. 미미여사의 작품이라면 국내 출간작 거의 모두를 읽었고, 일본소설도 좋아하는 편이지만 개정판에서 늘어난 부분들은 적어도 개인적인 흥미를 유발시키거나 '새로운 감동/재미'를 줄만한 것은 아닌듯 싶군요. 다만 늘어난 부분들이 '원서'에도 언급되어 있는 내용들인지는 궁금합니다.

비로그인 2012-02-08 11:2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문학동네 마케팅팀입니다^^

당연히 원서에 있는 내용들을 모두 번역한 것입니다.
그래서 '완역본'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원서에 없는 문장이나 내용을 창작하지도 않았고 첨가하지도 않았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원문에 가장 가깝게 충실히 옮겼습니다.

소설을 번역하면서, 번역가가 보기에 스토리 진행상 별 지장이 없다고 판단되는
상황 묘사나 인물 및 심리 묘사는 번역가가 알아서 모두 생략하고
번역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구판인 시아출판사 판본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작가인 '미야베 미유키가 쓴 소설 그대로'를 온전히 맛보기 원하시는 분이라면
'완역본'을 찾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미미 여사가 괜히 분량을 늘리려고 "사건 진행과는 무관한 부분"을 썼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구판에서 누락된 부분을 모두 되살리면 작품의 밀도나 깊이가 확연히 다릅니다.
재미와 감동의 깊이가 다릅니다.
미미 여사의 깨알 같은 캐릭터 묘사법을 떠올리신다면 상상이 가실 듯합니다.


문학동네의 책소개를 발췌해서 남겨놓겠습니다^^

"기존 번역본에서 빠지거나 축약되었던 부분을 최대한 원문에 가깝게 되살려낸 결과 원고지 500매 정도의 분량이 추가된 완역본으로, 미야베 미유키 특유의 인간적이고 세심한 필치, 치밀한 구성력을 한층 생생하게 맛볼 수 있다."

감사합니다.

리아트리스 2012-02-07 22:38   좋아요 0 | URL
처음 원고지 500매 분량이 추가되었다는 홍보 문구를 봤을 때 깜짝 놀랐죠. '화차'는 제가 읽은 미미여사 작품 빅3에 들 정도로 애정이 가는 작품이었는데, 이전 작품에 없었던 500매 분량이 추가되어 '완역'이 나왔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죠. 그 대단한 '화차'가 500매가 빠진 것이었다니!!
저는 시아출판사 판에서 크게 누락된 어떤 '새로운 내용'이 이번 개정판에서 되살아나는줄 알았습니다. 때문에 출판사에 문의도 했구요. 공개된 부분만으로 속단하기엔 성급한 감도 있겠지만 출판사측 답변과 위의 개정판 일부를 본 느낌을 종합해보니 역시 '새로운 내용'의 추가는 없고, 다만 원문을 보다 더 정확히, 더 상세하게 풀어서 번역했을 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늘어난 500매 분량이 개인적인 기대치와 어긋난데에서 오는 실망감은 어쩔 수 없더군요.
아무튼 '화차'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니 개정판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길 바랍니다.

비로그인 2012-02-08 10:51   좋아요 0 | URL
독자분들의 문의가 많아 알라딘 MD님의 블로그에 일부 내용을 발췌해서 소개했습니다.

(스포일러 우려로 스토리 진행상 중요한 부분은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미미 여사의 소설 원문에 가장 충실하게 번역했습니다.
미야베 미유키 작가님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셨다고 하시니,
'인물', '사건' 등 원고지 500매 분량이 그것들과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제 곧 출간될 <화차>, 많이 아껴주세요(__)

감사합니다!

whywhowhy 2012-02-07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2는 부가적인 부분이니 그렇다치고, 3 같은 경우는 시아판에선 아예 숭덩 빠져 있군요.
윗분 말처럼 줄거리 진행에 꼭 필요한 부분은 아니지만(그래서 저를 비롯한 많은 독자들도 지금껏 시아판을 읽으면서 별로 이상한 점을 못 느꼈던 거겠죠) 원래는 없던 주인공 혼마의 개인적인 회상이나 과거 이야기가 나오니 캐릭터 이해에는 확실히 깊이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부분이 더 있는지도 궁금하고요.
또 하나, 시아판에는 '구리자카' 가즈야였는데 여기선 '구리사카'로 바로잡혀 있네요. 시아판 읽으면서 좀 거슬렸던 부분이라 고쳐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내용 진행과는 상관없는 부분이지만요 ㅎㅎ

루이 2012-02-08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어 번역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흥미롭게 살펴보았습니다. 구판 번역은 좋게 말하자면 군더더기(?)를 걷어내 속도감을 살린 것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별 이유 없이 군데군데 가위질을 해서 독자의 읽을 권리를 침해한 셈이 되겠네요. 역자 판단으로 가독성을 위해 원문의 문장을 함축적으로 바꿀 수는 있겠지만 이렇게 문단별로 통째로 들어내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의도가 어땠든 불성실한 번역이라는 인상을 주게 되니까요.
갠적으로 미미 여사의 소설은 이런 사소한 부분들이 모여 하나의 큰 그림을 그려내는 데 진가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물론 전체 스토리 전개와 메시지성도 중요하지만) 문학동네 쪽 번역에 손을 들어주고 싶네요.

VANITAS 2012-02-11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역서는 완역을 기본으로 해야 맞는거죠..출판사로서는 당연히 마케팅에 활용하는게 맞는거고요. 하지만 완역본이라도 번역의 질이 떨어진다면 칼질당한 번역이랑 다를 바 없겠죠.

tsjif 2012-02-14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아출판사 정말 괘씸하네;;아니 그럼 평역이라고 명시하던가 책 앞 부분에 명시를 하던가. 판권 계약할때 축약한다는 말이 들어가긴 했을지..이거 국내에 발매되는 해외소설들중 이런 책들이 많을까봐 겁나네요.

초콜리토 2012-02-2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화가납니다. 전 그게 그냥 다 완역본인줄 알았어요. 책을 또 사서 읽어봐야하나요? -_-;;; 읽는 것은 좋지만, 왠지모르게 거짓덩어리의 책을 갖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순식간에 들었어요.(물론 이건 좀 과장된 표현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