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두 번째 질문은 훌륭한 예술 사진의 조건이네. 자네가 훌륭한 예술 사진의 조건으로 말한 형식과 내용 측면에서의 ‘사태개방성’에서 ‘새로운 감각과 감수성’을 호출한다는 말이 정확히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내가 말한 둘 중의 하나에 해당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외의 다른 어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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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군 :
답글 고맙네! 덕분에 정말 평소에 당연하게 생각하던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좋네!
나는 좋은 다큐멘터리 사진과 나쁜 다큐멘터리 사진의 기준은 기술적 완성도에 있다고 생각하네.
즉, 잘 찍었느냐, 못 찍었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네.
그리고 이전에 언급했다시피 이같은 기준에서 더 나아가서 상황의 새로운 측면을 환기시키는 힘을 가진 사진을
나는 예술로 작동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이라고 생각하네.
이 점 많은 다큐 사진가들에게 적잖히 욕먹을 일이라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예를 들어
얼마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은 박노해의 다큐사진을 보겠네


이상의 박노해의 사진은 정말 잘찍은 다큐사진이라 생각하네.
내가 죽기 전에 저렇게 잘찍은 사진을 한번 남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드네.
그러나 나는 과연 박노해의 사진이 예술작품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네.
적어도 나에게는 박노해의 사진은 기존에 너무나 많이 보아왔던 그런 이미지의 반복 생산이라고 생각하네.
즉 새로운 감각, 새로운 의식의 지평을 한치도 넓히지 못했다는 것이지.
좀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박노해의 사진은 사진은 "인간 사랑, 가난한 이웃에 대한 따뜻한 시선" 등으로
너무나 쉽게 수렴 되어버린다는 것이지.
이는 사진이 애초에 "기존의 관념이나 생각"을 지시하는 일종의 지시기호로 기획되어
사용되었기에 발생하는 당연한 결과라 생각하네.
그리고 나는 이 점에 대해 다큐사진으로서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네.
나는 다큐사진이 기존의 양식화 된 이념이나 세계관을 사진을 통해
그려낸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반드시 이 사명 역시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위의 사진은 자네도 알다시피 2007년 처음 내가 처음 사진을 시작할 때 신촌에서 찍었던 사진이네.
사진 기술적인 문제도 문제지만 위의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명확하게
내가 지시하는 상황이 이미 일반화, 도식화된 지점을 지시하고 있다고 있기 때문이지.
즉, 내가 이 사진으로 그려내고자 했던 것은
소위 "어려운 이웃에 대한 무관심", 혹은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성" 등에 대한 고발이겠지.
내가 "언어화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이 바로 이 지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네.
그러니까 내가 말한 "언어"란 "정형화된 인식", "정형화된 의식"의 구조적 틀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네.
이 점 자네가 이미 앞서 나와 동일한 생각을 아래와 같이 이야기해 주었네.
"나는 사태 개방성은 우리의 일상적 시선을 해방하는 기능이 있어야 예술이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네. 그러니까 우리가 존재와 세계를 정립하는 ‘서정’의 방식에 의문을 던지는 정도에 따라, 그리고 다른 ‘서정’으로 돌변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렇다고 해서 나는 결코 예술사진이 다큐사진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네.
예술가가 혁명가보다 더 우위에 있지 않는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 그렇다고 생각하네.
다만 서로의 영역이 다르고 나의 경우에 있어서 예술 쪽에 더 선호를 가지고 있을 뿐이네.
만약 우위를 따지자면 소위 미학적 차원에서 예술사진이 우위를 가질 것이고,
운동성의 차원에서 다큐사진이 우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네.
즉, 상대적 우위를 모두 나름대로 점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거듭이야기 하자면 조셉 쿠델카의 사진과 같이 어느 지점에서
"일반적인 다큐멘터리 사진"의 영역이 아닌 "예술로서의 사진" 영역으로 침투하는 사진이 있다고 생각하네.
조셉 쿠델카의 사진


그리고 이러한 예술 영역으로의 침투는
이미 말했다시피 패션 사진을 비롯한 상업사진 뿐만 아니라 헐리웃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네. 내가 이전에 말한 소위 "헐리웃 영화"는 매트릭스와 같은 작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래도 진부한 상업 영화를 지칭하는 것이었네.(소위 킬링타임용 영화)
그러니 첫번째 문제에 대해 정리하자면 나는 좋은 다큐멘터리 사진과 나쁜 다큐멘터리 사진의
기준을 기술적 완성도로 보고 있다네. 예를 들어 좋은 다큐멘터리 작가로 "스티브 맥커리" 같은 작가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네. (물론 그가 찍은 사진 가운데에서도 예술 사진의 가능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는
사진도 있다고 나는 생각하네.)
한편, 보도사진의 경우는 오히려 나는 저널리즘이 핵심인 사진이라 생각하네.
분명 상황을 담는다는 차원에서는 다큐나 보도사진 모두 같은 맥락이겠지만,
좋은 기사가 개인의 "주관적 가치관"을 글로써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듯이,
(물론 여기서 말하는 "주관적 가치관"을 드러내는 사진이 다큐멘터리 사진이라 생각하네)
좋은 저널리즘 사진, 보도사진은 사진 기자의 주관적 가치관을 드러내는 것을 지향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네.
(물론 어디 개인의 주관성이 투영되지 않은 사진이 있겠는가만은 나는 그 비중과 지향성을 이야기 하는 것이네)
아주 거친 비유를 들자면 다음과 같을 것 같네.
보도사진(정확성,객관성) = 기사(정확성,객관성)
다큐사진(기술적 완성도) = 사설(논리성)
예술사진(미학성) = 시,문학(미학성)
그리고 내가 "사태개방성", "독자적 감각"이란 용어로 말하고자 한 것은
자네가 이미 앞서 말했던 두번째 상황("언어화 되기 이전에 감상자에게 주는 충격과 같은 직접적 감각")을
의미하는 것이었네.
내가 말하는 "언어"란 앞서 말했듯, "일종의 도식화, 정형화된 해석틀"을 일컫는 것이네.
이같은 맥락에서 "개념화(언어화)될 수 없는 의미 잉여분" 이란 것도
"기존에 확보되었던 정형성"(언어)을 넘어서는 새로움에 대한 잉여를 이야기 하는 것이지.
이 점 자네와 나 역시 생각을 같이 한다네.
또한
"쉽게 언어로 해석되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전부일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보네. 내 경우에 ‘상록타워(evergreen tower)’를 보면서 과연 이게 전부일까, 즉 내가 해석한 내용이 이 작품의 최종적 의미일까 하고 묻고 작품을 더 고민해야만 했었네."
라고 밝혀주었듯이 작품에 대해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자세의 생각에 역시 동의하네.
솔직히 그동안 내가 많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너무 쉽게 빨리 판단했을 수 있었을 것이란 반성을 하게 되네.
하지만 한편으로 나는 "가치 없는 작품"을 "그 작품보다 더 가치없는 사이비 평론"으로
포장하는 예술계의 관행도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하네.
자네가 말했듯 속단하지 않고 진중하게 작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감상자와 평론가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자세이겠지만,
"없는 목소리"를 거짓말로 만들어내는 일부 몰지각한 사이비 평론가들에게도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네.
좋은 감상, 좋은 평론이란 말 그대로 "냉정과 열정사이"에서의 균형이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하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니까. 그리고 때론 "진실"은 "냉혹한 것"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를 위해 정직하고 냉정한 비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네.
자본의 논리에 봉사하는 거짓 칭찬에 편승하여, 혹은 그 거짓과 공모하여
한 평생을 고작 "비싼 쓰레기"를 만들기 위해 산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작가 자신에게 너무 잔혹한 형벌이라 생각하네.
그러니 나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닌 바로 작가를 위해 정직하고 냉정한 감상과 평이 필수적이라 생각하네.
한가지 덧붙이면
이상의 내 생각이 물론 사진계와 공유하는 보편적 생각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참고해주시게나.
각 작가들에 대한 평가뿐만 아니라 개념미술에 대한 생각, 사진 장르의 구분, 예술 사진의 조건 등등 역시
전혀 공식화된 생각이 아니니까 다른 분들의 생각을 많이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네.
나 역시 사진을 공부하는 사진학도의 한명일 뿐이니까.
다만 나는 나의 미적판단에 대한 나름의 정당성과 기준을 확보하고,
이 정당성과 기준을 근거로 내 작업을 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이를 위해 불가피하게 여러가지 문제에 대한 다소 거친 개념화가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점 이해해주시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