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도 곰돌이가 있다.

 

안타깝게도 순남이 연남이 술빵이처럼,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애정전선을 과시하고 있는 어깨 으쓱한 곰돌이라고는 못 하겠지만, 어쨌건 31년간 쭉 나를 따라다닌 곰돌이가 있다. 음.... 옷장 안에.

정확한 상품명은 이렇다. 당시에 어린이 대상 잡지에 주로 실렸던 광고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하트-하트-베비(베이비 아님)-베어.

 

이 곰인형은 세 가지 모델로 나왔었다. 아마도 여아와 남아로 갈라놓은 게 분명한 베이비 블루와 베이비 핑크색의 털과 깔맞춤한, 슬리핑 수트라고 불러야 맞을 원피스 스타일의 잠옷을 입은 아가곰들과 얘네들보다 쬐끔 더 덩치가 크고, 굳이 성별을 드러내지 않은 옅은 베이지 브라운 색의 털에 아이보리색 바탕의 아주 연한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잠옷과 세트로 요정모자 같았던 잠옷 모자까지 쓰고 있는 곰(얘는 하트 베어)까지, 이렇게 세 종류의 디자인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자신없지만, 가격은 일반 베어가 18,000원이고 베이비 베어가 각 12,000원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곰돌이의 가장 큰, 유니크하고 독보적이며 차별성 두드러지는 점이라면 역시 심장이 뛰는(...) 소리와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었겠지.

 

그 곰인형 광고가 아이들 마음을 꽤나 들썩였던 건 틀림없다. 당시의 나는 제법 많은 집을 무단방문하는 무법자 스타일의 (민폐끼쳐 죄송했습니다 어머니들...) 동네 친구였는데, 거의 모든 집들에 그 사랑스러운 곰들이 한 자리 차지하고 있곤 했다. 남들이 다 가져도 나는 못 가질 수 있다는 걸 전혀 이해하지도 이해할 생각도 없었던 저만 아는 어린이였으므로, 나는 수시로 엄마를 졸라 댔다. 엄마, 하트 베어 사 줘. 얘네는 심장도 뛴단 말이야. 진짜 곰이라구.

엄마는 귀에 뭐라도 덮어놓은 사람처럼 내 말에는 아무 반응도 안 했다. 엄마는 계모가 틀림없어. 무슨 엄마가 딸이 이렇게 소원을 하는데 들은 척도 안 할 수가 있어. 나쁜 엄마야. 옛날 이야기에나 나오는 그런 못된 여자야. 등등의 식으로, 유치한 헛바람이 든 열 살 좀 넘은 어린이는 할 수 있는 소심한 반항은 다 했었을 것이다.

 

그 반항의 정점에서 나는 일기를 썼다.

시위용 일기였다.

잘 시간에 방 불을 끄러 와 주는 엄마가 읽어주기를 내심 기대하며 매일같이 일기를 써서 보란 듯이 책상 위에 넓게 펼쳐놓곤 했다. 이 곰인형의 대단한 점과, 사랑스러운 포인트와, 이 곰돌이의 유행에 편승하지 못한 엄마의 소중한 딸이 얼마나 소외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절절하게 썼다. 이게 지금 유실됐다는 게 아쉬운 동시에 너무너무 다행일 정도로 유치찬란한 소동이 아닐 수 없었다. 잡지에서 찢어낸 페이지를 정성껏 오려 풀칠해 붙였고, 몇천 원 더 비싼 하트 베어가 아닌 분홍색 베비베어를 가질 수만 있어도 세상에서 최고 행복할 거라는 둥의 거짓부렁을 아낌없이 나불거렸다. 그 노력이 가상했는지 가증스러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도 엄마가 된 입장에서 헤아려 보자면 알면서도 속아주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어쨌건 생일이었나, 크리스마스였나, 무슨 이벤트가 걸쳐지면서 결국 나는 그 곰을 손에 넣었다. 인간승리.... 개뿔. 고집데기 철부지가 엄마를 이겨먹은 창피한 기억으로 시작했으나 결국 그 곰인형은 서른 해가 넘도록 나를 따라왔으니 함께 추억을 되새기는 사이가 된 셈이다. 물론, 가끔 옷장에서 꺼내어 먼지 털어줄 때.

 

곰인형에 대한 애정이 뿜뿜한 다정한 글을 쭉 읽었는데, 내게도 하나 있는 그 곰의 안부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그래서 옷장을 열고 곰돌(순일까...)이를 꺼내서 머리도 털어주고, 등짝도 쓸어주고, 손도 만지작만지작 하고 콧등에 삐져나온 검은 실밥들을 대충 손질해 주었다.

 

 

아이고,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사는 게 바쁘고 정신없고... 비글 같은 어린이 세 명이 종종 이성을 흐려놔서 말야... 내가 좀 그래.. 그래도 너 보니 반갑다. 근데 네 꼴이 말이 아니긴 하구나.

소매 고무줄은 다 빠져 너덜거린 지 오래이고, 발은... 발?? 발??

 

물론 내가 자주 들여다보고 안부를 묻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러니까 나도 잘못이야, 라고 단정짓기엔 너무나 또렷하게 남은, 의도적으로 누군가가 잘라내간 흔적이 보이는 이 가슴아픈 범죄의 현장은 뭔가. 물증이 없어도 우리 집에 이런 짓을 할 만한 놈이 누군지는 너무 확실한 심증이 있기에 바로 붙잡아다 추궁했더니 반성하는 기미가 1도 없이 냉큼 "어 나 맞는데" 하고 시인한다. 왜때문에!! 라고 물었더니, 자기 곰인형에게 양말을 지어주고 싶었는데 적당한 양말감이 없길래 오래 된 곰인형 옷 발 부분만 도려냈단다. 아오...

난 엄마가 그거 버리는 건 줄 알았지, 이렇게 뻔순이 같은 대답도 곁들여서.

그래 다 내 탓이다.

 

괜히 미안해서 잘린 옷자락 속에 손가락을 넣어 아기 발 만지던 기분으로 곰 발바닥을 쓸어봤다. 요즘 날씨도 추운데 발 시리겠다, 생각하면서. 너덜대는 소매도 조여주고, 예쁜 원단 조금 가져다 덧신 만들어 신겨줘야겠네... 그런 생각도 하고.

 

그러니까 이건 모두 이 책 덕분이다. 요즘 찾기 힘든 아날로그 현상소에 언제 찍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오래된 필름을 맡겼다가, 설레는 기분으로 내 이름이 적혀있는 종이 봉투를 열어 비닐 안에 들어있는 몇 장의 사진을 한 장씩 넘겨보는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 같은 종류의 두근거림이 있는 순간을 아끼는 친구에게 읽어주고 싶은 책이다.

 

우리나라에 <테디 베어의 사랑법>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넘치게 사랑받은 Much Loved>이라는 사진집에는 곰 인형 사진이 가득하다. 이 책은 아일랜드 사진가 마크 닉슨이 낡디낡은 곰 인형들을 사진 찍고 주인들한테서 사연을 받아 기록한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수십 년 동안 주인 곁에 있던 인형만이 보여 줄 수 있는 닳아빠진 모습은 제목 그대로 '넘치게 사랑받은'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전해 준다. -22쪽

 

"이게 다 똑같지가 않거든요, 표정이..... 조금씩 다 다르거든요."

설명을 덧붙였는데도 반복일 뿐이잖아! 나는 내 안의 이 진지함을 알려줄 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뒤로 침묵했다. -79쪽

 

"사람한테나 좀 신경 쓰고 그러지." 이 말을 한참 곱씹었다. 어쩐지 들어 본 말인데. 아프리카 아이들, 먼 곳의 난민들을 돕는 사람들한테도 비슷한 비난의 말을 한다. "우리나라에도 굶는 애들이 많은데." "우리나라 사람한테나 신경 쓰고 그러지."

우선순위 때문에 감수성이 좁아지고 좁아지면, 그 뒤에는 무엇이 남을까. -177쪽

 

마지막 인용문에 대해서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저렇게 말하는 사람에게는 상처받을 마음 한 구석자리를 허하는 것조차도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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