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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평점 :
돌아보면 희미하게 반짝이는 몇 개의 추억으로 기억되는 게 인생이다. 가물거리는 몇 개의 추억들, 몇 개의 단상들을 이어가며 생의 모습을 드문드문 그려갈 수 있다. 기억할 수 있는 장면들로만 자신의 삶을, 그리고 자신의 삶에 투영된 타인의 삶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기억과 망각은 내 의지와 상관없을 때가 많다. 기억하고 싶은 것은 기억나지 않고, 기억하고 싶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은 의식 어딘가에 또렷이 남아 두고두고 반추되곤 한다. 무엇이 기억되고, 무엇이 기억되지 않을지. 우리는 선택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기록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기록되지 않은 것들은 대부분 우연에 기대어 망각과 기억을 오간다.
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바움가트너가 불현듯 아내에 대한 추억에 젖어든 것도 우연 때문이었다. 우연히, 정말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을 겪다가 아내와의 일을 떠올리고, 그녀를 기억한다. 자기 안에 깃든 그녀에 대한 몇몇 추억 속에서, 그녀라는 인간의 모습을, 인생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그녀 인생 속에 깃든 자신의 모습, 자신의 인생까지 더듬어간다. 맥락 없이 떠오르는 추억의 단상 속에서 바움가트너는 자신과 아내의 인생이 속절없이 엉키고 뒤섞이는 것을 발견한다. 섞여들 것 같지 않았던 그녀의 인생이 바움가트너의 삶 속으로 스며드는 순간이 너무도 덧없다. 너무도 우연적이고, 운명적이다. 그 모든 기억들은 사실 바움가트너만의 기억이고, 정확히는 바움가트너의 주관적인 기억이다. 같은 장면, 같은 사실에 대한 기억이라도 아내와 바움가트너의 기억이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내에 대한 모든 기억은 바움가트너만의 것이고, 그 자신만의 이야기다. 그것을 떠올리고, 떠올린 기억을 쓸 수 있는 이는 바움가트너뿐인 것이다.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아내도 자신만이 쓸 수 있는 많은 글을 남겼다.
바움가트너는 아내가 남긴 수많은 시를 선별하여 출간했다. 그는 종종 아내의 시 속에서 그녀의 모습을, 또 그녀의 인생을 읽는다. 그리고 그 모습, 그 인생 속에 깃든 자신의 모습을 또한 찾을 수 있다.
인생은 누구나 기억하는 대로 그 형태를 갖춰가는 것이다. 옳고 그름은 없다. 내 인생이라고 해도 내가 생각하는 나의 인생과, 타인이 생각하는 나의 인생이 다를 수 있다. 누구도 한 사람의 인생을 자신 있게 그려갈 수 없고, 누구도 그 인생을 몇 마디 단어로 정의할 수 없다. 그 인생을 실제 살아온 장본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폴 오스터는 자신의 유작이 되어버린 '바움가트너'를 통해 우연과 운명이 지배하는 생의 덧없음을 역설하며 동시에 이야기의 효용성에 대해서도 말한다. 몇 개의 반짝이는 추억들, 생을 비추는 몇 개의 일렁이는 불빛들에 기댄 인생의 모습이란 불확실하고 덧없다. 무엇이 기억되고 무엇이 기억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마저도 죽는 순간 사라진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만 남아 겨우 존재한다. 기록되지 않는다면 그 수많은 인생의 덧없음을 우리는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인생은 사라져도 이야기는 남는다. 인생이 이야기를 닮은 것처럼 이야기는 인생을 닮았다. 모든 이야기에는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누군가의 인생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인생은 결국 이야기로 그려져야만 할 운명인 지도 모른다. 폴 오스터 같은 소설가가 세상에 존재했던 이유일 것이다. 이야기가 없었다면 그 자체로 우리의 인생은 황폐했을 것이고, 인생을 이야기할 기회조차 많이 없었을 것이다. 인생은 이야기로 이어지고, 이야기는 인생으로 이어진다. 폴 오스터의 인생이 '바움가트너'로 이어지고, '바움가트너'가 폴 오스터의 인생으로 이어진 것처럼.
전작인 '4321'을 작업하며 폴 오스터는 이미 인생의 덧없음과 이야기의 효용성에 대해 역설한 바 있다. 유작 '바움가트너'를 통해 작가는 앞선 작업의 마침표를 찍는 동시에 자신이 만든 이야기 속으로 걸어들어가 버렸다. 그가 내 가슴에 남긴 몇 개의 반짝이는 추억들, 반짝이는 불빛들은 그의 자취인 동시에 나의 인생, 나의 이야기의 일부가 될 것이다.
폴 오스터라는 작가는 사라졌어도 그는, 그의 인생은 그가 만든 이야기 속에서 존재하고, 그 이야기를 기억하는 수많은 독자의 가슴속에서도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