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작정하고 리뷰를 써봐야겠다, 생각했었는데. 현실은 기대만 배반하는 게 아니라 종종 결심도 배반합니다... 그럴리가 있나요. 그냥 내가 게을러터진거지.


어쨌든! 이것도 기억에서 새하얗게 바래기 전에 어제 막장을 덮었으므로 비교적 생생하게 남아있을 때 씁니다.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놓고 짜여진 이야기입니다. 1860년대 중반, 어느 가족이 섬으로 이주하는 장면으로 시작돼요. 

주인공 소녀 페이스의 아버지는 목사이자 자연과학자로, 어떤 중대한 과학적 발견을 했지만 사기로 판명되어 과학계에서 퇴출될 추문의 주인공이 되었고 페이스는 아버지가 누명을 썼다고 굳게 믿고 있지요. 이 가족 구성원들 중에 유일하게 아버지를 지지하는 단 한 사람이죠. 어쨌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스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한 불안과 의혹은 결국 아버지의 기밀 서류와 연구 자료에 손을 뻗게 만듭니다. 

단순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닌 것이, 페이스는 아버지처럼 과학자의 심장과 영혼을 가졌기 때문이죠. 그게 페이스의 불행입니다. 이 시대는 여성의 지적 호기심과 열망을 허락하는 시절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나 결국 아버지의 비밀에 손을 댄 사실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게 되죠. 아이러니하게도 그 일로 인해 페이스는 오히려 아버지의 비밀 연구에 한걸음 크게 들어섭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페이스는 뭔가 아버지를 돕는다는 보조적인 포지션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만 느닷없이 아버지가 변사체로 발견되면서 페이스는 과학자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섬사람들은 아버지가 자살했다고 믿지만, 페이스만이 아버지는 살해당했다고 굳게 믿고 살인자를 찾고자 노력해요.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노심초사하며 감춰 온 비밀의 정체를 알게 됩니다. 

아버지가 비밀리에 연구하고 있던 것은 거짓말 나무라는 정체모를 식물이었습니다. 정확히는 이 나무의 생물학적 정체성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장 메커니즘을 이용해 자신의 궁극적인 과학적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하는 것이었지만요. 


이 나무는 거짓말을 먹고 자랍니다. 그냥 거짓말을 속삭여 주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말을 반 현실로 만들어야 돼요. 나무에게 들려준 거짓말을 현실처럼 사람들 마음속에 뿌리내리게 해야만, 사람들 속에 그 거짓말이 현실로 녹아들면 그제야 자양분으로서의 거짓말이 완성되는 거죠. 진짜 대단히 환상적이고 음습한 상상 아닌가요. 


거짓말 나무를 이용해 자신의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주인공의 이름이 페이스 Faith인 것도 아이러니합니다. 페이스는 진실을 알기 위해 거침없이 거짓을 파종해요. 


거짓말은 불과 같다는 걸 페이스는 알게 됐다. 처음에는 보살피고 연료도 줘야 하지만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해야 한다. 살짝 바람을 부쳐주면 이제 막 피어오른 불길이 커지겠지만 너무 세게 부치면 꺼져버릴 것이다. 어떤 거짓말들은 처음부터 기세 좋게 퍼지면서 신나게 타탁거리며 타올라 더 이상 연료를 줄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 거짓말은 나름의 생명력과 형태를 가지고 홀로 커져가면서 아무도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 -366쪽


페이스는 자신의 치맛단을 내려다보면서 부인하지 않았다. 그녀는 몇 개의 암시와 침묵만을 자양분으로 하여 자신의 거짓말이 쑥쑥 자라 그녀 앞에서 새로운 형태를 갖춰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침묵 그 자체는 칼처럼 교묘하고 잔인하게 이용될 수 있다. -396쪽


그래서 페이스는 결국 진실을 쟁취하는가, 그게 그녀가 원하던 바로 그 진실이 맞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면 답은 yes입니다. 그런데 인간사가 늘 그렇듯, 우리는 항상 구하던 답만 얻어갈 수는 없는가봐요. 페이스도 마찬가지로 알고 싶지 않았던, 가능한 한 몰랐으면 더 좋았을 추악한 진실까지 알게 됩니다. 원했던 진실과 더불어 아픈 진실도 함께 가져가야 하는 거고 평생 지고 살 수밖에 없게 되는 거죠. 

어쨌거나 고통스러운 진실 추적의 과정에서 페이스는 자신의 소명도 함께 발견합니다. 시대와 싸워야 하는 지난한 일이지만 누군가는 먼저 걸어야 할 길이고 빛을 밝혀줘야 할 길이라는 사실도요.


이 소설을 다 읽으면 판타지적 요소가 몹시 강한 이 책이 엄청난 여성 서사처럼 느껴져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구구절절 밝혀 쓸 수는 없는데 아무튼 그렇습니다. 다만 줄거리와 큰 관계가 없는 것 같아서 하나만 쓰자면 페이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남자들의 구애를 은근히 즐기는 듯한 어머니를 힐난하자 어머니가 평소엔 들을 수 없던 교태없는 날 것 그대로의 목소리로 이렇게 말해요.


"넌 내가 허영심에서 그랬다고 생각해? 난 우리 가족의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는데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내 외모밖에 없어! 네 아버지의 죽음이 사고였다고 말해 줄 재클러 박사가 필요했단 말이야. 그리고 클레이 씨가 사진을 수정해서 영국 본토에 떠도는 소문들을 잠재우려고 했고.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의지하는 예쁘고 부유한 과부 역할을 했던 거야. 언젠가는 고마운 마음에 그들과 결혼할 거라는 기대를 갖게 하려고.

여긴 전쟁터야, 페이스! 남자들만 전쟁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마찬가지야. 세상은 우리에게 무기도 주지 않고 싸우는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된다고 하지. 하지만 우리는 싸우지 않으면 이대로 죽게 될 거야." -434쪽


이게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던 어머니의 마음이 참 아파요. 자립할 수 없게 만들어놓고도 알아서 살아나라고 여자들을 밀어부쳤을 그 시절을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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