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원하건 원하지 않건. 




책을 아무때나 내키는대로 사모으다 보면 이 순간은 반드시 닥쳐온다. 고민과 결단과 후회를 반복하는 시간들. 

배송비는 두 눈 질끈 감고 못 본 척하고 쌓아두기 시작한 책더미가 정신 차리고 보니 이걸 어째야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남편의 눈길은 등따사롭기 그지없고 아이들과의 신경전도 장난이 아니다. 엄마, 이 책은 안 돼 못 버려. 이 책은 내가 처음 *#@$( 해서 @(#)$# 하면서 읽었기 때문에 못 버려. 이 책은 여기서 어떻게 저떻게 해서 요롷게 조롷게 읽었기 때문에 못 버려. 일이 이러하다보니 이삿짐에 들어갈 책을 추리는 일은 지나간 시간을 되새김질하는 것을 지나쳐 무엇을 기억할지를 선택하고 무엇을 버릴지를 결단하는 고통스러운 순간이 되어버린다. 문제는 온 가족이 각자 나름의 힘겨운 선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지.


아직 이곳에 얼마나 더 머무를지는 결정되지 않은 이웃 친구가 본인이 기꺼이 사겠다고 했지만... 그렇게 처분할 수가 없다. 생활용품이었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쉽게 그러마 했을 거다. 하지만, 책은... 그게 아니잖아요. 

나한테 좋았던 책이, 우리 아이들이 좋아했던 책이 그들에게도 좋으면 기쁘겠지만 그러지 못할 절반의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하니까. 그냥 받은 책이 재미없었으면, 마음에 안 들었으면 읽다 말아도 그만이지만, 뭐가 들었는지 어쩐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얼마간의 돈을 주고 샀는데 영 별로면... 그건 나도 슬프고 책도 슬프고 중고가라고 해도 돈 주고 산 사람은 더 슬퍼.


그러니까 그냥 (기쁘게), 나한테는 좋았는데 너도 좋아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줄 수밖에 없는 거다. 딱 그 책을 원하던 사람에게 맞춤한 값으로 처분할 수 있으면 최상이겠지만 그게 안 되면 차선은 그저 나눔밖에. 주는 사람도 마음에 부담없이 받는 사람도 부담없이. 


그건 그렇고 도대체 이걸 다 싸 짊어지고 가면 거기엔 다 꽂아넣을 자리가 있긴 했던가... 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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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7-08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쟁이들에게 책 줄이기야말로
삶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에
하나가 아닐까 추정해 봅니다.

주기적인 이사가 강제적 책정리
에 아주 도움이 되더군요...

라영 2020-07-09 07:44   좋아요 0 | URL
정말 그렇습니다. 이걸 다 끌어안고 갈 수도 없고 내려놓자니 미련이 시야를 가리고... 한편으론 이렇게라도 해야 나한테 알짜배기만 남기는 거지, 위안을 삼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