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읽고 싶었었는데, 내가 알아봤을 때는 분명히 번역서가 없었다. 원서 제목을 그대로 입력하면 역서가 출간됐을 경우 그 책이 뜨던가, 작가 이름이 나오던가 뭐 아무튼 그런 결과가 나오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길래 그냥 원서를 샀더랬다. 아무래도 원서는 역서보다 읽는 속도가 현저히 더뎌지기 때문에, 이미 읽어야 하고 읽고 싶어서 쟁여둔 원서가 내 키만큼(작지 않다는 게 함정) 쌓여있는 까닭에 번역이 있다면 굳이 원서에 손을 먼저 뻗지는 않는단 말이다. 


예약해둔 「키르케」와 「침묵 박물관」을 찾아서 그냥 나오려다 한 번 둘러만 보고 가지 뭐... 진짜 들러만 본 서가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1초간 잠시 경직의 시간을 가졌다. 왜때문에 너는 원서 표지 그대로를 달아서 바로 내 눈에 띄어버린거니. 잠시 당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올라오는 신경질의 스멜. 


뭐... 아무튼지간에 있으니까 너를 읽도록 하겠노라하는 기분으로 뽑아가지고 왔달까

여러가지 이유로, 집에 어차피 사둔 게 있으니까 원서를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은 하는데 그게 언제가 될지 기약이 없는 게 문제다. 


바바야가 설화를 바탕에 두고 쓴 소설이다. 바바야가는... 러시아 민담에 나오는 마녀(비슷한 존재)인데, 이 이야기에서처럼 다정하고 보살피는 일을 하는 존재가 아니다. 외려 아이들을 잡아먹는, 어쩐지 헨젤과 그레텔의 마녀 비슷한데 훨씬 늙고 음습하게 생기고 공포스럽고 그런 느낌.


열두 살 난 마링카는 할머니가 늘 강조하는 자기의 운명이 몸서리나게 싫다. 그 운명이란 할머니처럼 죽은 자들을 저승문으로 인도하는 망자들의 수호자가 되는 것이다. 마링카는 망자들이 아니라 산 자들의 세계에서 어울려 살고 싶어하지만 야가인 할머니도, 닭다리가 달린(생명체나 다름없는) 집도 마링카의 욕망을 인정하지 않는다. 평범한 삶을 갈망하는 마링카는 결국 금기를 깨고 또래의 죽은 소녀를 저승으로 인도하지 않고 숨겨둔 채 자기의 친구로 삼는 대형사고를 치고, 이 때문에 마링카는 상상하지도 못한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고만다.


형체는 없되 먼지구름처럼 뭉게뭉게 주변을 떠다니던 욕망이 실체를 띠고 하나의 목적으로 단단하게 뭉치면서 마링카는 어린아이의 시절을 벗어나는 계단을 오른다. 삶의 양면성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아이이니만큼 충실하게 자기의 마음을 좇던 아이는 자기가 저지른 일들을 수습해보려는 단순한 시도들이 계속 엉크러지고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일들에 쫓기면서 마지못해 어떻게든 앞으로 걸어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일을 하지 않고서는, 꼬여버린 자기의 앞날을 하나도 제대로 풀 수 없게 된 마링카는 어떤 선택을 할까. 


환상적인 소재로 예쁘게 쓴 소설 같은데 은근히 무겁게 교훈을 전하는 이야기다. 어른 입장에서는 이 철딱서니가 도대체 왜 이렇게 끝까지 이기적으로 굴까, 생각하게 되지만 13-16세의 아이들은 마링카에게 절대적으로 이입할 수밖에 없을 거다. 강인한 자아와, 건강한 욕망과, 끝까지 버티는 책임감을 배워야 하는 나이에 읽으면 참 좋은 소설. 


뱀발_

마링카가 언젠가 그것이 할머니의 최선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기를, 이 책을 읽는 아이들이 언젠가 그것이 그들의 어른들의 최선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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