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계절이니만큼 상실의 소식이 많이 들려온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주변에서도 있었다. 안됐구나, 라는 생각은 했지만 정말 안타까울 정도로 아무런 감정적 동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은 파도조차 가라앉은 바다와 같았다고나 할까요... 라고 쓰면 네가 인간이냐, 싶어 뵐까봐 소심한 변명을 한 마디 놓자면 생전의 그 분이 참 상처를 많이 주셨다. 내게도 내게 너무너무 소중한 어떤 사람에게도. 스스로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아무렇지 않을수도 있나 의아했는데 가만 보니 나와 돌아가신 분의 마음 사이에는 어떤 종류의 연결도 없었던 거다.

 

엄마 뱃속에서 나와 탯줄을 끊은 아이의 배에도 (아이 입장에선) 원치 않는 단절로 인한 상처가 남아 한동안 아물도록 보살펴야만 하는데, 그건 열 달 가까이 끊임없이 생존을 위해 엄마와 어떤 종류의 교류를 해야 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이어지는 줄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달고 살며, 예전에 달고 있었던 줄이 탯줄 하나 뿐일까...

짧지 않은 시간을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갯수의 줄들을 달게 되는지, 보이지 않지만 무게만큼은 꽤나 나갈 것 같은 교류를 위한 가늘거나 굵은 끈들. 인위적으로 끊거나 자연적으로 절단되거나 상관없이 줄을 떼어낸 자리엔 상처가 남을 수밖에 없다. 굵고 두껍게 뻗었던 줄들이 뽑혀나간 자리는 얼마나 상처가 깊을 것이며 흉은 또 얼마나 오래 갈 것인지. 흉이 깊게 난 만큼 상처를 들여다 볼 때마다 그 순간의 통증이 다시 떠오르지 않을 재간이 있을까.

상처가 아무는 동안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아픔으로 옆에 있는 이들에게 괜한 성미를 부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쓸데없이 감정의 낭비를 하게 되는 건 아닐까. 벼라별 생각을 다 한다. 튼튼한 줄 알았던 어떤 관계들이 예상치 못한, 그러나 짐작가는 이유들로 헐거워질때 별로 튼실하지 못했던 이성이 마구 흔들리곤 한다.

 

나이먹는게 그다지 반갑지 않구나, 라고 처음 느꼈던 시점부터 이런 종류의 통증을 감당하는 법을 배웠던 것 같다. 그럭저럭 감당하고 현장에서 감정을 수습하는 방법은 얼치기로 배웠지만 천천히, 깊게 애도하는 방법은 전혀 배울 기회가 없었다. 그런 면에서 외국의 장례 문화는 배울 점이 많지 않은가... 생각한 적이 있었다. 돌아가신 분을 생각하며, 그 사람이 좋아하던 것도 같이 준비하고, 잘 보내고, 잘 남아있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모두 그를 마음으로 애도하는 그런 것들이 좋아보였다.

먼 고향에 따로 모셔놓고 가네마네 쌈박질하지 말고 도시에 묘지공원같은 걸 조성해서 자주자주 찾고 기억해주면 더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하고. 삶에 대해 좀 더 진지해지는 효과도 있지 않으려나, 우리나라 정서상 이건 힘들까. 나는 좋던데.  

세상에 딱 하나 무엇, 절대적으로 옳은 정답이란 건 없겠지만, 뭔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더 나은 방법을 찾아보고, 그렇게 천천히, 인간적으로 더 나아지고 좋아지는 방식의 발전에 대해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느닷없이 써 보는, 몸도 피곤하고 부모님들 편찮으시다는 소리에 괜히 축 처지는 오후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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