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 아니라 재작년처럼 월별로 읽었던 책들 정리하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서 다른 방식의 연말결산(?)을 찾아봤다. 나의 최애 bookblog MMD에서 Anne이 쓰는 것처럼 분야별로 탑 몇권만 뽑아보기로. 


소설은 93권을 읽었다. 이건 내가 아는 사람들한테는 전부 알려야 해, 싶게 혼자 알기는 너무 아까운 좋은 이야기들도 있었고 이거 읽느라 쓴 내 돈도 돈이지만 시간부터 돌려내라고팠던 책들도 있었지만, 그 중에서 정말정말정말 좋았던 책을 순전히 개인적 순위를 매긴다. 


1. 이거 진짜 고민했는데, 둘 중의 뭘 첫째로 올릴까를... 결국 이 책에 손을 들어줬다.



배크만의 소설을 이전에도 몇 권 읽었는데, 『오베라는 남자』는 굉장히 좋았었고,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는 살짝 내 기대에 못미쳤던지라 만약 한국에 있었을 때라면 과연 찾아 읽었을까 의문이 들었더랬다. 한 권의 책과 만나는 인연도 사람 못지않게 보통 연은 아닌 거다. 동네 도서관의 그닥 크지 않은 한국 책 서가에서, 그나마 낯익은 작가의 이름을 만났을 때 나는 너무 반가워서, 너무 신간이라 대출시스템에 제대로 찍히지도 않는 이 책을 사서에게 첵아웃해달라고 들고 갔고, 사서는 누구 책이야? 물어봤다. 배크만! 제목은... 어... 모르겠는데... 뭐... you and us 그럴 거 같은데? 라고 하니 멋쟁이 사서는 윙크를 날리며 인조이!를 외치고 책을 내주었던, 그런 추억이 있다.


아니야 이건 인조이할 수 있는 책이 아니야, 아니라구. 울컥하는 마음이,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해서 얼마나 읽기가 힘들었는지. 누가 앞에서 공연한 것도 아닌데, 책을 덮고 기립박수를 쳐 주고 싶은 그런 책이 얼마나 될까. 


하키말고는 별볼일 없는 쬐그만 마을이 있다. 그런데 이 하키 팀의 주전 선수가 강간을 저질러 팀원들이 떠나고 팀은 해체 위기를 맞는다. 팀이 분열 직전에 이르자 사람들은 범죄를 저질러 모든 것을 망친 가해자보다, 생존하려 애쓰는 피해자를 입 모아 비난하기 시작한다. 너 때문에 우리 마을이, 모든 게 다 망하게 생겼다고(이거 어디서 되게 많이 본 상황 아닌가?)

단장은 어떻게든 팀을 살려보려 동분서주하고, 타인의 위기를 자기의 기회로 이용하고자 하는(이런 인간도 되게 많다)이도 나타난다. 누군가가 어디에서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우리와 당신들로 패가 갈라진다. 정말, 정말 이거 너무 익숙하지 않나. 


그런데 이 소설의 훌륭함은,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내가 가장 감탄한 훌륭함은 작가의 목소리와 눈높이에 있다. 배크만은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것을 펼쳐보이고 시종일관 담담건조하다. 피해자를 지나치게 동정하게 하지 않고 가해자를 죽일 놈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깃발을 어디에 꽂느냐에 따라 우리는 또 언제든 우리와 당신들로 끝없이 나뉠 수 있다. 너와 나를 분간하는 벽은 누가 세우는 것이고 누가 지탱하는 걸까. 무릎을 구부려 앉는 걸로도 모자라 납작하니 엎드려 약자를 보듬는 문장과 이야기를 쓰는 이 작가를 정말 사랑하지 않기는 힘들다. 


인생은 우라지게 희한한 것이다. 우리는 모든 시간을 쏟아부어가며 인생의 여러 가지 측면을 관리하려고 하지만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인생의 대부분을 규정한다. -595쪽


2. 


불치병이 걸린 어린 아들이 있는 아버지가 있다. 그는 용병으로 일하고 있는데, 휴가를 나가기 바로 전날 무시할 수 없는 대가를 제시하는 어떤 임무를 제안받는다. 그 임무란 콩고에 잠입해서 어떤 인류학자와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보자마자 이것이구나, 하고 알아차릴 수 있는 어떤 미지의 생명체를 사살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느닷없이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유서 아닌 유서를 따라 행동을 개시하면서 쫓기는 처지가 되어버린 어느 일본인 약대생의 이야기와 맞물리면서 숨쉴 틈도 없이 마구 굴러가기 시작한다. 책의 중반쯤 가다보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멈출 수도 없게 되어버리는데, 무사히 콩고에 들어간 예거 일행과 미지의 생물이 조우하는 순간에 이르면 급정거당해 정신이 튀어올라 혼미해져버린다. 이게, 이런 걸 묻는 이야기였어? 


대개의 경우 어떤 소설을 읽고 나면 그냥 재미있었다, 에서 끝나기도 하고 '...' 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엔 머릿속이 뒤흔들리기도 하는데 이 소설이 그렇다. 사람이란 게 나름의 틀이라고 할까, 어떤 모양이건 간에 제가끔 사고의 프레임이라는 걸 갖고 있게 마련인데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머리가 너덜너덜해지는게 강제로 기존의 틀을 철거당한 그런 느낌이 든다. 시대가 바뀌었고, 바뀌고 있고, 케케묵은 옛날식 사고구조로는 이제 이런 이슈들에 대해서 생각할 수도 없는 거야. 생각이 들어앉는 머리통 자체를 리노베이션을 하라고. 정도의 선언문적인 이야기였다고나 할까... 아무튼 굉장히 재미있으면서 골이 띵하면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런 책이다. 


"남은 90퍼센트의 병사를 살인자로 만드는 것도 사실 간단하다는 사실이 알려졌어. 일단은 권위자에 대한 복종이나 소속 집단에 대한 동일화 등으로 개개인의 주체성을 빼앗았지. 그리고 또 하나, 죽일 상대의 거리를 멀리 두는 것이 중요해." -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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