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아기를 낳았다. 어제 낮 12시경. 12시간 진통 뒤에 자연 분만하였다고 한다. 친한 친구가 아이를 낳은 것은 거의 처음이었기 때문에 (고향 친구 중엔 몇 있지만) 난 조금은 떨렸다.

오늘 퇴근 후에 친구와 아기를 보러 병원에 갔다. 근처 상점에서 아기 선물을 사려 했는데, 뭘 사야할지 모르겠다. 웬만한 출산 준비물은 거의 다 있을 것 같아 딸랑이 세트를 샀다. 딸랑이를 가지고 놀려면 백일은 지나야 한다니, 벌써 딸랑이를 준비해두진 않았을 것이다.

산모와 아기가 있는 방에 들어가니 부은 얼굴의 친구와 신생아 침대에 누워 있는 아기가 보인다. 앉아서 웃는 얼굴로 맞는 친구를 보니 우선 마음이 놓인다.

아기는 아기의 모습이었다. 세상 구경한지 서른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아기라 쭈글쭈글하고 빨간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기는 아기의 형상을 온전히 갖추고 있었다. 손가락도 열 개, 발가락도 열 개였으며 까만 머리카락도 참 많았다. 살짝 쌍커플 자리도 보였고 엄마를 닮아 이마가 동그랬다.

친구는 자기가 열심히 먹은 밥과 음식으로 아기의 머리카락, 손톱, 발톱에까지 양분을 공급했다는 것을 신기해했고 뿌듯해했다. 난 그런 친구에게 "아기가 최상품이야!"라며 노고를 치하했다.

친구는 아기를 낳는 그 순간에도 고통을 표출하기 보다는 아기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소리를 지르는 게 아기에게 좋지 않다고 해서 단 한마디의 비명도 지르지 않았고 이도 악물지 않았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 아기를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힘을 주느라 친구의 목덜미와 등에 있는 실핏줄이 모두 터졌다. 아직도 얼룩덜룩한 고통의 흔적이 친구의 몸엔 남아 있었다.

딱 한번, 고통의 순간을 이기지 못하고 옆에 있던 신랑에게 너무 힘들다고..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다고 말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눈물이 나려고 했다. (흑, 지금도 눈물이 난다. T.T) 그래봤자 그녀가 겪었던 고통의 크기를 난 상상조차 할 수 없겠지만, 강한 그녀가 얼마나 아팠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 나라면 아마 본격적인 고통이 오기도 전에 겁에 질려 배를 째어달라고 애원을 했을 것 같다. 

아기는 엄마가 그렇게 힘들게 낳은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잠만 잤다. 울지도 않고 깨지도 않고 내리 잠을 자다가 가끔씩 눈을 떠 서비스로 여러 표정을 지어주곤 했다.

발바닥을 간지르고, 다리를 주물러도 만사 귀찮다는 듯 자는 아기를 겨우 깨워 수유를 하였다. 난 얼마 전 <섹스 & 시티>에서 미란다가 아기에게 수유하는 모습을 보고 캐리가 기겁을 했던 장면이 떠올라 잠시 긴장했다. 그녀의 몸엔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과연 친구의 가슴은 수유를 위한 엄마의 것이 되어 있었다. 오물오물 젖을 빠는 아기와 친구의 모습을 낯설었지만, 아름다웠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지구의 모든 생명을 존속하게 한 본능의 만남이었을테니까.

집에 돌아오는 길, 엄마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전화를 하진 않았지만 엄마에게 꼭 묻고 싶었다. 날 낳을 때, 많이 아팠는지.. 얼마 전 엄마에게 친구 이야기를 하며, 그 친구 지금 얼마나 무서울까?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엄마의 대답은 이랬다. 첫째를 낳을 때는 둘째를 낳을 때만큼 무섭지는 않다고. 그건 아기 낳는 고통의 실체를 경험해 보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상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난 둘째로 태어났으니 출산의 고통 뿐만 아니라, 무지막지한 공포심까지 엄마에게 안겨준 셈이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위대하고 세상의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는 흔해 빠진 그 말, 오늘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난 오늘부터 자신의 의지로 10kg 이상 다이어트에 성공한 인간들에 더하여(^^;) 생명을 만들고 세상에 내놓은 모든 이들을 존경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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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5-15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니님, 힘들지만, 모두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모든 여성은 위대하고, 모든 생명 또한 위대한 것이겠죠. 친구의 예쁜 아기가 건강하게 잘 자라길 바라겠습니다.
서니님도 작업이 얼른 성공해야 할텐데~^^

찌리릿 2004-05-15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낳는 고통, 보살피는 정성... 우리 자식들은 너무 쉽게 잊네요. 엄마~ 엄마~~

삼성카드 CF던가... 갓 출산한듯한 새댁이 "내 새끼가 새끼 낳았다고..."하는 멘트가 생각나네요.

sunnyside 2004-05-15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 존경합니다~ 두 건이나 해내셨을 뿐만 아니라, 건강하고 이쁘게 키우시기까지. 전 은제쯤 진/우맘님 진도에 맞출 수 있을지.. ㅎㅎ;
찌리릿님, 맞습니다. 효도합시다. (엄마~ 엄마~~)

Smila 2004-05-15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번에 그 친구가 출산했나보군요. 하지만, 출산은 고통보다 기쁨이 훨씬 더 큰 작업이니 너무 힘들꺼라고만 생각하지 마세요. 아팠던건 다 잊어버립니다~~

이럴서가 2004-05-15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큰누이가 조카 둘 낳은 모습 보면서 님과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대학시절 늘 학생운동하며 뛰어다닌 누나의 성정이 종종 강퍅하다 느낄 때가 있었는데, 아이 낳고 본능적인 여성성을 봤을 때의 자애로운 누이 얼굴은 얼마나 평안한 모습이었던지, 새삼 기억이 소롯합니다. 모든 어머니와 생명들에게 근원적으로 빚진 바 생각하면 사람들에게 좀 더 성실해야겠다, 다짐해봅니다.

휴머니스트연 하다보니 어깨가 좀 뻐근하군요... 휴.

sunnyside 2004-05-15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mila님, 정말 그럴까요? 부디 그래야 할텐데요... Smila 님도 둘째 아기 건강히 순산하시길 바래요. 아직 좀 남았지만요. ^^;
맞아요. 조선남자님. 허투루 태어난 사람 하나 없는데.. 우리 모두는 좀더 귀해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비로그인 2004-05-15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멋지글이네요..읽는 저도 울컥~ 그렇게 아플까요?? ^^

sooninara 2004-05-15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마다 차이가 있죠..저도 아프긴 했는데..하늘이 노랗지는 않더군요...^^
물론 둘째때는 '이정도론 안나올텐데..더 아파야 할텐데..'하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하더군요^^
옆에서 아무 고통없이 우아하게(?) 수술 준비하는 산모들이 부럽기도하고..그래도 금방 아이 낳고 나니..잘 걸어다니고..잘 먹고...자연분만이 최고죠..
수술하면 낳고나서 고생해요...참 둘재낳으면 훝배앓이도 더 심하게 아파요..ㅠ.ㅠ
부풀은 배가 수축하는데..두번째엔 더 부풀어서 강하게 수축하느라 더 아프다죠..
헤헤..아직 아이도 안생긴 처녀에게 겁을 너무 많이 주었나요?
그래도 아픈것은 잠깐이라우...참을만 혀요...죽진않으니깐..^^

ceylontea 2004-05-16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저는 정말 자연분만 하고 싶었답니다.. 12시간 진통끝에..의사선생님이 수술하시자고 하더군요.. 아기도 너무 힘들고 태변을 누었는데.. 더 이상 진행은 안되고..태변을 먹으면 아기에게 안좋다고.. 그 소리에 저도 수술하자고 했습니다. 아마 그렇지 않으면 끝까지 자연분만하겠다 했겠지요... 지금은 그때 참 많이 아팠었지 하는 기억밖에 없네요...
지금 방에선 딸아이가 새근새근 자고 있어요... 에이... 자는 얼굴이라도 보고와야지... ^^
서니님도 어여 어여... 결혼하시고.. 애도 낳으시고.. ^^

sunnyside 2004-05-16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선 수니나라님, 실론티님, 존경합니다~ ^^
수니나라님, '참을만 혀요.. 죽진 않으닌깐..' 흑, 이걸 지금 안심하라고 하신 말씀인가요? 더 무서버요~ -.- 허지만.. 여러 선배님들 말씀 따라 '나도 할 수 있다!' 는 마음가짐으루다가... (그나저나 어느 세월에? ㅎㅎ; )
실론티님, 어휴, 고생하셨네요.. 엊그제 아기 낳은 친구의 여동생도 얼마 전에 아기를 낳았는데, 비슷한 문제가 있어서 (태변을 먹는...) 아기가 병원에 있었다고 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병원에 두고 나와야 하는 엄마는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요.. 세상의 모든 어머니와 아기들은 저마다의 스토리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폭스바겐님, 우리도 언젠가 경험할 날이 오겠죠.. 올까요? ^^;

ceylontea 2004-05-16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현이는 다행히 적정한 시간에 수술을 해서.. 태변도 먹지 않고.. 아주 건강하게 잘 태어났습니다.. ^^
서니사이드님.. 그 순간 지나고 나면... 아팠던 기억은 잘 안나요.. 무서워 마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