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를 끄적이는데 자꾸 지나온 시간들이 밟혔다. 아무래도 올해는 올해의 책이 올해의 나(의 흔적)인가보다. 읽은 책들보다는 놓친 책들과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먼저 떠오르는 걸 보면 정말 그런 것 같다. 미련미련미련 때문인가봐(주현미).

미련 가득했던 아홉수도 이제 다 갔다. 늘 아홉수 탓을 하고 있었다. 좋은 남탓이다.

미리 감사합니다. 주어는 없습니다.

이하 순서는 랜덤.

 

<나를 더 사랑하는 법> by 미란다 줄라이, 헤럴 플레처 

별 이변이 없지 않은 이상, 이 책이 올해의 마지막 선택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의 두 저자 중 한 명이 저 아름다운 영화 <유 앤 미 앤 에브리원>의 감독 겸 주연인 미란다 줄라이라고 소개한다. (물론 상대방이 그 영화를 알아야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이 책의 소개는 충분한 것 같다. 사실, 그러거나 말거나 잘 팔리지 않는다. 

웹사이트에 과제가 던져지면 그걸 하고 싶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과제물을 업로드한다. 이 책은 그 결과물 모음집이다. 모르는 사람들끼리 악수시키고 그걸 찍기, '내가 죽은 뒤에 어떻게 처리되고 싶은가' 말하기, 5학년 때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 다시 읽기, 잊을 수 없는 날 입었던 옷들을 늘어놓고 사진 찍기. '나는 유죄입니다. 나는 외롭습니다. 나는 평화를 위해 그림을 그립니다'라는 피켓을 세워놓고 도로에 그림을 그린 (전직) 이라크전 참전 병사는 '공공장소에서 시위하기' 과제를 한 것이다. 과제들은 아무런 논리적 연속성이 없다. 게다가 과제 번호순이 아닌 중구난방의 편집은 이 제멋대로인 내용들을 더욱 부채질한다. 장난과 슬픔과 실험과 기쁨이 한데 섞여 뒹군다. 아, 이런 개판이 인생인가봐.

상황이 그렇다보니 희망은 온갖 원하지도 않은 짐들과 권태와 돌아보기 싫은 과거들의 틈바구니에 껴 있다. 이런 생의 희망 찾기는 보물찾기와 같다고, 이 책은 단 한 번도 소리내어 말하지 않았다. 대신 책 속은 직접 보물을 찾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땀과 숨과 키스로 가득찬 아름다운 책.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by 로베르토 볼라뇨 

 여름이 지나갈 무렵, 몸도 마음도 한계에 다다랐다. 책을 읽지 못했다. 난독증 비슷한 증상이었다. 외국어를 읽듯이 단어를 하나하나 훑은 다음 문장을 강제로 조립했다. 머릿속에서 문단 이상의 내용은 증발했다. 그때 나는 내가 끝장난 줄 알았다. 

어쩌다 다시 잡았는지 기억나지 않는 이 책이 마법을 부렸다. 나는 이 책을 그림처럼 읽었다. 거대하고 불가해한 구멍(말도 안되게 장황한 대체역사소설 이야기)이 있었고, 방치된 채 썩어가는 뜨거운 것들이 있었고, 그림자같은 인물들만 등장하는 도시 뒷골목의 느와르 풍경이 있었다. 무엇보다 폭력, 많은 폭력이 있었다. 증오와 권태의 스케치들. 대상을 알 수 없는 풍자화들. 찌그러진 풍경화들. 각각의 단편은 하나의 그림이면서 또한 거대한 초현실주의 태피스트리의 쪼개진 부분들이었다. 내가 읽은 것은 이야기-서사가 아니라 규정지을 수 없는 연출로 가득찬 수수께끼의 현상들, 이미지들의 덩어리였다. 뜨거운 라틴 현대 미술.

아무런 스토리도 이어지지 않고, 가끔 겹쳐 등장하는 인물들 외에는 접점조차 없는 이 단편집은 그 연결점이 없기 때문에 힘을 발휘한다. 메타포는 많지만 모조리 목표를 잃고 산산이 분열한다. 때문에 볼라뇨는 마르케스류의 성과를 돌파했다. 초현실주의가 뭔가를 상징하기를 거부하는 순간, 그는 그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서사를 거부하는 문자는 자존한다.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이 독특한 접근법을 요구하는 소설 덕에 나는 다시 글을 문제없이 읽게 되었다. 책은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 

 *다르지만 어딘가 비슷한 것.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군인은 축음기를 어떻게 수리하는가> by 사샤 스타니시치 

 낭기열라는 거의 전적으로 신뢰하는 출판사다. MD가 되기 전, 우연히 서점에서 샀던 (인터넷 서점 애호가였다면 나는 결코 그 책을 발견하지 못했을 거다) 안토니오 스쿠라티의 <생존자>는 깜짝 놀랄만한 홈런이었다. 이어 접한 책들도 모조리 안타를 터뜨렸다. 청소년 분야를 맡게 되고 잠시 그분들과 메일을 주고받았다. 브랜드전 한정 티셔츠를 준다고 했었는데 결국 받지 못했다. 

문학MD의 격찬이 있었으니 나는 좋았다는 얘기만 해도 될 것 같다. 따뜻하고 소란스럽고 '애수'가 있고 웃기고 감동적인 전쟁 이야기는 정말 만나기 힘들다. 사프란 포어보다 더 정신없는데, 그게 '전장'의 분위기 같아서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보스니아는 뉴욕이 아니니까. 거기는 물리적으로도 붕괴되고 있는 세계니까. 혼란은 혼란스럽지 않고 그냥 슬펐다.

유사 난독증에서 탈출할 무렵 읽었다. 책 속에 담긴 많고 많은 '이야기'들이 힘이 되었다. 낭기열라님들아, 티셔츠는 주시지 않아도 되니까 좋은 책 많이 내 주세요. 

 MD가 특정 출판사 편애해도 될까? 내 분야에는 이 분들 책이 없으니까 지금은 괜찮다.   

   

 

 <스페인 내전> by 앤터니 비버 

 가장 위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에 그 패배는 가장 비참하다. 어쩌면 20세기 (서구)사람들은 이 전쟁에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을 시도했었는지도 모르는데, 하나같이 실패한 것들 투성이다. 희망이라고 쓰고 좌절이라고 읽는다. 비극적 면모를 드라마틱하게 연출할 줄 아는 앤터니 비버의 능력 때문에 이 사살당한 거인은 더 아름답고 슬퍼 보인다.

그럼 지금 우리는 어떡하면 좋을까. 동아리 후배들에게 세미나라도 할까 생각하며 읽다가 세미나는 포기했다. 어떡하면 좋을까라는 고민 자체가 '여기에서 시작한다'라는 의미라는 걸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그걸 설명하기에 앞서서 왜 패배할 줄 뻔히 알면서 싸워야 하는가를 설명할 자신도 없었다. 사실은 왜 역사를 배워야 하는지조차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다시 준비해볼까.

얘들아. 이게 진짜 무한도전이야. 언제 꼭 보렴. 심지어 재밌어.

*잡담. 앙드레 말로의 <희망>에는 <카탈로니아 찬가>보다 훨씬 간지 넘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물론 두 작품 다 심각하고 재미있다. 

*앤터니 비버의 팬이 되기 위해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사인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를 먼저 읽어도 좋다.  

   

 

<타워> by 배명훈 

나는 장르문학 빠돌이다. 그러나 모 평론가처럼 '재미없는 김연수가 왜 잘 팔리냐'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김연수는 충분히 좋았다. 인문MD 말마따나 좋은 팝 앨범 같다. 근데 한국문학 작품들은 대개 늘 그렇듯 그냥 그랬다. 안좋았다는 건 아니다. 대단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타워>가 있다. 박민규의 다음 단편집이 나오기 전까지는 어쩌면 이게 유일할지도 모른다.

<타워>는 시니컬한 이야기들이 따뜻한 이야기들보다 훨씬 좋았고, 그 편차가 분명하게 느껴진다는 단점은 분명 있었다. 문장 역시 그의 발상만큼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빨리 우리나라 작가가 '동원 박사 세 사람' 같은 작품을 써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전에 '예비군 로봇'을 읽고 느꼈던 가능성이 활짝 열려 있었다. 봉오리가 열린 꽃을 보고서야 화들짝 놀라면서 

아아 꽃이 핀 걸 보니 봄이었구나. 그런데 봄은 어디 있느뇨. (한국 장르문학에게 띄운 연서 중에서)

타율(총 수록작 대비 성공적인 수록작 비율)에 있어서도 김연수에 못지 않았으므로, 올해 가장 놀라운 책이었던 <타워>는 당연히 올해의 책에 들어간다. 포텐셜이 폭발하는 순간의 반짝임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p.s: 편차가 큰 단편집이 왜 비교적 고른 수준의 단편집을 제쳤는가? 모든 안타는 안타고 아웃은 그냥 아웃이다. 

 

 

-신간브리핑에서 이미 다루었던 올해의 책들

  

 

 

 

 

  

 

 

-디자인 멜랑콜리아: 공적 체제와 사적 욕망- 그 복층 매트릭스를 치고 들어가는 불온서적. 왠지 재미있기까지 하다. 님 캡짱.

-뱅크시, 월 앤 피스: MD가 아무리 열심히 소개해도 한계가 있더라는 슬픔. 결국 알라딘 블로거들이 한참 뒤에 다시 발견함. 

-인터페이스 연대기: 디자인 멜랑콜리아와 같이 발매됐던 친구. 인식-행동의 조합체라니, 뭐야 너무 아름답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진심의 글쓰기는 이렇듯 다른 모든 조건을 초월해서 감동적이다. 반 고흐 서간집 중 최고. 

  

 

>> 기타 등등 >>

 

-평소 말투로 돌아와서.

말도 안되는 대사, 대책없는 초 열혈 로봇물 <천원돌파 그렌라간>을 다시 봤어요. 함께 소리지르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1분 전의 우리보다 진화한다. 

아멘.

내년은 더욱 진화한 한 해 되시기를. 주어는 없습니다. 해피 뉴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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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sfall 2009-12-31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땀과 숨과 키스로 가득찬'

외국소설/예술MD 2009-12-31 11:53   좋아요 0 | URL
19금 아니라능. 입니다(타마마).

치니 2009-12-31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미란다 줄라이, 당장 찜입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9-12-31 13:38   좋아요 0 | URL
현명한 선택을 축하드리는 바입니다. ^^

웽스북스 2009-12-31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저 책 나오자마자 찍어놨었는데. 역시. ㅎㅎㅎ

외국소설/예술MD 2009-12-31 16:14   좋아요 0 | URL
역시. 센스. 쟁이. 세요.
저도 괜히 만년필. 갖고 싶네요.; 쓰지도 않을테지만;

하루(春) 2010-01-05 0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미란다 줄라이의 책은 아마존에서 사야 겠군요. 제가 한국에 없거든요. 그런데, 원제가 "Learning to love you more"군요. 책 정보에 원제가 틀렸어요. ^^

외국소설/예술MD 2010-01-05 14:26   좋아요 0 | URL
어 정말 그러네요.; 고치겠습니다.;;

여름매미 2010-01-06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잘 읽고 있어요. Happy new year-

외국소설/예술MD 2010-01-07 17:34   좋아요 0 | URL
늘 감사합니다. 여러분들 모두 제게 힘이 돼요. 리플을 많이 다셔도 괜찮다는 의미입니다. 반은 농담이구요.

저 꼭 해피뉴이어 하고 싶어요. 열심히 행복해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 같이 잘 살아 보아요.

파주소녀 2010-01-11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좋은 책 많네요. 덕분에 좋은 정보 얻어갑니다. 아무리 MD가 열심히 소개해도 잘 안나간다... 라는 말은 왠지 좀 슬프네요.. 그만큼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는 말이니까요... 음.. 저도 박민규 작가의 단편집 기다리고 있어요. 참고로 <죽은 왕녀를 위한....>도 좋았답니다 ^^

외국소설/예술MD 2010-01-11 16:13   좋아요 0 | URL
사람들이 책을 안읽는다뇨. 그냥 MD가 부족한 거죠. 고객이 왕이니까요. ㅎ
나의 좋은 책이 누군가에게는 분명히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추천이란게 뭘까 늘 고민하게 돼요.

저는 박민규 작품들은 단편들이 더 좋습니다. 장편들은 마치 오래달리기처럼 시간이 갈수록 체력이 저하되는게 보인달까, 그런 느낌이 들어요. 상대적으로 그렇다는거고요. '절'(말많을 절)은 08년산 최고의 단편이었습니다. 하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