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 이도우 산문집
이도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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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 소설이란 말 정말 예쁘지 않은가요.

엽편소설이라 부르는 이 장르는 단편보다도 훨씬 짧아 나뭇잎에 다 쓸 수 있을 정도로 짤막한 이야기를 부르는 말입니다. 저는 처음 작가의 전작(맞는지...)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에서 처음 만났어요. 해원의 이모와 책방지기 은섭이 나뭇잎 소설 배틀을 벌이죠. 세상에 뭐 이렇게 사랑스럽고 예쁜 결투가 다 있나 싶은 그런 배틀입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이도우 작가의 산문도 좋지만 갈래 갈래 꽂아 바싹, 납작하게 잘 마른 나뭇잎들처럼 박혀있는 나뭇잎 소설들이 백미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짧디짧은 몇 페이지의 이야기가 전부인데 그 안에서도 계단을 올라가고 언제 내려가야하나 조마조마하다가 시원하게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는 그 잔재미가 다 살아있다는 게 참 재미있어요. 이야기의 재미는 사람의 마음을 움켜잡았다 천천히 놓아주는 순간에 전신에 퍼지는 안도의 한숨과 같이 번져나가는 게 아닐까 싶어져요.

화분을 배달하려고 전화를 건 기사가 알아볼 만한 지형지물을 알려달라고 하자 느닷없이 큰 나무의 나뭇가지, 꼼짝않고 서 있을 어떤 트럭 등을 나름의 랜드마크라고 생각하여 설명하며 허둥지둥하는 주인공에게 과연 화분이 제대로 배달될 것인지,
소설 속 주인공이 불렀던 노래를 직접 만들어 본 독자는 이제 이 노래를 어떻게 할 것인지,
깨질 것 같은 분위기의 독서모임에서 매니저 대신 분위기를 쇄신해보고자 하는 회원이 올린 이달의 글감은 무엇일지.
책집사라는 건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어쩌면 이 작은 이야깃거리 하나가 밑그림이 되어 나중에 길고 풍성한 이야기로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도 합니다.

여름과 가을보다 봄과 겨울에, 마음을 여미거나 풀어놓기 시작하는 그 때 읽으면 참 좋을 것 같아요. 딱 그 정도로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글들이라, 여름엔 녹아버릴 것 같고 가을엔 그냥 바람에 휩쓸려 갈 것 같거든요. 


그날의 경험 탓인지 같은 풍경을 다른 버전으로 다시 바라보는 일을 좋아한다. 다양한 사람과 번갈아 나누는 대화보다 한 사람과 여러 번 반복해서 나누는 대화가 그렇지 않을까. 같은 위치와 각도에서 낮과 밤 사진을, 여름과 겨울 사진을 꾸준히 찍다 보면 어느새 그 대상을 사랑하게 된다.
소설을 쓰는 건 그래서인 것 같다. 정든 대상을 혼자서 보고 느끼기엔 아쉬워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마음. 기왕 들려준다면 뼈대를 세우고 살을 붙여 '우리 마을에 작고 아담한, 무슨 사연이 숨은 듯한 폐가가 있습니다. 그 폐가를 어떤 청년이 빌려서 책방을 열었습니다.'라고 쓰고 싶었다.

내게 살아가는 일은 늘 혼자 정드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빈 시골집과 사귀고 영하로 떨어지면 나타나는 논두렁 스케이트장과 사귀지만, 그들은 나를 알 리 없고 인식조차 하지 않는 존재들이라 실연당할 일도 없다. 아무도 모르는 그 짝사랑을 글로 옮겨서 고백하는 건 역시 같이 정들었으면 하는 마음 탓인가 보다. -27쪽


방대한 영토가 필요한 세계는 영화가 아니라면 구현하기 어렵지만, 책 속에 등장하는 빵집이나 세탁소, 책방 같은 공간은 같은 간판을 달고 우리 동네 골목에 나타나도 그리 이상할 건 없다. 비슷한 상상을 하는 이들과 독서 모임 하듯 둘러앉아 실제로 방문하고 싶은 책 속 가게들의 리스트들 적어본다면 즐거울 것 같다. 검색하면 전화번호와 위치가 뜨는 가상의 어플을 만들어도 재밌겠고, 가게 모습이 팝업처럼 솟아오르는 그림책이 있어도 소장하고 싶다. -189쪽


때로는 한정된 공간에 묶여 있는 것이 아무런 방해나 한계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옥중에 몇십 년을 갇혀있어도 기어이 시와 산문을, 책을 쓰는 이들이 있듯이. 조지 오웰이 말했듯 '감금을 견딜 수 있는 건 자기 안에 위안거리가 있는 사람들'이고, 그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던 셈이다. -208쪽


좋은 시절은 결코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 정말 지겨운 나날이고 사는 게 엉망진창이라고 투덜대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때가 지나면 비로소 알게 된다. 돌아보니 참 좋은 날들이었구나, 그땐 왜 몰랐을까 라고. 좋았던 시절은 그 무렵엔 느낄 수가 없지만, 한 시절에 이별을 고하려는 순간 새삼 좋은 날이었음을 알려주어 고맙고 서글프게 한다. -288쪽


언젠가 지쳤구나 싶을 때 은퇴를 하고, 가진 것을 팔아 작은 트럭을 장만해 바닷가 마을로 가는 모습을 그려본다. '나뭇잎 소설 라이팅 트럭'이라 쓴 간판이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반갑게 커피도 따라주고, 주문받은 짧은 이야기를 써서 종이를 돌돌 말아 리본으로 묶어 건네고 싶다. 답례는 조그만 라탄 바구니에 넣으면 된다.
어쩌면 나는 그들에게 '제시어'를 달라고 청할지도 모른다. -249~250쪽 


뱀발! 소설집이 아니라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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