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글을 쓰고 나서 이렇게 길게 엔터를 누르고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아이가 독감에 걸려버렸는데, 만 8세씩이나 된 아이가 이렇게까지 열이 나고 하루종일 기운없이 누워만 있을수도 있나 싶게 심하게 앓았다. 사흘을 꼬박, 해열제를 먹고도 고열에 시달리던 아이는 나흘째를 지나면서 열이 조금씩 가라앉을 기미가 보였다. 아이가 아프던 며칠간 아이만큼 자주 들여다봤던 건 부엌 창가 밑에 자리한 작은 나무상자다.

 

 

 

단단한 나무로 짠 뒤에, 차분한 색감의 무늬종이로 덮은 상자속에는 4*6인치 크기의 카드 한 뭉치가 들어있다. 당연히 상자는 내가 직접 만든 게 아니고, 제작비 제외하고 배송료만 무려 50달러 가까이 지불하고 구입했던 미제 핸드메이드다(엣시따위 끊어버려야 한 달 가계가 평안해진다). 경제적 불행 중 다행으로 카드는 한 장씩 손수 만들고 있다... 좋아해야 하는건지, 조금 헷갈리네.

카드 한 장 한 장마다 내가 가장 즐겨 만드는 요리들의 재료와 조리법이 적혀 있기도 하고, 세 아이들이 각각 아플 때 그나마 잘 먹는 음식들이나 먹여도 큰 탈이 없는 음식들의 목록이 나열돼 있기도 하다.

 

 

 

이런 것을 레시피 카드라고 부른단다. 정말이지 어딘가 가정적이고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을 한몸에 다 퐉- 끌어안고 있는 듯한 단어다.
처음 이 카드에 대해 알게 된 건 순전히 이 책 덕분이다. 그리고 레시피 카드를 만들고 모은다고 안해도 될 버라이어티한 쇼핑을 하게 된 것도 다 이 책 덕분이지... orz

 

나에게 처음으로 손수 적은 레시피를 건네준 사람은 나의 친구 케이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레시피를 전해주는 문화에 익숙지 않던 나에게 그녀가 자신의 레시피 박스를 열어 체리 크런치 레시피를 적어주었을 때, 나는 큰 보물을 손에 쥔 것처럼 흥미진진한 기분이 들었다.(...)케이는 우연히 잡지에서 이 레시피를 발견하고 만들어 본 후 너무 맛있어서 자신의 레시피 박스에 소중히 간직해왔고, 그것을 내게 전해준 것이었다.
케이가 나에게 자신의 소중한 레시피를 나누어주었던 것처럼 그 후 나 역시 레시피를 나누는 즐거움에 푹 빠져 지냈다. 

 

내가 레시피 박스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 또한 아줌마를 통해서였다. 처음으로 저녁 식사에 초대받아 갔을 때 잔뜩 긴장해 있던 나에게 직접 준비한 요리와 디저트에 대해 이야기하며 레시피를 적어주셨다. 레시피를 적어주고 전해주는 것이 생소했던 나에게 그날의 경험은 굉장히 신선했다. 60대 초반인 델라 아줌마의 레시피 박스는 가족 대대로 물려받은 가족 레시피부터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줌마가 하나하나 직접 모아온 레시피까지 엄청난 컬렉션을 자랑한다.

 

처음에 이 책을 열어봤을 땐 사전 저리가라 싶은 글자 크기에, 빽빽한 행자간에, 이게 무슨 요리책이냐 해도 너무한다! 싶은 생각이었는데, 읽다보면 그 첫인상이 좀 누그러지기는 한다.

그냥, 알려주고 싶은 게 너무 많은 거다.자기가 취미로 베이킹을 시작하면서 얼마나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지, 얼마나 맛있는 레시피를 많이 찾았는지, 이 좋은 걸 나 혼자 알면 아까우니까, 많이많이 가르쳐줘야지, 기타 등등등. 다만 그걸 한꺼번에 다 풀어내려다보니 과했을 뿐... ㅎㅎ 솔직히 이 책을 펼쳐놓고 뭔가를 만들어 보기가 편안하지는 않지만, 들어있는 레시피로만 봤을 때는 다른 어떤 베이킹 서적보다도 다양하고 생경한 것이 많아서 보고 실습해보는 재미가 있다.

 

레시피 카드는 단순히 요리법을 적어두고 찾아보는 데만 그 가치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요리법이야 뭐 자꾸 하다보면, 자주 만드는 건 저절로 외워지고 손이 기억하니까 굳이 별도의 카드를 마련해 적어 보관할 필요가 있나 했는데, 있더라. 음식이 대개의 경우 누군가와 함께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내가 만들던 음식을 그대로 만들어보고 싶어서 몸살이 날 수도 있으니까. 아주아주 먼 훗날에, 아마도. 

 

 

아쓰타는 '생활 레시피'라고 쓰여진 그 책자를 집어들었다. 작은 도화지 카드의 오른쪽 위에 구멍을 뚫어서 고리가 끼워져 있다. 학생들의 단어 카드를 확대한 형식이었다.
살며시 카드를 넘겨보았다. 카드는 요리, 청소, 세탁, 미용, 기타의 항목으로 나뉘어서 '히나마쓰리 레시피', '생일 레시피'같은 제목 밑에 요리법 등이 일러스트로 설명되어 있었다.
"오토미 선생님, 세탁과 청소 요령, 요리 레시피 같은 걸 우리에게 가르쳐 줄 때마다 이 카드를 줬어요. 제대로 깨끗하게 컬러 복사한 걸로요."

 

카레우동, 하고 미카가 중얼거렸다.
"선생님 카레우동 맛있었는데, 튀김이 들어가서."
튀김..., 하고 조카딸이 말했다.
"그 튀김을 씹으면 카레 맛 나는 즙이 나왔잖아. 그 즙은 어떻게 만드셨을까?"
레시피가 있어, 라고 조카와 유리코가 동시에 말했다. 잔잔한 웃음꽃이 퍼졌다.

 

 

 

 

 우리 작은 올케는 결혼하자마자 집들이 때 새우젓 두부찌개를 올렸대요. 동생이 좋아하니까 시어머니께 배워서 한 건데 이 찌개를 한 술 뜨던 동생의 직장 상사, 감격해서 말을 잇지 못하더래요. 돌아가신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새우젓찌개가 너무 먹고 싶어서 아내에게 해 달라고 했는데 아무리 설명을 해도 흉내조차 내지 못했대요. 그래서 다시는 먹어볼 수 없나 보다 했는데 이렇게 먹게 됐다며, 재료와 먹는 법을 메모해 갔다는 것 아닙니까?

 

요리책 보다가 눈물나는 일은 참 드물 것 같은데, 이 대목은 코끝이 찡해진다. 돌아가신 엄마가 해 주시던 음식이 너무 먹고 싶은데 두 번 다시 먹 수 없게 됐을 때의 기분 완전 잘 알 것 같다... 엄마가 살아계시든 돌아가셨든 엄마의 맛이 그리운 건 누구나 마찬가지 아닐까. 그렇게 여러 해 동안 포기하고 살던 맛을 누군가가 다시 살려내준다면, 그게 누구든 등 뒤에서 후광까지 보일지도 모를 일.

 

49일의 레시피에서는 돌아가신 새엄마를 추억하는 주인공과 가족, 그리고 그녀의 가르침을 받았던 많은 제자들이 나온다. 따지고 보면 별 관계도 없는 이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세상을 떠난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그리움을 나눈다. 그녀가 만들어주거나 요리법을 가르쳐주었던 음식들의 온기가 남아있는 추억의 동아리 안에서 사람들은 치유받고 또 새로운 삶을 살아나갈 힘을 얻는다. 칭찬받은 쉬운요리, 는 제목에서 읽히듯 그야말로 (비교적)쉬운 요리들을 만드는 법이 실린 실용서다. 그런데 이런 몇 개 안 되는 잔잔한 에피소드들이 간혹 마음을 툭 건드리고 간다.

 

실용적인 목적과 그리고 그 밖의 플러스 알파적인 목표 때문에 나도 레시피 카드를 쓴다. 한두 번 만들어 본 것으로는 카드를 쓰지 않는다. 못 해도 열 번은 넘게 만들어 본 것들, 그중에서도 가족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것들, 일반적으로 알려진 레시피에서 조금씩 변형해서 우리 집에서가 아니면 먹어볼 수 없는 것들을 우선적으로 적어본다. 이미 기본적으로 부엌일에 대해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쓰고 있는 카드여서 다소 불친절하고 글씨체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깔끔하고 예쁜 것도 아니지만, 나중에는 이것도 다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남겨주는 선물이 되겠지. 새벽에 써서 그런가 엄청 센티멘털해지네. 낮에 다시 읽어보면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아...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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