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가 마음에 남고 머리에 남았을 땐 분명히 이유가 있다. 딱 한 군데의 접점에서만 만나고 잊혀지기에는 파고든 흔적이 생각보다 깊게 남았던 것들, 그냥 그런 게 있었지, 왜그랬는지는 모르겠어도 그 책이(영화가) 한참 잊혀지지가 않았어. 그렇게 말하고 덮어두었다가 또 어느날 문득 다른 뭔가를 끄집어낼때 딸려 나온 그것을 보고 "아 맞아 이거 그 때 참 인상깊었었는데" 말하고 또 한참 잊어버리고... 그런 일들을 많이 하지 않을까,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이 책에도 (바로 그 순간 그 일에 대해 생각하고 이유를 밝혀내거나 감정을 표현하고 정리해야 할 일들에 대해 게으름을 부리는...) 정확히 그런 습성을 짚어낸 대목이 나온다. 


"송우영, 들었지? 잘했다잖아. 네가 꾸물거리다가 편지 줄 타이밍을 놓쳤어 봐. 분명히 너는 다락 깊숙한 곳에다 편지를 넣어 뒀을 거야. 그러곤 시대에 뒤떨어진 뇌를 달고 있는 덕분에, 금방 잊어버렸겠지? 한 10년쯤 지나고 다락 정리를 하다가 편지를 발견하고는 "어, 이게 뭐지? 어머니가 쓴 편지네?" 하고 열어 보면서 펑펑 울 거야. 그러곤 또 넣어 두겠지, 다락 깊숙한 곳에다가. 그때쯤이면 더욱더 시대에 뒤떨어진 뇌가 되어 있을 테니까. 10년 후에 또 그러고, 10년 후에 또 그러고... 그러다가 끝나는 거야.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 감정이나 편지는 다락에 넣어 두는 게 아니야. 무조건 표현하고 전달해야 해. 아무리 표현하려고 애써도 30퍼센트밖에 전달 못 한다니까. 아, 내가 말이 너무 많죠, 미안, 차연 씨."


불과 며칠 전에 인용문으로 한 번 썼던 대목인데 그만큼 확 치고 들어오는 말이어서.

나의 뒤떨어진 뇌는... 글쎄, 아마도 내가 이런 책을 읽었었던가? 이 책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서 여기다 베껴적어놓기까지 했던거지? 이러다가 결국 또 까먹어버리고, 까먹어버리고... 그럴 게 뻔하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이런 식으로라도 적어놓지 않으면 분명히 또 까먹을 거다. 그러니까 이것은 내 식의 책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인 것이다. 어떤 책과 만날 때, 사람마다 그 책과 만나는 부분은 다 다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리뷰를 읽어보면 즐겁기도 하고, 가끔은 뒤통수가 얼얼해진다. 내가 몰랐던 길로 걸어가 그 책을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그 책을 보게 된다. 백 사람이 읽었으면 백 가지의 길이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혼자 공상한다. 


엉겅퀴 가시 같은 게 토도도독 뻗어나와 손바닥을 찔러대기도 하고 손바닥이 튀어나와 냅다 머리통을 후려갈기기도 한다. 혹은 그냥 하드커버로 둘러싸인 종이묶음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 같은 한 권의 책이 몽실몽실한 털뭉치처럼 뭉글거리며 무릎에 오래 머물러 있기도 한다. 물론 그냥 망상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책이라는 게 어떤 감각을 강하게 환기시킬 때면 조금 충격을 받는다. 그저 텍스트인데 그냥 문자열은 아니구나. 작가들은 다 천재같다.


이 책의 뭐가 그렇게 기억에 오래 머무르게 했는지는 한참 나중에 알았다. 나만 그랬는지 몰라도 이 책을 보다가 굉장히 유명한 어떤 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도 생각했을 것 같다. 분명히 소재면에서의 유사성을 마음에 두지 않을 수 없었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난이라든가 비아냥(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했나)... 이런 것들이 분명히 튀어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감수하고서도 '유사한 재료를 썼을지언정 맛은 다르다'라는 확신을 갖고 써내려갈 수 있는 마음, 스스로에 대한 믿음. 그럴 수 있는 저력. 마음 속에 갖고 있는 어떤 뿌리, 끈기, 바탕, 인내심, 힘, 뭐라고 부르든, 그런 것들의 근원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항상 좋은 말만 들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도 그냥 계속할 수 있는 힘. 지금 그런 게 필요해서 그런가, 


김중혁 작가에게 계속 쓰게 하는 원동력은 뭘까... 그냥 좋다, 하고 싶다, 좋아하고 잘 하는 일이라서... 이런 거 말고,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그것을 견디고 참아내서 결국 무엇을 해내고야 마는 걸까. 잘 안 되는 것 같고, 뭘 해도 안 풀리는 것 같고, 다 집어치우고 싶을 때 말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실 안다. 그 어떤 순간에도 그냥, 계속한다는 것. 될 때에도 안 될 때에도 그저 계속하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는 것. 


하루가 열리고 닫히는 걸 멍하니 바라보면서 제3자마냥 관조하고 있는 순간을 갑자기 제대로 바라보는 순간 발 밑에서 뚫리는 구멍, 그런 것들이 던져오는 흐리멍덩한 회색의 감정들. 항상 뭔가를 하고 있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우울감. 그런 무의미해 보이는 시간 속에서 심지어 그 무의미한 일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시간을 쪼개 빠듯하게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프로세스를 수행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 이게 앞뒤가 맞는 말이기는 한 건가 제대로 한 번 생각해 보지도 않고 일단 자판을 쳐서 머릿속을 비워내야 좀 살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지금이 어쩐지 다락에 쑤셔넣는대신 감정을 쏟아내고 있구나... 라는 기분이 드는데 이게 뭔가, 도대체 나는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건가 전혀 모르겠지만 장맛비속에 양팔을 펄럭이면서 신나게 비 맞은 기분이어서 일단은 좀 상쾌하다. 


덧. 물론 이것도 별로 감정을 '잘' 쏟아내는 방식이라고는 못 하겠지만 그래도 덜 유해한 방식이지 싶다. 남에게 피해가 안 가는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간혹 뱉어내고, 토해내는 방법도... 잘 가르치고 잘 배우면, 좀 낫지 않을까? 뭐가 나은 거냐고 묻는다면... 그냥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들에 좀 힘이 덜 든다는 뜻으로 낫다고 하고 싶다.


덧2. 그리고 또 생각난건데, 

우주에서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그러더라).

그런데도 이일영은 계속해서 말한다.

우주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도 송우영과 강차연과 세미(성이 기억 안난다)는 어머니의 편지를 읽은 소리를 우주로 날려 보내기로 한다. 아마도 이 소리들은 만날 수 없을 것이고 그들도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지만, 그래도 그 마음을 그대로 행동에 옮긴다. 실제로는 무의미한 행위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실행에 옮기는 인간의, 대부분의 우리의 마음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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