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자서전
김인숙 지음 / 창비 / 200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백하자. 지난 두 달 여 동안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책은 이 책 한 권이 고작이다. 새롭게 시작한 일은 조금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머리 속은 복잡했다. 차분히 정리하고, 판단하고, 따져보기도 전에 상황은 결정되어버렸고, 상황이 결정되자 눈 앞에 일이 밀려왔다. 그렇다고 하나하나 일을 처리해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매일매일 처리해야 하는 일들은 많았고, 신경을 써야 하는 것들을 더 많았다. 책상에 앉아 있기보다는 늘 밖으로 돌아다녀야 했다. 책상이 정리된 후에는 좀처럼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일을 쌓아둔 채 걱정도 하지 않고 며칠을 보냈다. 고백하자. 그 며칠 동안, 아니 두 달 여 동안 방치된 건 이 블로그가 아니라, 내 자신이었다.  

그런 나날 중 하루, 나는 김인숙의 새로운 소설집을 읽는다. 머리도 몸도 피곤한 어떤 날이었다. 표제작인 <그 여자의 자서전>을 읽다 나는 침대에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내처 몇 편의 소설들을 읽는다. 또 그 내용이 그 내용이라고 신경질을 내지 않고, 상투적인 우울이 지겹다고 짜증도 내지 않고, 책장을 넘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한숨이 나오고, 가슴이 무거워진다.

눈물을 거두어버린 한쪽 눈은 이제 한 사람의 죽음 이외에는 더이상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또한 기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러나 남아 있는 눈은, 눈물을 거두어버린 눈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보다 더 흉하고 끔찍한 것들을 평생 목격하게 되리라. 한쪽 눈의 마지막 기억을 비웃으면서, 더 지독한 것들을 담아내리라.

<그 여자의 자서전>에서 김인숙이 그려내는 세상은, 한쪽 눈을 실명하게 만든 충격적인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다. 낭만적인 꿈을 꾸었던 이들은, 비루한 현실을 그저 근근이 살아낸다. 소설가는 정치에 입문하고자 하는 땅부자의 자서전을 써야 하고, 은밀한 혁명의 땅 중국은 천박한 자본에의 욕망과 비루한 인간 삶의 땀내가 가득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조선족 처녀는 날개를 찢기는 아픔을 모른 척 하며 한국으로 향하고, 온전한 휴식을 원했던 남편은 부재중이다. 순간의 고통은 한쪽 눈을 거두어갔지만, 남은 한쪽 눈은 감지도 못한 체 더욱 지독한 것들을 감당해야 한다. 80년 변화에 대한 열기로 가득한 캠퍼스에서 홀로 도서관을 지켰던 청년은 그럼에도 눈부신 멀리뛰기를 보여주었지만, 졸업 후 노동쟁의의 선봉에 섰던 그는 머리가 벗겨진 보험외판원이 되어 헐벗은 머리보다 더 안쓰럽게 제자리뛰기를 할 뿐이다.

지금의 '나'와 '나'들이 고통스럽고 불행하니, 그들의 과거는 아름다운가. 김인숙 역시, 그저 혁명의 열기와 젊음의 낭만이 가득했던 한 때의 과거에 집중하고 있는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마음이 무거웠던 이유는, 과거의 꿈과 지금의 현실에 대한 작가의 균형 때문이었다. 김인숙은 현재가 비루하니 과거가 아름다웠다고 말하지 않고, 과거에 꾸었던 꿈과 그 때 가졌던 열정 때문에 현실이 남루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인간은 과거의 절망적인 고통이나 눈부신 환희로 인해 한쪽 눈을 잃고도, 남은 한쪽 눈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어린 시절 꿈꾸었던 트럭 운전수의 삶은 그가 질주하는 고속도로의 밤풍경과 다르지만, 그 꿈이 현실에 대한 변명이 되지 않고, 그 현실이 과거를 윤색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집의 풍경은 더욱 고통스럽고, 삶은 더 절망적이다.

그러니 이 냉혹한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진실'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작가조차 작품 속 소설가의 입을 빌어, 진실은 소설의 주인공에게나 가능하다고 고백하는 마당에. 고통스런 삶의 복판에서는 사랑의 본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움직이지 못하는 그이의 몸이 주는 무게 때문에 숨이 막히고, 한 사람의 존재는 다른 이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책 속에 나 있다는 삶의 길은, 은밀한 출세욕에 불과하다. 끝을 알 수 없는 바다를 생날개 찢어가며 날아야 하는 나비처럼, 우린 내 앞에 펼쳐질 내일도, 지금 내 삶에 감춰진 진실도 알지 모른체 퍼득퍼득 날개짓을 할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고단하게 날개짓을 한다고 해도,  육지에 도달할 수가 있을까.

그리하여 이런 세상에서 무언가에 대한 믿음조차도 가질 수 없는 나는 불행하니. 오늘 밤 나는 머리끄덩이 잡아채 싸울 시어머니가 없어, 하루밤 내 정신을 맡길 엑스터시 같은 건 구할 수도 없어, 살아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한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끼사스 2005-09-07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의 글, 반갑네요. 사막에 매.우. 현.실.적.인. 단비가 내리길 바랍니다.

hanicare 2005-09-07 0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가을이군요.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어요. 사실은 내게 시간은 흐른다기 보다 실패에 감긴 실처럼 그저 둘둘 감긴다는 생각을 합니다.
여긴 바람이 거세고 비가 많이 옵니다. 거긴 어떤가요.

치니 2005-09-07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

비연 2005-09-07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선인장 2005-09-07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훈성님 > 오랫만입니다. 단비라... 태풍이 지나가길 그렇게나 기다렸는데, 이 곳의 하늘은 너무 쾌청해요. 현.실.적.인. 단비라, 참 좋겠네요...

하니케어님 > 그 곳은 바람이 거세고, 비가 오는군요. 태풍은 제 바램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를 비켜가나 봅니다. 하긴 이 거대한 도시는 모두 가졌으니, 잠시 비바람이 피해간다고 해서 내가 큰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되겠죠. 어제는요, 구름이 아주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것을 봤어요. 저녁에는요, 세상에서 가장 예쁜 노을색을 보기도 햇지요.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 내 마음에 오래 남질 않아요. 시간이 참 잘도 가네요. 도대체 어떻게 보내는지도 모를 만큼요...

치니님 > 아주 오랫만에... 그렇네요... 너무 오랫만이에요...

비연님 > 감사합니다.... 잘 지내시죠?

바람구두 2005-09-07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 T
보고 싶었다...

Volkswagen 2005-09-07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오랜만입니다.
선인장님의 다른 사이트 주소를 알긴 하지만 혹시 폐가 될까봐 인사를 드리지는 못했습니다. 잘 지내시나요? ^^

선인장 2005-09-08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 > 고마워라, 반가워라... 저도 보고 싶습니다.

폭스바겐님 > 정말 오랫만이지요? 그리고 폐라뇨... 그 곳에서 님이 알은 체 해 주신다면, 저야 더욱 반가울 텐데요... 님도 잘 지내시죠?

hanicare 2005-09-11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석, 포근하게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