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의 아이디어를 좋아한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불편한 말을 들으면 보호본능과 더불어 나를 공격하는 듯한 위협감을 느낀다. 아니 이제 그런 거 그만 졸업할 나이도 되었지 않나, 생각하지만 문득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일전에 나는 정세랑 작가가 좋아, 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고보면 그 '좋다'는 표현이 참 모호하다. 호의를 대충 당의처럼 둘러입힌 말인데 기준이고 설정점이고 나발이고 모조리 감아 덮은 것 같은 말. 가끔 '좋음'을 명쾌하게 파헤칠 필요가 있지 않나. 아무튼 그 때 나의 발언이 그런 점에서 애매하고 불투명하기 짝이 없었기는 하지만 '그런 류를 좋아하는구나...' 라는 반응에 그만 아연한 얼굴을 만들고 말았다. 그런 류라니? 그런 類라는 건 대체 뭐지? 

물론 한 작가의 작품들이 어떤 일정한 톤을 띠는 경우는 왕왕 있긴 해. 그러나 이 類라는 말은 말야... 말끔하게 밝혀 말하긴 어렵지만, 그런데 좀 싸잡아 말하는 느낌이잖아? 라고 말했어야 하는데 이것은 뒷북이로다.


나름 이 바닥에선 유명한 어떤 이가 말하길, 내가 좋아하는 이 책을 좋아하는 다른 사람하고 그 책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싫어하는 사람과 하는 대화가 어쩌면 더 유익하고 풍성해질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상대방에게 예의를 지킨다는 가정하에. 그래서 내가 참 좋다고 생각한 이 책을 박하게 평가한 분들이 쓴 리뷰를 열심히 읽어봤고 그게 동의할 수밖에 없는 평가라는 것, 내가 반한 부분에 눈멀어 미처 보지 못한 지점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독서 경험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방식인 것을, 제대로 체험해 보니 알겠다. 


그러니 호의적으로 두둔하는 경우건 따갑게 비판하는 말이건 그건 제대로 분별해서 밝혀 말해야 하는 거다. 왜 좋은지 왜 싫은지 제대로 말하지도 못하면서 좋으네 싫으네 하는 것도 우스운거지... 그런데 맘잡고 말해볼라치면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진지하게 집중해서 읽어야만 한다. 대충 스토리라인따라 한 번 읽고 말고서 절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근데 그게 너무 힘드니까 아 난 이 소설 좋았어, 난 좀 별로야, 이 정도 평가(라고 할 수 있으려나)가 난무하는 거겠지. 거기에 일조한 일인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앞서 말했듯 나는 정세랑의 아이디어를 좋아한다. 이것은 어떤 부분에서 무엇이 모자란다, 고 솔직하게 쓰신 분들의 리뷰를 읽다가 깨달았고 수긍했는데 비평의 언어는 배운 적 없는 사람이라 그냥 내 전공분야의 언어를 활용해서 말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지만, 아무튼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유기성이 아직 조금 모자란 느낌이라고. 적절한 곳에 여백이 있고 여백이 아닌 곳은 긴밀하게 단단히 짜여져 서로를 붙드는 치밀함이 있어야 한다. 그 사이에 긴장과 완화가 있어야 하고 강세가 눈길을 끌어야 하지만 바탕에서 일탈해서는 안 된다. 말만 쉬운 것이라는 걸 너무 잘 안다. 색감도 훌륭하고 패턴도 창의적인데 다만 좀 성기게 짜인 텍스타일같은, 그런 부분들이 좀 느껴진다.


여하간 이제 무엇이 나를 잡아끌었는지를 잊지 않게 써두어야겠다. 


제사, 그놈의 제사. 


여기에 나오는 제사의 형식이 정말 비현실적으로 이상적이었다. 고리타분한 제사 따위 지내지 말라고 한 엄마의 제사를, 10주기가 된 시점에서 한 번은 지내야겠다고 큰딸이 제안하면서 가족들이 술렁인다. 아무렴 내가 전 부치고 지지고 볶는 제사를 지내자고 할까보냐하는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기일 저녁 여덟시에 제사를 지낼 겁니다. 십 주기니까 딱 한 번만 지낼 건데, 고리타분하게 제사상을 차리거나 하진 않을 거고요.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 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고."


굳이 하와이로 가는 이유는, 그곳이 엄마의 인생길에서 좋은 쪽이건 나쁜 쪽이건 인덱스가 되어버린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제사, 파격이다. 파격인데 근사한 파격이다. 이렇게까지는 아니어도, 제삿상에 며칠에 걸쳐도 다 먹지도 못하는 기름기 가득한 음식들만 그득그득 올려 지낼 게 아니라 모인 가족들끼리 먹고 끝낼 수 있는 정도의 음식만 마련해서, 고인께 한 사람씩 안부 인사를 올리고, 돌아가며 근황도 좀 나누고 돌아가신 분 이야기도 좀 하고, 그렇게 보내면 안 될까 생각한 적이 많았다. 나는 그닥 제사에 부정적인 입장이 아니었는데 (무엇보다 사람 모이는 걸 좋아하고 음식 가짓수 많은 걸 좋아하는 특이한 성격에 힘입은 바가 크다), 맏며느리로써 이걸 몇 년을 하다보니 여기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 싶은 거다. 적어도 제사 준비가 힘들어서, 는 내 핑계가 못 된다. 그러나 이 무의미성은 몸서리가 나게 싫다! 그런 차에 이 소설을 읽으니 눈이 반짝 뜨이지 않을리가 잇나. 쓸데없(다고 굳게 믿는 바다)는 말 좀 읖조리지 말고, 그 의미없는 차례지켜 음복하는 것 좀 생략하고, 그 시간에 둘러앉아 안 그래도 돌아가신 조상님들이 궁금한 어린 것들에게 그 분들이 어떤 분들이시고, 어떤 시대를 사셨고, 몇 분의 자손을 낳고 그 중 몇 번째가 너희의 할아버지(내지는 할머니)시고, 무엇을 직업으로 삼아 사셨는지... 그런 살아있는 이야기를 해 주시고, 그러면 좀 좋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이지. 


너무 이상적인 얘기만 썼나.

물론 어떤 이들에게는 제사라는 형식 자체가 허울로 느껴지고 극심한 노동이라는데 이견을 제시할 생각은 없다. 집안 여자들의 노동력을 쪽쪽 빨아 기어코 각혈하게 하는 그 제삿상이 그리도 필요하면 필요한 자가 직접 할 일이지 안 그런가. 내가 제사를 큰 거부감없이 수용하게 된 건 모두가 사이좋게 노동하는 분위기를 만든 시어머님의 노련함이 한몫했지만, 세상 시어머니가 다 그럴리도 없고 말이지. 아무튼 너무 이상적인 소리라도 누구든 계속하면 거기에 말을 덧붙일 사람은 또 늘어날거고 계속 그렇게 이게 더 좋다, 저게 더 좋다, 그러다보면 점점 진짜 좋은 쪽으로 가게 될 거야. 나는 그렇게 믿는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라는 작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나는 너무 알 것 같아서, 나는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는 아니고 그곳에서 이곳으로 뛰어내린 1인에 불과하지만 그 마음이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정세랑의 다음 책을 기대한다. 뒤끝 작렬하는 나라서, 내게 그 말을 했던 이에게 이 책을 내밀며 정세랑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여기에 방점을 찍으며)의 소설만 쓰는 작가가 아니야, 그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잘근잘근 씹어 삼킬까, 그냥 뱉을까를 고민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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