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

 

본래 과일과 채소를 좋아하지 않는 나도 지난겨울 감기로 호되게 고생할 때만큼은 온갖 과일을 맛있어하며 게걸스레 찾아 먹었던 기억이 난다. 또 몇 해 전 한창 육식을 즐기던 시절, 갑자기 채소가 너무나 먹고 싶어져 두세 주 동안 온갖 채소를 샐러드로, 데쳐서, 삶아서 이렇게 저렇게 한참을 요리해 먹던 때도 있었다.

 

아마 균형이 무너진 몸이 내게 특정한 신호를 보내어 평소 즐기지 않던 것들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고 그것들을 즐길 수 있게 만든 것인지 모르겠다.

 

꾸준히 균형 잡힌 섭식을 하는 것이 건강을 위해 최선이겠으나 몸의 균형이 무너졌을 때에는 몸이 말해주는 신호에 맞춰 응급하게라도 필요한 영양소를 공급해주어야 한다. 문제는 이 신호를 무시한다거나 이 신호에 반응할 여건이 되지 않을 때이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괴혈병으로 죽어가던 옛 선원들처럼.

 

 

인간의 정신 역시 다양한 양분을 공급받아야 건강하게 운영된다. 일에 대한 몰입과 그 성취가 주는 기쁨, 물질이 주는 안락함과 여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정서적 안정감 등이 그러한 영양소일 것이다. 그리고 홀로 있음이 주는 고독과 형이상학적 세계가 주는 초월의 의식 역시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삶의 일정 기간을 불가피하게 깨어진 균형 속에서 보내야 할 때가 있다. 입시나 취업을 준비하는 기간을 비롯하여, 깊은 사랑에 빠졌거나, 심각한 경제적 문제에 봉착했거나, 강렬한 종교적 체험을 하고 난 직후와 같은 경우이다.

 

 

그러나 바울이 아라비아 사막에서 돌아왔듯이, 가난을 딛고 성공한 사업가가 수전노에 머물지 않고 기부를 하듯이, 한 때 불꽃같은 사랑을 하던 연인들이 결혼하여 부부로서 안정된 사랑을 영위해 가듯이, 이처럼 특정한 목적을 위해 요구되는 추동력을 획득한 이후에는 다시 균형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몸이 결여된 영양소의 필요를 입맛의 변화를 통해 알려주는 것처럼 이 정신의 균형을 회복해야 하는 시기 역시 내면에서 특정한 신호를 통해 분명히 말해준다. 공허함, 심적 피로, 외로움, 우울함 등이 그러한 신호일 것이다. 문제는 이 신호를 무시한다거나 이 신호에 반응할 여건이 갖춰지지 않았을 때이다. 그것이 욕심 때문이든, 주변의 기대 때문이든, 책임감 때문이든, 균형의 회복을 요구하는 내면의 소리에 응답하지 못하면 결국은 자기 파괴로 치닫고 만다.

 

나눔 없는 부자의 삶은 탐욕의 대상일지언정 존경의 대상은 되지 못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애절하나 결코 성숙하지는 않다. 고흐의 그림은 위대하지만 그의 삶은 가엾다.

 

 

빠르고 강하게 회전하는 팽이는 잠시 기울어져도 곧 다시 단단하게 균형을 잡는다.

균형은 힘의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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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에게

우리 열심히 살자.

열심히 산다는 것은 피터지게 사는 것도, 아등바등 사는 것도 아니다.

떼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시간의 노예가 되는 것도 아니다.

열심히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력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고 그것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다.

열심히 산다는 것은 새싹들이 그 연하디 연한 정수리로

겨우내 얼어붙은 흙을 깨부수고 기적처럼 돋아나는 것이다.

낮잠 자고 일어난 고양이가 두 눈을 질끈 감고

온 힘을 다해 척추를 늘려 기지개를 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천성대로 열심히 살자.

위장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술을 퍼마시고

폐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담배를 피우고

목청이 터지도록 노래를 부르고

머리털이 한 줌도 남지 않고 다 빠져버릴 때까지

사유하고 전 세계의 골목길을 산책하자.

더 크게 웃고 더 크게 아파하고 더 곰곰이 생각하자.

우리가 어린 씨앗이라면 최선을 다해 피어나 만발하자.

그리하여 더없이 찬란해지자.

그렇게 우리는 우리식대로 이 황홀한 세계를 만끽하자.

그리 되었을 때 우리는, 특히 당신은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2011. 3월 J가 써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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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2015-11-28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 뭐야 난 시인이었어 ㅋㅋㅋ

숭군 2015-11-28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 넌 시인이었다!ㅋㅋㅋ 열심히 살자!
 

타인들의 칭송과 멸시와 무관심에 연연치 않는다.

즐거움과 슬픔만이 나의 도덕

사랑과 고백은 절대 금물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결단코 침묵이다.

-심보선, 구름과 안개의 곡예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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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를 탔는데 기사님이 이동 단속카메라가 오늘 유독 많다시며 한마디 하신다. "짜식들 돈이 떨어졌나?.." 교통 단속은 국민의 안전을 위한 것인 동시에 국고 확보의 수단이다. 나같이 정치의식이 빈약한 사람은 세금이나 벌금을 낼 때에야 국가가 느껴지고 하나의 실체로써 실감되고 대상화가 가능해지고 불만이나 고마움이 생기고 투표할 마음도 생기고 이민갈 마음도 생기고 어쩌다 "혁명같은 것도 좋겠다"란 마음도 생길지 모르는 일이다. 사실 프랑스 혁명도 그렇게 시작된 것이겠지. 위대한 정신이 지휘하는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아니었을게다.

이렇듯 마음이란 삶의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매끈하게 살아가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것을 잃기를 각오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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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감자탕집 사장님.

자정이 넘어 퇴근길, 뼈해장국에 소주 한 병 마시러 들르면 무릎만치 쌓인 방석에 비스듬 기대어 텔레비전을 보시다가

"아.. 사장님 늦었는데 괜찮으세요..?"라는
부탁같은 내 질문에 졸린 눈을 부비시며
"응, 자네는 괜찮아!"라고 웃으며 맞아 주신다.

커다란 가족 사진이 걸려있다. 그리고 또 작은 몇 장의 아이들 사진들이 걸려있다. 아마 십여년은 지났을 사진이다.
그 사진 속 사내아이가 선한 눈을 가진 청년의 모습으로 내 앞을 몇 번 지나쳤으니까.

오늘 카운터 앞에 엎드려 잠시 주무시는 사장님을 깨워 계산을 한다.

이제 나를 마지막으로 아마 잠자리에 드시겠지.

우리동네 감자탕집.
지갑의 현금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그곳은 카드를 꺼내서는 안되는 신성한 공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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