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책모임에서 서로 이런저런 책들을 함께 읽어보면 어떻겠냐고 추천의 말들을 나누다가 누군가가 생각난 듯 "그런데요, 지난번에 보니 ***교수님이 여기 무슨 기관에 오셔서 강연을 하셨거든요. 거기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면..."하고 강연 요약을 했는데, 껍질 안 벗긴 밤이 열 속에서 톡톡 튀어대는 것처럼 또 끼어들고 말았다. "그거요, 그 교수님 신간 보면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어요. 제일 첫 챕터에서 그 이야기가 나오는데, 저도 되게 재밌게 읽었어요." 열 개의 눈동자는 자동으로 초점을 새로 조정했다. 그걸 깨달은 순간 식은땀이 났다. "그러니까... 저는 정말 좋았거든요. 괜찮았어요. 시간 되시면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쪼다.

최소한의 책임 발언, 그러니까 어떤 부분에서 나는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는, 그런 설명조차도 못 붙일 거면서 입을 왜 떼, 떼긴.

 

 책이건 영화건, 그 대상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이 왜, 어떻게, 특히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늘 어렵다. 무엇을 왜 좋아하는지, 어디가 마음에 걸어들어왔는지 말하는 것은 결국 나의 한 부분을 뒤집어 보여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아예 모르는 사람들, 두 번 볼 것 같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는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속적으로 다시 만날 사람들, 나를 어떻게 보고 있고 또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잘 모르겠는 사람들 앞에서 나를 드러내는 건 역시 보통 용기로 될 일은 아니다. 저는 이게 좋았어요, 라는 말에 누군가 공감해주면 고맙고 기쁘지만, 어 난 그거 별로던데, 하는 말을 만나면 자존감 만땅 충전하고 나섰더래도 어딘가 바람 새는 소리가 들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디로 가는 걸까, 안 그래도 연약하기 짝이 없는 나의 멘탈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어려운 진짜 이유는 이거다. 지각할 수는 있다. 나의 어떤 감정세포를 뭔가가 눌러 I ♥ IT! 소리를 내고 갔다는 걸. 그렇지만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불꽃이 튀겼는지, 정전기가 튀겼는지까지 예리하게 감지하기엔 조금 둔한 것이다...

잘 쓰고, 잘 말하는 사람들은 그런 걸 너무 잘 안다. 내가 왜 이 책이 마음에 드는지, 이 영화와 저 음악이 왜 나와 코드가 맞는지 아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찰떡같은 비유도 들어준다. 어떤 사람들은 그게 어려워... 그게 바로 접니다.

그래도 하나는 알고 있다. 책으로 배워서 알고 누가 가르쳐 줘서 알고, 옆에서 누가 그렇게 성장해 가는 걸 봐서 안다. 못 해도 자꾸 하다 보면 는다는 거. 그래서 못 쓰지만 쓴다. 쓰는 능력이 정말 중요한 거다, 라고 아이들에게 자꾸 말로만 강요할 게 아니라 못 써도 계속해서 노력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쓴다. 다 큰 어른도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연습해야만 실력이 느는 게 있다, 크면 다 잘할 수 있게 되는 게 절대 아니다, 시간만 하릴없이 보내면 저절로 얻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쓴다. 내가 이 비슷한 얘기를 얼마전에 분명히 썼는데... 싶어서 뒤져보니까 아니나다를까 불과 며칠 전에 비슷한 내용을 썼다. 그래도 또 우려먹어야지. ㅎㅎ

무엇이 나를 흔들고 갔는지 알고 싶어서 쓴다. 신기하게도 아무것도 쓸거리도 없어서 키보드를 누르면서 아무말이나 막 써야지 했는데, 그 안에서 뭔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게 좀 재미있다. 막글이라도 막 쓰다 보면, 그 안에서 새로 밝혀진 나를 안에서 밀어내는 힘과 바깥에서 미는 힘이 무엇인지 조금씩 밝혀진다. 그 재미로 쓰기도 한다.

내가 뭘 했는지 떠들고 싶어서 쓴다. 자랑처럼 하루종일 집안일을 열심히 했다(매일이 아닌 게 안타깝다)던가, 오늘은 또 뭘 사들였다던가(자랑이 아니다), 누구를 만났는데 이런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던가, 하는 걸 또 얘기하고 싶어서 쓴다. 그러니 쓰려고만 들면 쓸 것은 얼마든지 있겠지.

그렇게 쓰다보면 무엇을 왜 어떤 이유로 좋아하게 됐는지, 좋다고 생각하는지, 남들도 이것을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다고까지 생각하게 됐는지 지금보다는 좀 더 또렷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확신이 아니라서 '~같다'라고 했다. 요즘 세상엔 '~같다'라는 말 쓰기가 쉽고도 어렵다.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혼자만 떠드는 것은 옳지 않지만 어쨌거나) 이러저러해서 좋다고 세 문장쯤은 붙여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정말 좋은 거니까, 당신도 꼭 이걸 알았으면 좋겠다고 조곤조곤 쓸 수 있게 되면 좋겠다. 그런데 좋겠다는 말을 도대체 몇 번이나 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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