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서평은 출판사에서 지원받은 도서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소설의 제목과 내용과의 거리감은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직관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명백할 때 제목은 흡사 낮게 뜬 태양이 또렷한 그림자를 길게 그리는 것처럼 짙은 주제의식과 명확한 기대감을 작품 전반에 드리운다.
「테스」나 「80일간의 세계일주」같은 제목을 보고 책 내용을 짐작하는 건 과히 어렵지 않다. 테스라는 이름을 가진 주인공의 이야기겠구나. 80일 동안 지구를 유람하는 이야기겠구나.
상징적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직관적인 제목들은 그만큼 이야기의 윤곽을 선명하게 그려내기 마련이고 독자는 대체로 예상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 이야기를 '안전하게' 즐기게 된다. 달리 말해 여행길이 예측되는 목적지의 이름을 일부러 걸어두었다면, 독자는 당연하게 보게 되리라 예측했던 풍광이 보이지 않음에 당황하게 되겠지만 이내 그 생경한 세계를 즐기게 될 것이다.
이디스 올리비어, 생소한 이름의 작가가 「사생아 The Love Child」에서 선사하는 것이 바로 그런 놀라움이다.
사생아란 정식으로 혼인관계를 맺은 부부 사이에서가 아닌 혼외정사에서 출생한 아이를 일컫는 말이다. 이 낱말이 소설의 제목으로 택해진 것은 이야기 중, 주인공인 애거사가 감정적으로 수세에 몰렸을 때 불쑥 내뱉은 말에서 연유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그보다는 이러한 이유에서가 아닐까 짐작한다.
소설은 애거사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이내 그가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 사람인지를 보여 준다. 상실 속에서 애거사는 문득 이러한 상실이 처음 겪는 일이 아님을 기억해내는 동시에, 인생 최초의 가슴 아픈 상실은 다름 아닌 상상 친구의 죽음이었다는 것을 떠올린다.
애거사의 어린 시절 상상 친구였던 클러리사는 완전하고 치유 불가능한 고독, 같은 인간들과 접촉할 힘이 없는(p.7) 애거사가 유일하게 마음을 붙였던 존재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아, 중년의 나이가 된 애거사가 다시 한번 불러내는 데 성공한 유년기의 유일한 친구였던 클러리사는 여전히 처음 애거사의 현실에 출현했던 나이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기에, 더 이상 애거사의 친구로 머물 수 없다. 그들의 관계는 친구에서 모녀로, 즉 어떠한 힘이 작동할 수 있는 관계로 변질된다. 더구나 클러리사는 애거사가 일반적인 혼인관계에서 낳은 자녀가 아니다.
자신에 대한 연민, 극복할 수 없는 고독으로 인해 재소환된 상상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다. 사생아라는 제목은 여기에서 한번 더 그 중의적인 의미를 빛내고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인정받을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존재였던 클러리사는 현실과의 접점을 찾는 순간 타인에게도 인지되기 시작하지만 그럼에도 클러리사는 본질적으로 애거사의 욕망에 뿌리를 내린 존재인 까닭에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불안한 존재다. 그 사실을 알기에 애거사는
클러리사의 시간 일 분, 클러리사가 하는 말 한마디라도 잃는 게 싫었다. 모든 것을 갖고 싶었다.
이것은 질투만이 아니었다. 클러리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52쪽
이렇게 불안을 떠안고 살 수밖에 없다.
평범한 인간에게 꼭 필요한 사회성, 그것은 클러리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님을 애거사와 클라리사는 모두 암묵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그들을 바라보는 외부인들의 시선은 그렇지 않다. 단단했던 두 사람의 세계는 애거사만큼이나 맹목적이고 열렬한 누군가의 감정이 클라리사에게 가 닿기 시작하면서부터 금이 간다. 클러리사가 본질적으로 애거사의 상상 친구인 까닭에 애거사의 욕망, 애거사와의 정서적 유착관계는 클러리사가 현실에 존재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이다.
달리 말해 그 둘 중 하나라도 손상이 가는 순간 클러리사는 더 이상 현실에 발붙이고 있을 수 없게 된다
.
클러리사의 마음을 흔든 존재가, 그가 클러리사가 자신의 것임을 확신한 순간(p.139), 마법은 깨어질 도리밖에 없다.
"이러지 마, 데이비드. 그런 말 하지 마. 나는 동시에 두 사람에게 속할 수 없어. 그리고 나는 이미 엄마에게 속해 있어." -137쪽
클러리사가 자신으로 계속 존재하기 위해 이 이상 할 수 있는 말은 없었을 것이다. 감정은 늘 이성을 설득하는 일에 실패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또 다른 이해도 가능하다. 상상으로 빚어진 존재라 하더라도, 그 존재가 원래 상상의 주체를 비춰내지 않을 도리는 없지 않을까. 그가 갖지 못하고 누리지 못했던 것에 눈을 반짝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이렇게 간절히 자신을 염원해 오는 존재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을 텐데 그렇게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이것은 어쩐지 너무나 복잡하고 또 가슴 아픈 이야기가 되어버려서 목이 막힌다.
이야기의 말미에 이르러 다소 기묘한 결말을 맞이하는 순간, 나는 안심하는 한편 다른 질문이 성큼 다가오는 것을 봤다. 애거사는 이제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따위는 신경 쓰지 않기로 한 것일까?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키기 위해 갖은 애를 쓸까,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나 좋은 대로 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