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미 작가의 글과 인연을 맺은 게 언제였더라. <뉴요커>를 통해서 나는 박상미라는 너무 괜찮은 작가를 알았다. 이 괜찮음은 사실 내가 쓸 수 있는 말은 아니다. '그 친구 참 괜찮아' '괜찮은 사람을 하나 알고 있는데' 정도의 예문에서 느껴지듯 이건 어쩐지 좀 비대해진 자만심이 뒤에 숨어있는지라,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시선을 갖고 있고 훌륭한 언어를 손에 쥐고 있는 작가에게 나 따위의 그냥 보통 독자가 쓰기엔 왠지 민망한 마음을 잔뜩 떠안긴다. 그 책을 선물했던 동아리 친구는 다음해쯤, 나랑 같이 뉴욕 놀러가자, 그랬는데 그 다음해 봄에 내가 결혼을 하면서 약속을 깼다. 그래서 그 친구가 자기 남편하고 나중에라도 갔으면 마음이 덜 불편했을 것 같은데, 안 갔을 것 같다. 


그건 그거고. 


이 책은 명실상부 뉴요커인 작가가 (지금도 뉴요커인지는 확실치 않다) 운영하던 블로그에 쭉 올렸던 글들을 간단히 손질하여 낸 것이다. 블로그 글을 책으로 냈대, 하면 대강 연상할 수 있는 어떤 프로세스와 더불어 그 책과 맺는 몇 가지의 단편적인 인상이 있다. 단언컨대 이 책은 그 편견(내지는 상식)에서 자유롭다. 도대체 블로그에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고, 기꺼이 이 글들을 읽고 가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궁금해질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글이다. 


(엘리자베스) 비숍이 x자를 해놓은 미발표 시의 제목 '에드거 앨런 포와 주크박스 Edgar Allan Poe & The Juke-Box'가 이 책의 제목이 되었다. 이 책에 실린 미발표 에세이에서 그녀는 "시를 쓰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행위이다.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서는 엄청난 기술이 필요하다"라고 썼다. 시인의 목표는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이 필요불가결한 일, 즉 그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하는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스스로 설득하는일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시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는 세 가지 퀄리티를 꼽았다. 정확함과 자발성spontaneity(또는 즉각성? 번역이 어렵다. 이 말은 의도해서 사전에 준비하거나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갑작스럽고 자발적인 동력에 의해서 행동을 할 때 spontaneous하다고 한다. 어떤 행동의 원인과 그 행동 사이에 시차가 짧고, 그 동력 자체도 순수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계획적이고 이성적이고 관념적이라기보다 자연스럽고 진정하고 몸으로 느낀 결과라는의미가 강하다.

연주가 너무 좋아서 끝나자마자 자동적으로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칠 때... 이는 대표적으로 spontaneous한 반응이다. 그리고 미스터리. 그녀는 콜리지를 인용하면서 좋은 시란 "가장 환상적인 언어로 가장 하찮은 생각을전달하는 지루한 행위"가 아닌, "정확하고 자연스러운 언어로 가장 환상적인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했다.

-30쪽

누구나 자신을 '문화적' '예술적'이라고 생각하길 좋아한다. 그림을 모르면 야만인이라고 취급받지 않을까 걱정도 한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특히 현대 이후의 미술은 모르는 게 당연하다. 텔레비전도 없고 신문도 없던 중세에는 대중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 중 하나가 예술이었다. 그랬기에 대중은 시각예술의 언어를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가 광고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처럼.
또 사진이 발명되기 전, 미술가들은 자연의 재현을 위해 그림을 그렸다. 누군가의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 초상화를 그렸고 아름다운 자연을 담아내기 위해 풍경화를 그렸다. 자연의 재현이었기에 익숙한 이미지였고 감상을 위한 최소한의 이해가 가능했다. 그러나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면서 미술이 갖고 있는 재현의 기능은 더이상 절실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 미술은 그만의 정체를 가질 수 있는 방향으로 나가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미술은 메시지도 자연의 모방도 아닌, 좀더 미술 자체의 이슈를 위한 것이 되었다. 현대 이후의 미술은 그전 미술에 대한 지적, 예술적 반격이다.
논문처럼 말이다. 논문이 새로운 이론을 제시한다면 미술은 새로운 미학을 제시한다. 그러니까 미술의 이슈들을 모른다면 미술을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물론 미술은 어려운 거라고 말해서 잠재적 미술 관객들을 긴장시키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미술을 마음대로 보라고 말할 순 없다. 그 대중서의 저자는 마음대로 미술을 보라는 말에 이어 "미술을 생활화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적은 무지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향한 자신의 정당한 욕구를 남의 눈을 의식해 억압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언뜻 듣기에 맞는 말 같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자유로워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움은 절대로 억압을 위한 것이 아니다. 배움은 자유로워지기 위한 것이다. 결국 미술은 '마음대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수영의 기본을 익히고 꾸준히 훈련해야 저기 보이는 섬까지 자유로이 헤엄쳐갈 수 있듯, 미술도 보는 능력을 키워야 '마음대로' 보는 감상이 가능한 것이다.

-42쪽

얼마 전에 놀란 사실이 있다.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멀쩡한 사람이었다. 정말로, 매우 멀쩡했다. 얼굴도 괜찮고, 돈도 잘 벌고, 말도 잘 하고,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도무지 시간을 같이 보내고픈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도댗대체 그게 뭘까 생각했다. 그러다 얼마 안 가서 퍼뜩 깨달았다. 아, 미스터리가 없구나. 마치 코나 눈 한쪽이 없는 것처럼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어딘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 알고 싶은 게 없었고, 그와 같은 장소와 시간을 공유하는 의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알아갈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미스터리는 일종의 퀄리티다.

-297쪽

애초에 원래 적었던 글들의 품질이 남다르니 조금 가다듬었다는 것이 이렇게 눈이 둥그래지는 문장들로 빽빽한 책이 되었겠지. 말하자면, 근사한 인테리어의 기본은 필요없는 건 모조리 내다버리고 깔끔한 상태를 유지하는 거예요, 하는 것과 비슷하달까. 


머무르는 공간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식으로건 그 사람의 부분적인 스타일을 바꿔놓을 것이다. 그 도시의 분위기처럼 시크해진다던가, 자유분방해진다던가, 표정이 풍부해진다던가, 말이 험해진다던가... 작가에게 뉴욕이란 공간은 철저하게 분석적으로 파고드는 감각을 벼려준 곳인가보구나, 그런 생각을 한다. 그의 미감과 철학은 남다르게 세심하고 풍부한데 그만큼 아닌 것은 아니라고 차갑게 말한다. 날카롭고 정확한 언어로 예술과 공간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쓴 글을 찾는다면, 박상미 작가를 추천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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