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이든 발 12시 30분 동서 미스터리 북스 77
프리먼 윌스 크로프츠 지음, 맹은빈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서추리의 걸작 중에 하나인 크로프츠의 '크로이든 발 12:30분'을 읽었습니다. 이 소설을 완역본으로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팬더추리문고의 편역본이 상당히 깔끔하게 번역되어있기 때문이기도 하고-별로 유명한 작품이 아니라서 시중에 잘 없습니다. 팬더 문고판도 구하는데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별로 인기있는 작가가 아니다 보니-DMB에 대한 믿음이 가지 않아서...(역시 번역상태는 별로였습니다. 제말 오타만이라도 잡아서 내주길)

도서추리다 보니 내용을 쓰는데 부담이 없군요 :) 크로이든 발 12:30 비행기에서 어떤 노인이 독살당합니다. 그 노인을 죽인 것은 젊은 사업가 찰스 스윈번입니다. 그은 불경기로 인해 자신의 사업과 사랑하는 여인을 모두 잃을 위기에 처하자,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에게 유산을 주기로 했던 외삼촌을 독살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깁니다. 외삼촌의 사망 이후, 무사히 넘어가나 했던 그의 앞에 우연히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제 2의 살인을 저지르는데..

주위에서 크로프츠에 대한 평은 그다지 좋지 않은 편입니다. 지루하다라는 평이 압도적입니다. 특히 '통'이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 사람이 창조해낸 탐정 프랜치 경감 역시 현실적인 캐릭터라서, 캐릭터로서의 매력은 떨어지는 편입니다. '통'은 읽어보지 않았고, 제가 가지고 있는 팬더 판본과 동서 판본을 비교하면서 읽어보았는데, '지루하다'는 의미를 어느정도 이해할 것 같긴 합니다.(두께를 보고, 아니 단편도 없는 것 같은데 무슨 이야기가 이렇게 많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워낙 팬더본이 만족스러워서요.)

두 판본의 결정적인 차이는 '묘사'의 차이입니다. 팬더 판본은 어린이들이 봐서는 안되는 내용-찰스와 유나의 키스신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충실히 옮긴 편입니다. 하지만 전달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습니다. 팬더 판본은 크로프츠의 세밀한 묘사를 대부분 축약해서 건조하게 사건만 옮긴 편입니다. 물론 찰스의 심리 묘사는 대부분 건드리지 않은 편입니다만, 그 외의 묘사는 대부분 축약해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판본은 재미있게도 상당히 건조하고 스피디하게 사건이 진행됩니다. 처음에 제가 읽었을 때도 그 스피디함-찰스 스윈번이 젊은이다 보니 더 끌리게 마련이죠.-이 맘에 들어서 좋아했던 소설이었으니까요. 반면에, 완역본은 심리묘사 못지 않게 주위의 사건 묘사도 충실합니다. 그래서 범죄행위의 스피디함보다는 주인공의 심리의 답답함이 더욱 부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상황이요. 크로프츠는 질릴정도로 세밀하게 묘사를 하더군요. 도서추리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묘사에 세심하게 공들인 흔적이 납니다. 그것 자체는 작가로서의 장점입니다. 하지만 그 묘사가 찰스에만 집중해 주었다면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세밀하다 보니 저같이 원래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지루하다는 이야기가 나올 법도 하겠더군요.

그런데 이 '묘사'의 차이가 같은 작품을 상당히 다르게 규졍해버립니다. 팬더 판본은 '시대성'이 없습니다. 소설이 시대적인 배경을 상당부분 잃어버리면서, 거꾸로 즉 언제 읽어도 부담없이 재미있는 추리소설에 가깝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태양은 가득히'의 영화랑 비슷한 느낌도 줍니다. 반면 동서 판본은 장엄한 고딕스타일의 연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대화나 묘사가 상당히 고풍스러우면서도 묘사때문에 상당히 과장된 느낌. 옛 연극을 보는 느낌입니다. 작가가 더 가까이 묘사할수록, 시대에 결합할 수 밖에 없겠죠. 생각해보니 플롯 자체도 크리스티의 '유산'과 '애증'이네요.

이 소설은 도서추리소설입니다. 도서추리의 장점은 범행과정을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훔쳐보기이 쾌감은 장난이 아니죠. 범인의 심리과정의 생생함과 트릭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독자들에게 생생함을 제공하죠. 이러한 면에서 이 소설은 아무리 칭찬해도 아깝지 않습니다. 찰스 스윈번이라는 인물에 대한 묘사는 정말 뛰어납니다. 똑똑한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비도덕성의 함정에 빠진 찰스의 그 불쌍한 모습이란! 보통 오만하고 부족함 없이 자란 성격일수록 아쉬운 것을 가지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는 점을 작가는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쉬운 점은 찰스의 치명적인 매력만큼 '쫓는 사람'인 프랜치 경감의 매력이 받쳐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프랜치 경감은 몇 장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의 캐릭터가 빛을 발하는 장면이라면, 맨 마지막에 후일담으로 설명해준다는 점 정도인데, 경감의 캐릭터 때문인지 상당히 허전한 느낌이 듭니다. 물론 아직까지 제 나이가 찰스의 나이에 가깝기 때문에 찰스에게 더 공감을 느끼는 건지도 모르고, 찰스가 제 스스로에게 반면교사의 여지가 있는 캐릭터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면에서는 불만스러웠습니다.

이 소설에는 큰 교훈이 숨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은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자기본위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찰스의 범행준비과정과 법정에서의 검사의 반박을 교차로 읽어보세요. 크로프츠의 지루할 정도로 세밀한 묘사 덕분에 읽으면서 완벽했다고 생각한 그의 범행과정이 추풍낙엽처럼 논박당합니다. 물론 추리소설을 많이 읽으신 분들에게는 낡은 트릭일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저는 법정과정을 보면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격언을 다시 떠올릴 수 밖에 없더군요. 완전범죄를 치르기 위해서는 얼마나 현명한 것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얼마나 남의 입장에서 바라보느냐가 핵심인 것 같더군요.' 비단 완전범죄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겠지만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통'을 읽어봐야겠습니다. 이 소설에 워낙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차라, 좀 객관적으로 보려면 다른 소설을 필히 읽어봐야 할 것 같네요.

추신) 동서의 홍보물은 정말 '엽기적'이군요. 알리바이를 '까부수다'니! 찰스 스윈번은 교수형이 아니라 오체분시 되었나봅니다 ;)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만두 2005-09-04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잘 쓰셔서 기 팍 죽었습니다^^

상복의랑데뷰 2005-09-04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 부끄럽습니다. ㅠㅠ

oldhand 2005-09-05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로프츠는 추리소설의 역사상 굉장히 유니크한 작가라는 생각입니다.

상복의랑데뷰 2005-09-05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작품을 많이 읽어보지 않아서 함부로 말씀은 못드리겠습니다만, 크로프츠는 이 작품만으로도 역사에 남을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아영엄마 2005-09-13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리소설에 조애가 깊으신 또 한 분이시죠? ^^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상복의랑데뷰 2005-09-13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끄럽습니다. ^^;;;;

날개 2005-09-14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 서재에 종종 글 남기시던 분이군요.. 축하드립니다..^^*

상복의랑데뷰 2005-09-14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감사합니다. ^^;

Reds 2005-09-16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로프츠 참 좋은 작가입니다. 추리소설은 그 사회의 모습을 철저히 반영하고 있어야 한다는 제 신념같은 지론(내지는 취향)에도 딱 들어맞는 작가이구요. 다른 작가들은 넘겨 버렸을 부분까지도 철저하게 묘사하는 그 세심함과 꼼꼼함도 좋구요. 리뷰에 전체적으로 동감하는데 딱 한가지 부분, 프렌치 경감이 매력없다는 부분에는 소심하게 반기를 들어 봅니다. 전 오히려 프렌치 경감의 캐릭터가 현실적이고 정감가서 좋던데요^^ 추리소설에 나오는 슈퍼맨급 탐정들에 질려서 저에겐 더욱 그렇게 느껴졌나 봅니다.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좋은 소설에 걸맞는 좋은 리뷰네요.

상복의랑데뷰 2005-09-16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처음 뵙겠습니다. ^^ 말씀해주신 부분에는 공감하지만, 저는 슈퍼맨급 탐정들을 더 좋아해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약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축하해주시니 부끄럽습니다. ^^; 앞으로 자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