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국, “저 물이 네 선생이다. 물에게 배워라”

고 임종국 선생 누이동생이 들려주는 회고담

 

 

임경화(경기남부지부 회원고 임종국 선생 누이동생)

 

아래 글은  고 임종국 선생의 누이동생인 임경화 여사가  우리 연구소  경기남부지부 회보에 기고한 것이다.  생전의 임종국 선생이 친일문제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임경화 여사가 한 집에서 살림을 돕던 때의 이야기로  임종국 선생 인생관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현재 임경화 여사는 수원에 거주하며  우리 연구소 경기남부지부 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편집자 주>

 

 오빠가 세상을 떠나기 전 5년의 세월을 함께 지냈다. 인생 말년의 마지막 절정기에 정수와 같은 말들을 많이 해 주셨다.

오빠는 내게 “마음은 텅 비고 속은 꽉 차게 살아라. 그런데 보통 사람은 마음은 꽉 차고 속은 텅 비게 산다. 네가 만일 마음을 비고 속을 꽉 차게 살 경우 세상 만물이 다 네 눈에 들어온다. 그러면 사람이 겸허해 진다. 겸손(謙遜)과 겸허(謙虛)는 다르다. 나무의 예로 말해 주마, 벌레가 다 파먹어서 속이 텅 빈 나무 빈 나무에 가지나  잎새가 무성할 경우,  나무는 세찬 비바람과 폭풍에 가지와 잎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쓰러진다. 보통 사람은 마음이 꽉 차고 속이 비어 있다.  내가 제일 이라는 교만한 생각, 누구의 충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오만심 자만심 등으로 마음이 꽉 차면 허례허식이 많아진다.”

 

 

      ▲ 고 임종국 선생

 

다른 사람의 충고, 자연의 섭리, 신의 섭리 등을 못 받아들이고 자기의 욕심대로 마음대로 살다보면 세상에서 매장되고 도태된다. 더 나쁜 것은 자기가 쓰러지면서 왜 쓰러지는지를 모르는 거다.

내가 죽고 나면  누가 너에게 이런 말을 해 주겠니?  나 죽기 전에 너에게 좋은 선생 하나 소개시켜주마. “저쪽으로 가자”해서 따라 갔더니 작은 개울가로 갔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은 작은 폭포를 만들고 도랑을 이루며 아래로 흘러가고 있었다.

“저 물이 네 선생이다. 물에게 배워라.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이것은 겸손을 뜻한다. 너는 겸손하게 살아라. 또 물은 더러운 것을 씻겨 준다. 이것은 세상 죄악을 씻는 것이다. 너는 어디 가든지 세상 죄악을 씻으며 살아라. 물은 겨울에는 얼고 여름에는 녹는다.  빨강색 물감을 풀면 빨갛게 되고 파란색 물감을  풀면 파란색이 된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본래의 물로 돌아간다.  너는 어디에 가서 살건 환경에 어울려 살되 ‘너’ 라는 정체성은 버리지 말고 살아라.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목적지 까지 가는 거다. 이 짐이 무겁다고 내려놓을 수도 없고 쉴 수도 없다. 욕도 참고, 비방도 참고, 고생도 참고, 어떤 어려움이 와도  참아라. 또 너라는 것을  드러내지 말고 감추고 살아라.  나서지 말고 설쳐대지 말고 그저 참고 겸허하게 살아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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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캠페인] 소송, 지옥같은 고난의 행군

일본 시민들이 호주머니를 털고
한국 활동가들이 차비를 아끼며 진행한 전후보상 소송

 

 

한겨레21 길윤형 기자

 

서울 청량리역 3번 출구에서 내려 전농동 쪽으로 10분쯤 걸어 내려가면 ‘떡전사거리’란 이름이 붙은 교차로 너머로 5층짜리 허름한 건물 하나를 만날 수 있다. 이 건물 3층에는 민족문제연구소와 ‘어둠의 야스쿠니에 평화의 촛불을 들자’는 취지로 2005년 한국·일본·대만·오키나와인들이 모여 만든 야스쿠니공동행동 한국위원회(이하 한국위원회) 사무실이 자리하고 있다. 그 허름한 사무실이 일본을 상대로 끈질긴 전후보상 소송을 이끌고 있는 우리나라 시민운동의 중추다.
 


△ 일본의 전후 책임을 요구하는 운동이 계속될 수 있었던 데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의 공이 컸다. 2001년 종로 시절의 모습. 이희자(가운데) 회장과 김은식 사무국장(오른쪽·사진/ 한겨레 김종수 기자)

“마지막으로 60만엔만 달라”

김은식 한국위원회 사무국장은 “한국의 전후보상운동이 지금과 같이 기틀을 잡은 것은 일본 시민사회에 빚진 바 크다”고 말했다. 식민지배와 전쟁의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한·일 두 나라 활동가들이 이어온 끈끈한 유대의 역사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신파극 같은 느낌이 난다. 1990년대 초반까지 일본의 전쟁 책임을 묻는 전후보상운동은 ‘위안부’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1999년에 이르러서 △야스쿠니신사 강제합사 △군인·군속 강제동원 △유골 반환 등 다른 문제들로 눈을 돌려볼 여유가 생겼고, 그 사연을 모두 모아 일본 법원에 제소를 하자는 움직임으로 연결됐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일본 법원에서 소송을 진행하려면 세 가지가 갖춰져야 한다. 첫 번째는 피해 당사자와 유족들로 구성되는 원고단, 두 번째는 실제 소송을 진행하는 일본 쪽 변호단, 세 번째는 그 비용을 부담하는 지원회다.

먼저 원고단과 지원회를 구성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김은식 국장은 “그때는 전후보상과 관련된 모든 쟁점을 모아 소송을 벌여보자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피해 당사자와 유족들에 대한 엄청난 양의 인터뷰가 진행됐다. 1차로 252명에 대한 진술서가 작성됐다. 한 사람당 진술서는 대략 A4용지 2~3장 정도. 그에 더해 원고의 신분을 증명하는 호적등본, 주민등록등본 등 관련 서류가 따라붙는다. 이를 일본 법원에 제출하려면 모든 서류를 일본어로 번역해야 한다. 한국에서 관련 자료를 인터넷에 올리면 도쿄 쪽에서는 미소노 고지, 오사카에서는 훗날 야스쿠니신사 강제합사의 폭력성을 정면으로 다룬 기록 영화 <안녕, 사요나라>의 주인공이 되는 후쿠가와 마시키를 중심으로 번역 작업이 진행됐다. 그 작업에 참여한 일본 시민단체 관계자는 줄잡아 300여 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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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에 뜻하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무라야마 전 일본 총리 때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아시아여성기금’을 받느냐 마느냐를 둘러싸고 유족 단체가 둘로 갈라진 것이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이하 유족회)는 “일본 요구에 따르자”는 양순임씨 쪽과 “그럴 수 없다”는 이희자씨 쪽으로 갈라섰다. 결국 유족회 서울지부장이던 이희자씨와 김은식 사무국장은 1999년 10월21일 유족회 사무실에서 멱살 잡혀 쫓겨나고 말았다.

며칠 뒤 일본 지원단체 관계자들 앞에 선 김씨는 “마지막으로 60만엔만 더 지원해달라”고 말했다. 비참한 기분이었다. “그때 여기서 운동이 끝나는 게 아닌가 괴로웠습니다. 정말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일본에 간 거죠.” 일본 지원단체 쪽에서는 격론이 일어났다. “한국의 유족단체는 이미 끝났다”는 쪽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믿어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엇갈렸다. “며칠 뒤 서울로 돌아가는 공항에서 일본인들이 봉투 하나를 내밀더라고요.” 그 안에는 김씨가 요청했던 60만엔이 들어 있었다.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인들은 한 사람당 적지 않은 돈을 갹출했을 것이다. 그 돈으로 종로3가 종로오피스텔 505호에 ‘태평양전쟁 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이하 보추협)라는 새 이름으로 간판을 달 수 있었다. 일본에서 손님들이 오면 회의실이 없어 길 건너 제일은행 본점 1층 테이블로 향했고, 가끔씩은 YMCA 빌딩 지하 다방을 찾기도 했다. 김씨는 2년 넘게 월급을 못 받았고, 차비가 없어 출근하지 못한 날도 있었다. “그런 과정들을 통해 원고단과 지원단의 관계가 튼튼해진 것 같습니다.” 김은식 사무국장이 말했다.

그 다음은 변호단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일본 변호사들은 부담스럽고, 승소 가능성이 낮은 재판에 하나같이 손을 내저었다. 결국 일본의 전후 책임을 묻는 굵직한 재판을 맡아온 오구치 아키히코(63) 변호사를 설득했다. 오구치 변호사는 장고 끝에 재판을 맡기로 했다. 거기에 다른 일본인 변호사 2명과 재일동포 변호사 2명이 합세했다. 애초엔 피고를 야스쿠니신사로 정할 예정이었지만, 천왕제의 상징인 야스쿠니신사를 상대로 하는 것은 일본 우익들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와 일본 정부만을 상대로 재판을 벌이기로 했다. 그동안 한국에서 진술서를 쓴 피해자와 유족의 수는 늘어나 414명이 됐다.

일본에 갈 때마다 김을 팔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보추협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일본에 갈 때마다 김이나 휴대전화 줄을 사가면 일본 사람들이 그걸 조금씩 웃돈을 줘서 사주는 거죠.” 이희자씨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는 매달 150만원씩 되는 사무실 유지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다시 사무실은 존폐의 위기에 놓이게 됐다. 운동단체 사이에 “보추협 어쩌면 좋냐”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결국 민족문제연구소가 보추협을 떠안기에 이른다. 서우영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그때는 연구소도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우리나라 전후보상운동의 맥이 끊기는 꼴은 보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지옥 같은 고난의 행군을 벌이면서 보추협은 ‘미쓰비시 원폭 피해자 소송’과 ‘신일본제철’ 피해자 소송을 진행했고, 한-일 회담 문서 공개를 이뤄냈으며,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법 통과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수천 명의 열정과 7년이라는 긴 시간을 잡아먹은 끝에 일본 도쿄지방재판소는 2006년 “원고의 소를 각하한다. 소송 비용은 원고의 부담으로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굴하지 않았고 2007년 2월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한국인들의 이름을 빼달라”는 새 소송을 제기했다. 이번의 상대는 지난번 재판 때 피해간 야스쿠니신사다. 재판은 승소할 수 있을까. 김은식씨는 “필요한 것은 한-일 두 나라 사람들의 좀더 많은 관심”이라고 말했다.<한겨레21, 07.05.23>
 

 


[야스쿠니신사 합사 피해자 돕기]

일본 사회에 둔중한 충격을!

10,601,000원

5월11일 현재 모금액 1060만1천원

모금이 한창 진행 중입니다. 자동응답(ARS) 전화도 열려 있습니다. 야스쿠니신사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강제로 끌려가 목숨을 잃어야 했던 2만1천여 명의 할아버지들 원혼이 억눌려 있습니다. 할아버지들의 억울한 영혼을 모셔오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사회 세력은 지난 10년 동안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왔습니다. 밤 새워 번역을 했고, 집회에 나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상근 활동가들은 월급 한 푼 못 받으며 버티고 있습니다.

그동안 일본 정부에 전쟁 책임을 묻기 위한 소송은 일본 시민단체들의 자발적인 모금에 의존해왔습니다. 이제는 우리 힘으로 야스쿠니신사에 갇혀 있는 할아버지들의 원혼을 모셔와야 합니다. <한겨레21>과 민족문제연구소는 우리가 모아낸 작은 정성들이 하루가 다르게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 사회에 둔중하고 의미 있는 충격을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독자 여러분, 작은 정성을 모아주세요.

계좌이체 우리은행 1006-401-235747, 예금주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ARS 060-707-1945·한 통화 3천원
주관 민족문제연구소, ‘노합사(NO 合祀)’, <한겨레21>
문의 민족문제연구소(02-969-0226), 홈페이지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www.anti-yasukuni.org),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38-29 금은빌딩 3층(우편번호 130-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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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캠페인] 조선 황족 이우, 야스쿠니에 있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의친왕의 둘째 아들,
히로시마 원폭으로 사망한 뒤 합사된 사실 최초 확인

 

 

한겨레21 길윤형 기자 / 스나미 게스케 프리랜서 기자

 

“글쎄, 잘 모르겠는데.” 의친왕의 11번째 아들인 이석(67)씨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4월3일, 그를 만나러 전주 한옥마을을 찾은 <한겨레21> 취재진은 황망한 걸음으로 서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랬을 수도 있을 거야. 이우 형님께서 돌아가실 때 일본 군인 신분이셨으니까. 야스쿠니신사라고 했나? 고약한 일이구만.” 이석씨는 헛기침을 했다. 늦은 오후, 전주 한옥마을의 공기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 이우는 1945년 8월7일 숨져 14년 뒤 야스쿠니의 영령이 됐다. 이우의 죽음을 전한 1945년 8월9일치 <매일신보>1면.(사진/매일신보)

<야스쿠니 100년사>에 짧은 기록 남아

다른 친인척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의친왕의 손자로 인정받고 있는 이혜원 국립고궁박물관 자문위원은 “그런 얘기를 들은 적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우 삼촌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긴 한데, 확인해본 적은 없습니다. 오랜 전 일이지 않습니까. 정확히 잘 모르겠네요.”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조선 황족들은 없을까? 야스쿠니신사에 강제 합사된 조선인들의 사연을 취재하던 <한겨레21>과 민족문제연구소는 옛 조선 황족 가운데 일부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을 가능성에 주목하게 됐다. 이따금 언론에 동정이 소개되는 황족 후손들을 중심으로 취재가 진행됐다.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거나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증언은 대부분 전언이어서 신뢰하기 힘들었다.

야스쿠니신사에는 일왕을 위해 싸우다 목숨을 버린 군인·군속 246만여 명의 영령이 일본의 ‘수호신’으로 모셔져 있다. 이 가운데 조선인 출신 합사자는 2만1천여 명, 대만인 출신 합사자는 2만7천여 명에 이른다. 조선 황족 가운데 일본 군복을 입었던 사람은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1897∼1970), 영친왕의 형 의친왕의 장남 이건(1909∼91), 의친왕의 둘째아들 이우(1912∼45) 등 3명이다. 이 가운데 이우는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의 양자로 들어가 법적으로는 운현궁의 후손이 된다. 이우는 제2 총군사령부 교육담당 참모(중좌·우리의 중령)로 근무하던 중 1945년 8월6일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피폭돼 다음날인 8월7일 숨졌다.1945년 8월9일치 <매일신보>는 1면에서 ‘이우공 전하, 7일 히로시마서 어(御)폭사’라는 톱 기사로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이우공 전하께서는 재작 6일 히로시마에서 작전임무 어(御)수행 중 공폭에 의하야 어(御)부상하시어 작 7일 어(御)전사하시었다.” 조선 황족 중 누군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다면 그 가능성이 제일 높은 사람은 이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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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과 민족문제연구소는 문서 등 기록자료 분석에 들어갔다. 해결의 실마리는 뜻밖에도 쉬운 곳에 있었다. 1869년 도쿄에 도쿄초혼사(東京招魂社)란 이름으로 역사에 첫 모습을 드러낸 야스쿠니신사는 1987년 6월30일 세 권짜리 분량의 책 <야스쿠니 100년사>(비매품)를 펴낸다. 이 책의 506쪽에서 이우의 야스쿠니신사 합사와 관련된 짧은 기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영세부봉안제서류철’(이우공 합사제 서류 포함) 소화34년 10월 ~소화35년 10월
이우 공은 소화 20년 8월7일 히로시마에서 전몰했다. 34년 10월7일 초혼식을 집행하여 상전에 합사하였고 17일 4만5천여 명의 육해군 군인, 군속과 함께 본전 정상(正床)에 합사하게 되었다. 본 철은 이에 관한 자료가 중심이 되고 있다.

기록은 이우가 1959년 10월17일 4만5천여 명의 육해군 군인들과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됐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구체적인 합사 경위는 ‘영세부 봉안 제 서류철’에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내용까지 확인할 순 없었다. 이석씨는 취재진이 이런 사실을 전해주자 “조국이 해방을 맞은 게 벌써 62년 전인데 형님이 야스쿠니신사에 억눌려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것은 기막힌 일”이라고 말했다. 그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다는 사실은 국내 학계에 알려진 바 없다.

일본 황족과 같은 대우 받지 못했다



 


△ 이우는 수려한 외모 때문에 몇 해 전부터 ‘얼짱 황손’이라는 애칭으로 인구에 회자됐다. 제일 아래 사진은 중국에서 근무하던 무렵 찍은 것이다. 위의 두 사진의 촬영 시점은 명확하지 않다.

작가 정범준씨는 조선 황족들의 역사를 다룬 책 <제국의 후예들>에서 “이우는 아버지(의친왕)처럼 호방한 성격을 지녔고 일본을 증오했다”고 적었다. 1912년 11월15일에 태어났고, 모친은 수인당 김흥인이었다. 1915년 경성유치원, 3·1운동이 나던 해인 1919년 종로소학교를 거쳐 1922년에는 여느 일본 황족들처럼 일본 유학을 떠나 귀족학교인 학습원에 입학했다.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뒤져보니 “이우가 탄 자동차가 행인을 치었다”거나 “말에서 떨어져 작은 부상을 당했다”거나 “도쿄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다”는 등 자잘한 단신 등이 이어지고 있다. 그는 지금의 기준으로도 “잘생겼다”는 감탄사가 터져나오는 옥골선풍의 귀공자였다.

그는 조선 황실에서 드물게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는 명확한 민족의식을 가진 청년이었다고 한다. 생전에 이우를 접했던 지인들의 전언이 이를 증명한다. 정범준씨는 <제국의 후예들>에서 1988년 9월15일 ‘히로시마 쥬코트’라는 방송사가 이우에 대해 다룬 다큐멘터리 ‘민족과 해협’에 소개된 이우의 지인들의 증언을 소개하고 있다. 일본인 동기생 아사카는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항상 마음속으로 새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우공은 일본인에게 결코 뒤지거나 양보하는 일 없이 무엇이든지 앞서려고 노력했지요”라고 말했고, 운현궁의 가정교사였단 가네코는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었으므로 일본 육군에서도 두려워했다”고 증언했다. 역사학자 이기동은 1974년 5월치 월간 <세대>에 쓴 글 ‘이우공, 저항의 세대’에서, 이우가 일본의 정략 결혼을 피해 조선인 박찬주(후작 박영효의 손녀)와 결혼을 밀어붙여 뜻을 이루고 마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영세부봉안제서류철’에는 어떤 내용들이 담겨 있을까. 이에 대한 암시를 주는 기록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아카자와 시로우가 쓴 <야스쿠니신사>(이와나미서점, 2005년 7월20일 출판)를 보면 이우의 합사 문제를 처리하면서 일본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고민들을 읽을 수 있다. 숨질 때 이우는 일본의 황족과 동등한 취급을 받던 조선의 왕공족이었다. 조선인 강제 합사에 대한 야스쿠니신사의 공식 의견은 “죽은 시점에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일본을 지킨 신으로 모시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일본의 논리를 그대로 따른다면 죽는 시점에 일본 황족과 동등한 지위였던 이우는 (합사 자체가 부당한 일이긴 하지만) 일본 황족과 동등한 취급을 받고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됐어야 한다. 1959년 10월6일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옛 황족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신노(北白川宮 能久親王)와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가히사오(北白川宮 永久王)는 “황족과 평민을 같은 자리에 모실 수 없다”는 궁내청의 의견을 받아들여 두 황족을 따로 모실 수 있는 미타마시로(御靈代·야스쿠니신사의 영령이 깃든다는 거울)를 새로 만들어 혼백을 모셨다. 두 황족을 위해 따로 만든 거울은 신사 왼쪽에, 기존의 미타마시로는 오른쪽에 안치돼 있다.

숨진 이우는 일본 황족과 같은 대우는 받지 못한다. “히로시마에서 피폭 사망한 옛 왕족(대한제국의 왕가로 한국 병합 후에 황족에 준하는 지위로서 편입했다)의 이우공의 합사 처리는 야스쿠니신사에서도 특히 문제가 되었다. 그것은 옛 왕족인 이우공을 특별 ‘일좌’(一座)로 합사된(새로 미타마시로를 만들어 따로 혼백을 모신) 옛 황족의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등 2주와 동등하게 취급할지 말지라는 문제다.”(<야스쿠니신사>)

일본에 안 가려고 설사약까지 먹어

논의 끝에 이우는 일본 황족처럼 일좌로 합사되지 않고, 수백 명의 육해군 군인과 같은 수준에서 합사되는 것으로 결정됐다. “달리 취급한 이유는 불명하지만, 여기에도 궁내청 쪽에서 암시가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책은 적고 있다.

히로시마에서 피폭된 이우는 그날 오후가 돼서야 히로시마 혼가와 상생교 아래에서 흙투성이로 변한 채 발견됐다. 그날 밤 이우는 히로시마 남단의 니노시마라는 섬으로 후송됐고, 해군 병원에서 의식을 조금 되찾았지만 이튿날 새벽 고열로 신음하다 숨을 거뒀다. 이우는 히로시마로 전출되기 전 운현궁에 머물면서,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일본에 가지 않기 위해 설사약을 먹으면서까지 버텼다고 한다. “남에게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보기에도 일본의 패망은 기정 사실인데 미국뿐만 아니라 소련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니 조선 해방도 뒷수습이 큰일입니다.”(김을한 <인간 영친왕>)

유해는 1945년 8월8일 서울로 운구됐고, 의무관들에 의해 방부 처리됐다. 일주일 뒤인 1945년 8월15일 정오, 히로히토 일왕은 라디오에서 새어나오는 모기만 한 목소리로 항복을 선언했다. 이우의 장례식이 열린 것은 일왕의 ‘옥음 방송’이 끝난 직후인 8월15일 오후 1시, 지금의 동대문운동장인 경성운동장에서였다. 조선 신궁의 궁사가 제주로 동원된 조선군사령부 주관의 육군장이었다. 젊은 미망인과 어린 두 아이의 모습이 도드라져 침통하고 구슬픈 장례식이었다고 한다.<한겨레21, 07.05.03>

 

 

[야스쿠니신사 합사 피해자 돕기]ARS 개통됐습니다

6,954,000

4월27일 현재 모금액 695만4천원

모금이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자동응답(ARS) 전화도 개통됐습니다. <한겨레21>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야스쿠니신사 취재를 통해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많은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야스쿠니신사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강제로 끌려가 목숨을 잃어야 했던 2만1천여 명의 할아버지들의 원혼이 억눌려 있습니다. 그중에는 살아 있는 분들도 있고, 이제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져버린 조선의 황족도 있습니다. 060-707-1945번을 누르시면 야스쿠니신사에 억눌려 있는 우리 할아버지들의 영혼을 좀더 빨리 고국에 모셔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아낸 작은 정성들은 하루가 다르게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 사회에 둔중하고 의미 있는 충격을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계좌이체 우리은행 1006-401-235747, 예금주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ARS 060-707-1945·한 통화 3천원
주관 민족문제연구소, ‘노합사(NO 合祀)’, <한겨레21>
문의 민족문제연구소(02-969-0226), 홈페이지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www.anti-yasukuni.org),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38-29 금은빌딩 3층(우편번호 130-866)

모금자 명단

이점도(2만원) 표님(1만3천원) 김석희 지효(3만원) 송성평(1만원) 구자숙(2만원) 김영배(3만원) 박바위(1천원) 정윤택(5만원) 김보협(3만원) 최은주(5만원) 구둘래(3만원) 정재권(5만원) 남종영(3만원) 유현산(2만원) 정인환(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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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7-05-31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가와 상생교라면, 바로 원폭투하 목표가 되었던 다리인데...바로 옆에 원폭돔이 남아있는...휴...
 

성장주의에 갇힌 저출산 대책, 패러다임을 바꿔라  

황정미 |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

한국사회의 급격한 출산율 하락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2005년 현재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1.08로 세계 최저수준인데, 쉽게 말해 출산이 가능한 가임연령(15~49세)에 있는 여성 한명이 평생 출산하는 평균 자녀수가 1.08명이란 의미다. 합계출산율이 인구규모를 유지하는 수준인 2.1 이하로 떨어진 것은 1983년경인 데 반해 저출산 문제의 심각성이 본격적으로 공론화된 것은 2000년 이후였다. 인구가 늘어나면 모두 가난해진다는 개발독재 시절의 캠페인을 지나치게 학습한 나머지 눈앞에서 출산율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미처 대응할 생각조차 못한 채 십수년이 흘렀던 것이다.

최근 몇년간 정부는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의 설치와 이른바 '새로마지플랜2010'(저출산·고령사회기본계획)의 수립, 시민사회단체와 노동조합 및 기업이 참여하는 저출산·고령화사회협약 체결 등 나름대로 분주한 일정을 밟아왔다. 이제 저출산 문제는 시대적인 과제로 인식되고 있지만 과거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미래를 잘못 진단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는 측면이 있다.

일할 사람이 없으니 일단 많이 낳아라?
 
첫번째 문제는 여전히 성장제일주의의 렌즈를 통해 저출산을 바라보는 것이다. 대다수 정부보고서는 저출산의 사회적 효과를 신생아 감소, 생산연령 인구의 감소와 부양비 증가라는 '양적' 차원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저출산이 경제성장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어떻게 완화할 것인가에 촛점을 맞춘다. 정책 목표는 '적게 낳자'에서 '많이 낳자'로 역전되었지만 좀더 깊이 들어가보면 출산과 양육을 보는 근본 시각은 과거 개발국가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고출산이 성장을 저해한다고 보았다면 이제는 저출산이 성장을 위협한다고 하니 결국 성장제일주의 담론으로 수렴하는 셈이다.    

저출산·고령화 현상이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지만 그러나 저출산 그 자체를 ‘경제현상’으로만 보는 것은 큰 잘못이다. 산업발전을 지원하고 건설경기를 부양하듯 출산을 늘릴 수는 없다. 결혼과 출산은 반드시 해야 한다거나 결혼적령기가 따로 있다는 인식은 이미 상당히 약화되었다. 결혼연령의 상승과 비혼(非婚) 인구의 증가, 이혼과 재혼의 증가 등은 한국사회에도 친밀성의 구조변동이 진행중임을 보여준다. 개인과 가족, 여성과 남성, 정서적 친밀성과 경제적 부양의 관계는 위계적이고 전통적인 가족규범의 경계를 넘어서서 이른바 탈산업사회적 양상을 보이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 단지 국가의 경제성장을 위해 출산을 늘려야 한다는 발상은 매우 시대착오적이다.

두번째는 국가정책으로 직접 출산을 줄이거나 늘릴 수 있다고 믿는 과도한 국가개입주의 경향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1960년대 말부터 보건소와 가족계획협회는 국제기구에서 제공하는 피임기구와 피임약을 전국적으로 보급하고자 시술대상 여성을 모집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러나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기구나 약물의 보급이 이후 여성 건강에 어떤 부작용을 미쳤는지 제대로 조사를 실시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산아제한정책의 어두운 이면, 여성의 몸에 대한 일방적이고 억압적인 개입의 부작용과 문제점을 겸허하고 솔직하게 되돌아보아야 한다.
 
'잘 살아보세'에서 바뀌지 않은 것: 과도한 국가개입

마찬가지로 출산장려정책에도 경계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 정부나 지자체에서는 이른바 출산축하금 지급, 출산관련 의료비의 보험적용 확대, 불임부부의 시험관아기 시술 지원 등을 하고 있다. 건강한 출산을 위한 지원 자체는 바람직한 것이지만, 출산의 증대만을 목표로 삼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이른바 출산장려정책은 분만을 전후한 수개월의 짧은 기간에 혜택을 집중시키는데, 그 이유는 건강한 신생아를 얻는 것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신생아 수가 늘어나면 저출산·고령화가 초래할 사회문제가 해결되는가? 출산 이후에는 더 큰 문제, 곧 이들을 어떻게 키우고 가르치며 자립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저출산 대응책을 단지 결혼과 출산의 테두리에서만 찾는 것은 매우 편협한 시각이며 다른 중요한 문제들을 외면하는 것이다. 가령 이미 태어난 아이들이 사회적 무관심으로 방치되거나 해외로 입양되는 문제, 통일 이후 우리 사회의 일원이 될 북한 아동의 열악한 성장환경, 나날이 늘어나는 이주노동자 문제 등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제 출산은 개인의 자율적인 선택이며 각자가 행복 추구나 가치관에 따라 결정할 문제가 되었다. 쌍춘년, 속칭 황금돼지해를 맞이하여 결혼과 출산이 상당히 늘어난 현상을 보면 무리한 정책개입보다는 행운을 원하는 자발적인 시민의 선택이 훨씬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변화하는 모성상 반영하는 사회적 환경 가꿔야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저출산이 심각하다고 하면서도 출산의 주체인 모성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편향적이며 불충분하다는 점이다. 저출산 대책은 일차적으로 생물학적 모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모성사망률이 높았던 근대화 시기에는 생물학적 모성에 개입하는 모자보건 정책이 중심이 되었겠지만, 그러나 기본적인 보건의료 써비스가 제도화된 오늘날 어머니의 역할은 '낳는 것'뿐 아니라 '잘 키우는 것'으로 촛점이 옮겨가고 있다. 저출산·고령화에 대비하는 가장 좋은 방안은 '많이 낳는 사회'가 아니라 '잘 키우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잘 키우는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어머니를 단지 낳는 존재로만 보는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2005년 인구조사 결과 전국의 가구주 중 21.9%는 여성이었는데, 다섯 집 중 한 집은 여성가장이 이끌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또한 15세 이상 여성의 절반 정도가 이미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웬만한 중산층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다 보니 이제 취직을 못하면 결혼하기 어렵다는 말이 여성에게도 해당된다고 한다.

요컨대 출산의 고통과 헌신적 양육으로 상징되는 단일한 모성상은 이제 복잡한 시대의 다양한 모성상, 즉 가족부양을 책임지는 어머니, 일하는 어머니,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어머니, 개성과 성공을 추구하는 어머니 등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획일적인 출산장려가 아니라,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어머니들이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자녀를 잘 키울 수 있는 다양한 선택지를 사회가 제공해야 한다. 더 나아가 남성과 여성 모두 양육과 보살핌을 분담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성장주의 벗어나 지속가능성 추구로

여성, 특히 어머니를 고용하려면 기업의 입장에서 추가비용이 든다고 흔히 말한다. 출산휴가, 육아휴직, 직장보육시설 운영, 근무시간 단축 등에는 어느정도 돈이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비용을 사회가 함께 분담하지 않고는 '잘 키우는 사회'로 나아갈 방법이 없다. OECD 국가의 예를 보더라도 여성이 경제활동을 많이 하는 국가일수록 출산율이 더 높게 나타난다. 저출산으로 고민하는 한국, 일본, 이딸리아, 스페인 등의 공통점은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50% 수준 또는 그 이하에 머물러 있다는 것과 더불어 가족주의가 중시되고 부계중심의 가족규범이 강하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초저출산 문제를 단지 경제성장의 위험요소로만 보는 것은 곤란하다. 오히려 잘 살아보기 위해 지금까지 우리가 고집했던 방식, 예를 들면 배타적 민족주의, 이기적 가족주의, 경제성장우선주의, 남성중심의 가부장주의 등이 고착되면 될수록 더 큰 위기가 닥쳐오리라는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는 성장제일주의가 오히려 우리 사회의 재생산과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위험요소가 아닌가를 진지하게 되물어야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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