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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일기
소피 퓌자스.니콜라 말레 지음, 이정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4월
평점 :
본 서평은 출판사에서 지원받은 도서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일이다. 일기라는 가장 내밀한 글쓰기의 한 장르가 때로는 한 사람의 캐릭터성이 두드러지는 일인극의 방백처럼 읽힐 수도, 또 때로는 아무도 등장하지 않은 무대의 배경만을 묘사하고 있음에도 어떤 불길한 낌새가 느껴지는 지문처럼 읽힐 수도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놀랄 만한 일은 세상에 성실한 일기 작가가 이토록이나 많다는 사실 아닐까. 일기를 쓰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색채를 띤 일기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흐릿하게 그려보는 것과 한 묶음으로 한꺼번에 손에 쥐는 것은 아마도 말로만 듣던 얼음을 손으로 만져봤을 때의 감각적 차이와 비슷할 거라고 빗대어 말하고 싶다. 그 실감이 유독 강렬했던 것은 실물 일기의 사진 덕분이었을 테다. 필체가 글쓴이의 성격과 문체의 특성을 상당 부분 반영한다고 생각하는 1인으로서는, 각기 다른 필체에서 피어오르는 이미지와 문장에서 우러나는 느낌이 일치하는 일기를 발견할 때마다 유독 반가웠다.
유달리 그런 동일시가 강했던 것은 겸손하고 강인한 기도문 같은 일기를 남긴 에티 힐레숨의 일기와 잔잔한 일상에서 잡아챈 즐거움을 바삐 써 내려갔으리라 짐작되는 외제니 드 게랭의 일기다. 에티 힐레숨은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어 있다가 결국 그곳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인데, 그녀가 적어 내려 간 일기의 글씨를 보면 흡사 누가 듣기라도 할까 봐 숨죽여가며 나긋나긋하게 읊는 기도처럼 읽히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조심스러운 필체로 에티 힐레숨은 이런 일기를 썼다.
당신에게 한 가지 약속하겠습니다, 신이시여, 오, 하찮은 것입니다. 저는 미래가 불러일으키는 극도의 불안들을 그만큼의 무게로 현재에 매다는 것을 경계하겠습니다. -124쪽
한편 그녀보다 한 세대 정도 전의 사람인 외제니는 거의 한평생 한 곳에 붙박여 산 사람이었다. 자신의 삶에 불평하는 대신 그녀는 자신의 일상을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거기서 발견한 즐거움과 놀라움을 기록했다.
내가 방에 들어섰을 때 내 귀여운 홍방울새가 암고양이의 발톱 아래에 있었다. 나는 주먹을 크게 날려 고양이가 새를 놓아주도록 함으로써 새를 구할 수 있었다. 겁에 질렸던 새는 너무 기뻐서 마치 나에게 감사 인사를 하듯이 그리고 두려움에 목소리를 잃지 않았다고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온 힘을 다해 노래하기 시작했다. -142쪽
그녀의 일기에 남은 필체를 보면 어센더와 디센더를 힘주어 눌러쓴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종이 위에 옮겨놓으며 다시금 그 순간의 흥분을 곱씹느라 그랬던 것은 아닐까 짐작하며, 판독조차 할 수 없는 문장임에도 그 감정이 전해져 오는 것을 느낀다. 아마도 그것이 육필 원고의 매력일 것이다. 글쓴이의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이.
그토록 개인적이어도 내밀해도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음이 바로 일기라는 글의 가장 큰 특징이자 개성이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는 가장 사적인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세월의 더께가 앉기 시작하면 그것은 대단히 공적인 기록으로서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 있지 않을까?
전적으로 의식의 흐름을 따르기만 한 일기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의식이란 결국 크든 작든 외부와의 상호작용에서 비롯한 감정과 느낌을 해석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인데 바깥에서 전쟁을 하건, 자신이 고립되어 무슨 일을 겪게 될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아랑곳없이 독립적으로 관념의 세계를 유영만 할 수 있는 인간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일기 작가의 의사야 어떻든 간에, 일정 기간이 흐른 뒤에 스스로 파쇄하지 않는다면 그 일기는 언젠가 후대에게 사료로서 널리 읽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결코 좌시할 수 없겠다는 자각을, 이 책의 독자라면 한 번쯤 하지 않을까......
어제 투르에서 그는 내가 그와 그의 그룹에 지나치게 완전히 의존적으로 살고 있다고 비난했다. 내가 왜 이렇게 아픈지 모르겠다. 그 이유가 만일 나에 대한 그의 사랑이 그의 행복과 삶에, 그가 쓰고자 하는 작품 곁에서 얼마나 사소한지를, 그리고 아직 성공하지 못한 데 대해 그가 어제 그렇게 슬펐다는 사실을 명백히 느꼈기 때문이라면- 만일 그가 여전히 내가 미국으로 떠나길 원하고, 내가 그를 떠나야만 하는 게 사실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라면 -혹은 내가 그가 그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사랑만을 위해 사는 것을 그가 원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그보다 우월하다고 믿기 때문이라면. -46쪽
그러니까 예를 들어 어쩌다 우연히 이런 일기를 읽었다고 한다면 그저 여기에 드러난 내용만 봤을 때에는 고개를 절레절레하고 말았을지라도 이 일기를 쓴 사람이 시몬 드 보부아르라고 한다면 이것은 후대의 연구자들이 눈을 반짝일 만한 귀중한 문서가 되지 않겠는가. 이쯤 되면 유명해질 야심이 있는 지인이 있다면 일기는 쓰지 말 것을 권하고 싶어질 지경이다.
이번에 하나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일기는 확실히 유명한 사람이 쓴 것이 더 각별하게 재미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에게 유명세를 가져다준 작품에서 드러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의외의 모습을 드러내서 좋은 의미로 친근감이 훨씬 많이 든달까...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생활을 했던 사람이었단 말이지, 하는 생각은 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