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률적인, 너무나 확률적인
-심보선-
오래된 습관을 반복하듯 나는 창밖의 어둠을 응시한다,
그대는 묻는다, 왜 어둠을 그리도 오래 바라보냐고.
나는 답한다, 그것이 어둠인 줄 몰랐다고, 그대는 다시 묻는다.
이제 어둠인 줄 알았는데 왜 계속 바라보냐고,
나는 다시 답한다, 지금 나는 꿈을 꾸고 있다고,
그대는 내 어깨 너머의 어둠을 응시하며 말한다,
아니요, 당신은 멀쩡히 깨어 있어요, 너무 오랜 고독이
당신의 얼굴 위에 꿈꾸는 표정을 조각해 놓았을뿐...
(후략)
09.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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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
권영민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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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철학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물을 때, 질문이 빈정거리며 쏘아붙이길 원하기 때문에, 대답은 공격적이어야만 한다. (중략) 그것은 모든 형태 하의 사유의 저속함을 고발하는 것 이외의 어떤 다른 용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의 원천과 목적이 무엇이든, 철학 이외에 모든 신비화에 대한 비판을 의도하는 어떤 학과가 존재하는가? "  -질 들뢰즈-

 

이상의 들뢰즈의 말처럼 철학이 모든 신비화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고 그것의 실체를 밝히는 작업이라면 권영민의 책 "철학자 아빠의 인문육아"는 육아서라기보다는 철학서이다.

유아, 그리고 이 유아를 기르는 육아는 이미 신비이자 신화이다.

특히나 첫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는 유아, 육아는 아마 일종의 신비 사건일 것이다.

(조금 부정적으로 보자면 한달에 수십만원하는 영어 유치원를 비롯한 일련의 증상(?)들을 볼 때 지금의 한국 사회는 심지어 일종의 육아병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든다)

 

저자는 이제 막 돌이 지난 아이를 불가피 몇 해에 걸쳐 혼자 양육하게 되는 초보 철학자이다.

아이라는 "절대적 대상"(절대적 약자이자 절대적 돌봄의 대상)과 만나는 철학자 아빠는 본인의 도구이자 무기인 철학으로 "육아-사태"를 헤쳐나가고 성찰해간다.

물론 이러한 육아에 대한 철학적 모색이 학위 논문을 위해서라든지, 지적 욕심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이는 오히려 완전한 미지의 세계에 뛰어든 불안에 휩싸인 어느 한 인간의 몸부림에 가까운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대상(자식)을 홀로 지키고 양육해야 한다는 아버지로서의 불안과 절박함이 "육아-사태"의 실체를 밝히는 철학적 여정으로 저자를 인도한다.

 

아이의 폭력성, 말 배우기, 층간 소음,  스트레스로 인한 틱장애 등등...  저자는 말 그대로 육아를 온몸으로 경험한다. 이 뜨겁고 압도적인 사건들을 헤쳐나가며 저자는 반성한다 그리고 철학한다.

 

예를 들어 아이의 장난감에 대한 생각이 그러하다.

레디메이드(ready-made) 장난감 이전에 레디메이드 규칙이 있다. 레디메이드 규칙에 따라 아이들은 자본주의 기업의 키즈(kids)로 자라게 되며, 자본가라는 꿈을 갖게된다.(중략)

예를 들어 '이 장남감을 갖는다면, 나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처럼 멋있게 될 거야!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 기업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인과 규칙이다.(중략)

내가 어떤 것을 소유해야 하는 까닭(규칙)이 사회나 타인의 요구에 의한 것인가, 혹은 자기 자신의 진정한 필요와 독자적 리듬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인가에 대해서 아이가 판단할 수 있도록 성장해야 자본주의 사회와 기업의 노예가 아닌 자유민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만드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강요하지 않는 사람이 비로소 자유로운 사람이다.(중략)

아이야. 누군가가 정해 놓은 규칙의 노예가 되지 말고 창제자가 되어라.

규범을 깨고 권위를 비웃어라. 아빠가 아직은 좁지만 기꺼이 그 공간이 되어 주마.

 p58-61

또한 아이의 시간 의식의 확장을 목격하며 느낀 점도 흥미롭다.

나는 내 아이가 보다 넓은 지금을 살아가는 아이로 자라났으면 한다. 이것은 "마시멜로 이야기"처럼 순간의 유혹을 참고 이겨 더 큰 보상을 받으라는 식의 바람이 아니다. 매우 잘 준비된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처음과 끝이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며 모든 순간의 음들이 시작과 끝을 향하고 의식한 것이듯, 아이가 자기 삶의 시작과 끝을 두고 자신을 검토하고 반성할 중 알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p209-210

 

이처럼 육아를 통해 저자는 언어, 놀이, 시간, 상처 등등 인간 일반의 문제를 그 "근본"부터 되짚어본다. 

(아이란 백지의 존재이므로 말 그대로 근본부터 고민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점 아마 향후 저자의 다음 철학 작업에도 지대한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대부분의 아이를 가진 부모에게 최우선의 관심사는 아이일 것이고, 그들에게 가장 절박한 사태는 육아일 것이다.

이 절박하고 절대적 사태 앞에서의 고민은 어떤 고민보다 깊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좋은 철학 작품의 기본 전제는 고민의 절박성과 깊이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철학자 아빠의 육아-철학은 결코 어느 프로 철학자의 고민과 사색의 결과물들과 비교해도 아쉽지가 않다.

 

p.s. 나는 개인적으로 이번 책을 읽으며 나 자신을 다시 "육아"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봤다. 나의 언어, 나의 시간, 나의 놀이, 나의 상처, 나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점검해보며, 나를 잘 키워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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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2014-03-25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한 미지의 세계에 뛰어든 불안에 휩싸인 어느 한 인간의 몸부림"이라니... 절박하게 와닿는다 권선생님이 고생이 참 많으셨구나 하하

숭군 2014-03-25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고생이 많았더랬지 ^^
 
사진에 나타난 몸 아트 라이브러리 2
존 퓰츠 지음, 박주석 옮김 / 예경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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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는 것은 욕망을 의미한다. 이 점 포르노 그래피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이해가 되는 사실이다. 사진은 봄(seeing)의 기록이다. 그렇다면 사진은 욕망의 기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결국 사진은 촬영자의 욕망의 시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사진이 중립적, 객관적 기록이 아닌 촬영자 개인의 욕망의 투사물이라는 것은 이미 많이 거론된 사실이다. 그런데 개인의 욕망은 과연 순수한 개인의 욕망인가? 그렇지 않다. 라깡의 유명한 명제처럼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촬영자의 욕망은 사회-구조적 힘에 의해 구성된 욕망, 즉 촬영자를 둘러싸고 있는 그 시대와 그 세계의 욕망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존 퓰츠의 "사진에 나타난 몸"을 읽어보면 사진의 150여년 역사 동안 반영된 인간의 몸에 대한 시대와 세계의 욕망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다. 성별과 나이, 인종을 포함한 다양한 인간 양태에 대해 세계는 어떠한 욕망을 투사해 왔는지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탐색임에 틀림없다. 그런데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1970년대 이후 기록매체로서의 사진의 역할이 축소된 후-이는 물론 tv라는 새로운 매체 때문이겠지만- 사진에 나타난 몸의 대상이 타인의 그것이 아닌 자신의 몸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특히 기존의 셀프 포트레이트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보다 과감한 형식으로 연출된 셀프 포트레이트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즉 나의 몸을 일종의 표현도구로서 인식하는 일련의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나게 된다.-예를 들면 신디셔먼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21C의 현대 사진까지 그 맥락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렇듯 자신의 몸을 마치 캔버스처럼 다루며 이를 통해 자신의 메세지를 담아내는 사진적 행위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타인의 몸이 아닌 나의 연출된 몸을 사진으로 담는 행위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이는 일차적으로 타자의 욕망이 아닌 나의 욕망을 욕망하는 행위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라깡의 명제를 끝까지 밀고 간다면 오히려 이러한 작업들을 "나의 욕망을 욕망하라는 타자의 욕망"의 반영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즉, 순수한 나의 욕망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의 욕망을 욕망하라"라는 것 역시 이 시대정신이 이 요구하는 타자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사진의 역사에서 20C 후반 이후 타인의 몸에 대한 욕망의 시선은 촬영자 자신의 몸으로 향한다. 표면상, 욕망의 방향성이 자신을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역시 "나를 욕망하라는 타자의 욕망"에 대한 욕망이라 본다면 너무 회의적인 해석일까?...



p.s. 오늘 친구와의 통화가 기억난다. 정말 어쩌면 철저한 회의만이 나를 구원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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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내가 사랑하는 예술가는 절제된 욕구를 갖는다 : 그는 진정 단 두가지를 원할 뿐이다.

그가 먹을 빵과 그의 예술을,-빵과 키르케를……
-니체, 우상의 황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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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책읽다가 느낀건데 아이가 초월이라면 육아는 초월을 향해 자신의 지평을 넓히는 활동임에 틀림없겠지. 그런 의미에서 많은 일반인들, 가장으로 살아가며 돈벌이를 하는 자들의 노동은 예술가의 그것 이상으로 가치있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같은 맥락에서 자네의 노동도 신성한 것임에 틀림없다는 걸 느끼네. 한편 육아도 작업도 하지 않는 나는 무엇하며 살고 있는가 싶다. 반성하게 되는구나. 이 세계의 아버지들은 모두 초월에, 그 절대 타자를 향한 신성에 참여하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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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본색 2013-05-02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다. 나의 수 많은 핑계들을 이해해줘서. 친구만이 이해할 수 있는 삶의 핑계가 있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