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마음이 완전히 동동 떠서 갈피를 못 잡고 방랑하는 와중이라 책은 읽어도 눈으로 읽고 마음까지 머리까지 타고 올라오는 경우가 많이 없다. 슬프다. 시간은 시간대로 에너지는 에너지대로 다 투입하고 본전도 못 찾는 느낌. 로맨스 소설을 즐겨읽지는 않지만(삐딱한 심성 반영이랄까. 그래 그땐 세상 모든 게 다 긍정적이고 러블리하겠지. 로맨스가 지나가고 나면 남는 건 현타뿐... ㅋㅋㅋ 그렇다고 연애반대주의자는 아니에요 핏 뭐 나도 한때는 그런 시절 있었으니까 -_-;), 가끔 쉬어가는 기분으로 책과 책 사이에 끼워 읽곤 한다. 일종의 리프레쉬먼트.
한 번에 여러 권을 동시에 번갈아가며 읽는 몹쓸 습관 덕분에 모드 전환을 위해서 가운데에는 꼭 청소년 소설 또는 어린이 문학, 내지는 잡지... 그리고 로맨스 소설을 종종 읽는데 이렇게 피곤한 로맨스 소설 세상 오랜만이었다.
나쁘지 않아... 나쁘진 않은데 너무 마음이 피곤합니다(감정이입 잘하는 독자주의보).
왜 남주와 여주가 다시 만나 해피엔딩을 이루기까지 이토록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소모되어야 하는걸까. 모르겠고요...
제목 그대로 12월의 어느 날 피곤에 찌들대로 찌든 우리의 여주인공은 관광객에게는 런던의 명물이자 일반 시민에게는 피로도 가중의 원인이기도 한 2층 버스에서 어떤 남자를 우연히 발견한다. 잠깐 멈춰 선 정류장에서, 2층에서 남자를 내려다 본 여자와 문득 고개를 든 남자의 시선이 얽히고 둘의 머릿속에선 아마도 만화스러운 번개 아이콘과 함께 계시적인 깨달음이 온다. 여자는 마음 속으로 남자에게 당장 이 버스에 올라타요, 라고 소리를 지르지만 아뿔싸, 남자가 버스에 올라타서 그녀를 붙잡기 전에 버스는 떠나버리고 그들의 인연은 여기서 이만 쫑.
하면 소설이 안 되니까
작가는 그로부터 대략 1년 남짓 후 남자를 여자의 절친의 남친으로 만들어 데려온다. 나빴습니다. 잔인하고 세속적인 설정... 재미와 더불어 굉장히 앞으로 이야기의 여정이 힘들어질 것이 너무나 비디오다.
여주인공의 천진난만하고 구김살없는 절친은 그와 여주인공이 아주 친해졌으면 좋겠다는 난감한 바람을 시원하게 드러내고 여주인공은 절친에게 너의 남친이 일년 전 나를 미치게 했던 바로 그 버스보이야... 라는 말은 내가 죽어도 못해! 안할거야! 라고 맹세하며 바야흐로 스토리는 난감함의 끝판왕을 만나러 산을 탄다...
아무튼, 뭐, 로맨스 소설의 결말이 대략 그러하듯 장르가 이미 스포일러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까닭에 어찌 흘러갈지 방향성은 보이지 않습니까. 될놈될, 만날사람만날... 이런 천연덕스러운 멘트가 어울리는 내용이라는 게 민망쩍을 정도로. 대략 모두가 행복해지는 설정이어서 괜찮다. 누군가 지독히 불행해짐으로써 다른 누군가가 행복해질 수 있는 관계망은 너무나 피곤해(나이 탓이다...)
사건의 배경이야 크리스마스 직전이지만 내용상으로는 불과 며칠 전에 지나간 밸런타인 데이와도 꽤 잘 어울린다. 풍파를 몇 번씩이나 겪는 커플의 이야기지만 로맨스라면 환영이예요! 라는 분들께 추천. 그런데 또 사실 역경이 없는 로맨스라면 그건 그거 나름대로 너무 어린애들 얘기 같아서 좀 풋내 나긴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