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교육정보원에서 신영복 선생님 강연을 들었다. 필기를 하고 싶었는데 거의 대부분의 말씀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강의]에 있는 내용이라 필기보다 '듣기'에 열중!! 어떤 강연을 가도 조금씩은 늘 졸았는데 이 날은 정말 조금도 졸지 않고 100% 집중했다. 어쨌든 필기는 거의 못했다. 좀전에 지부 게시판에 들어갔더니 고맙게도 다른 선생님의 강연 요약이 있어서 옮겨둔다.
고전(古傳)으로 보는 성찰(省察)과 모색(摸索)
1. 『강의』는 과거의 재조명이지만 동시에 미래에 대한 모색입니다. 우리의 주체성을 되찾고 패권주의를 지양하기 위한 실천적 담론입니다.
미래는 과거로부터 옵니다.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의 의미가 그렇습니다. 시간이 미래로부터 흘러온다는 생각은 종속(從屬)사회의 의식구조입니다. 나의 고전에 대한 관심은 60년대의 절망과 근대성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되었습니다.
- 미래는 완고한 과거가 조금씩 변모하면서 진행된다. 미래가 먼 곳(외부)에서 온다는 의식은 자기결정력이 없는 종속적 사회의 특징이다. 미래는 과거와 현재에서 온다. 따라서 고전을 중심으로 현재를 말한다. 이러한 고전읽기가 현재와 과거를 성찰하는 거울이 되기를 바란다.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자신의 작업이 “완고한 과거를 깨뜨리는 연장통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나도 그와 같은 바람을 가지고 있다.
우리 사회는 1620년 광해군 이후로 한번도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 변하지 않은 완고한 사회이다. 미래는 이 완고한 과거가 조금씩 변모하면서 진행된다. 나는 4.19의 감격이 5.16으로 좌절되었을 때, 거대한 ‘외세’와 완고한 구조를 느꼈고, 그 이후 학생 써클 운동에 헌신하게 되었다.
2. 근대사회는 자본의 운동원리가 관철된 사회입니다.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논어)
근대사는 동의 논리가 관철된 강철의 역사입니다.
현대자본주의는 그것의 최고단계 그리고 최후의 단계입니다.
- 조선조의 유학자들은 이 구절을 자의적으로 개인의 윤리규범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유가학파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전쟁방식의 무한경쟁시대였던 춘추전국 시대에 대한 해석이다. 그러므로 유가의 사상은 공자의 이름을 빌었으나 그 시대 집단의 사상일 것이다. 여기에서의 和란 차이의 승인, 평화의 공존이며 同이란 패권적 방식의 흡수, 통합이다.
이 말은 오늘날의 사회를 설명해준다. 근대사회의 끝이 미 1국의 패권주의적 동인 것이다. 자본주의 200년 역사는 내적 독점화와 외적 대외팽창, 제국주의, 패권주의이다. 이러한 자본주의는 철저하게 동의 논리를 보여준다. 오늘날 미국은 로마제국의 재출현이라 할 만하다. 오늘날의 자본의 헤게모니는 금융자본이 장악하고 초국적 거대자본이 작은 자본을 흡수, 합병하고 있다. 더 이상 자본은 생산하지 않는다.
3. 환상을 청산해야 합니다.
근대사가 풍요의 역사, 진보의 역사였다는 환상을 청산하여야 합니다. 인류의 5대 공적(公敵)인 Big5(빈곤, 질병, 무지, 오염, 부패)의 해결에 실패하였습니다.
墨悲絲染 國亦有染(묵자)
子夏問曰 巧笑倩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 何謂也 子曰 繪事後素(논어)
우리들의 의식은 물론이며 나라도 잘못 물들어 있습니다. 상품미학은 형식미이며 형식미는 결국 변화 그 자체에 탐닉합니다. 종속적 문화에서는 ‘모름다움’이 ‘아름다움’이 됩니다.
- 빈곤을 뛰어넘지 못했다. 여전히 다수의 사람들이 절대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그리고 예전보다 더 유해한 질병이 늘었다. 각종 첨단 오염과 부패가 늘어가고 있다. 무지도 해결하지 못했다. 知란 무엇인가? 공자는 지는 知人이라고 했다. 그러면 어떻게 인간을 아는가? 서로 관계가 있어야 한다. 사랑해야 한다. 관계가 생기고 마음이 오가야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고 그래야만 사람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다. 오늘날과 같은 냉랭한 집합 속에서 지는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고 결과적으로 무지하다.
사람은 자기생각, 즉 환상을 청산하기가 어렵다. 우크라이나 키예프에 갔을 때, 승전기념탑을 보고 나 역시 얼마나 많이 물들어 있는가를 깨달았다. 묵자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모두 물들어 있어서 환상을 청산하기가 어렵다.
자본주의의 미학도 그렇다. 자하가 공자에게 아름다움을 묻자 공자가 ‘회사후소’라 했다. 이 때 素 란 인간적 바탕이다. 아름다움의 어원은 알다(알만하다)이다. 오래 접하고 익숙하게 아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상품 미학은 모름다움을 추구한다. 미적 정서가 뒤집힌 것이다. 자본주의는 변화 그 자체에 탐닉하므로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자기 정체성이 없이 모든 것이 외부로부터 온다. 따라서 인식과 정서마저 물들어 있다.
4. 패권주의는 지속될 수 없습니다.
君子不鏡於水 而鏡於人 鏡於水 見面之容 鏡於人 則知吉與兇(묵자)
춘추전국시대와 신자유주의 질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묵자의 반전(反戰) 평화(平和)는 전쟁방식의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입니다. 전승국의 영광보다는 패전국의 비극을 직시할 것, 그리고 전승국 역시 반드시 패망하였던 역사를 직시할 것을 묵자는 역설합니다.
- 묵자는 철저한 좌파사상가로 반전평화에 직접 참여하였다. 물에 비추어보면 얼굴 밖에 보지 못하므로 군자는 사람에 비추어 본다. 이를 조선조의 유학자들은 개인윤리화했다. 그러나 묵자는 전쟁방식의 패권주의가 결국 망하는 예를 들고 있다. “만사람에게 약을 써서 서너 사람만 효험을 보고 나머지가 죽었다면 그 의사가 양의인가?”라고 물었다. 노자는 또 “개선장군은 상례(喪禮)로써 맞이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미국식 패권주의도 이같은 춘추전국시대의 질서와 같다.
후세인이 2004년부터 EU화폐로 석유를 결재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 돈으로 석유가 거래되고 재투자도 될 것이니(이것이 프랑스와 독일이 이라크전에 끝까지 반대한 이유..) 달러화가 40%폭락하게 되고 미국 경제가 흔들리게 된다. 그러니까 이라크전은 부시의 치밀한 계산 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 세계 경제는 달러에 의해 좌우가 된다. 우리는 이렇게 굉장히 불안정한 사회질서(구조) 속에 있다.
5. 세계의 근본적인 구조는 존재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물질(物質)과 생명(生命)은 존재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 자기 존재를 배타적으로 키우는 것은 한계가 있다. 물질의 궁극적 형식은 관계이다. 물질은 관계 내에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존재하지 배타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과학적으로 증명됨)
생명은 외부 존재와의 대사가 필요하다. ‘소나무가 살아있다’는 것은 서로 소통하고 있다는 뜻이다. 존재론적 사고는 동의 논리로 다른 존재보다 자기를 강화하려는 논리다.
6. 동양문화는 관계론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泰 小往大來 吉亨 則是天地交 而萬物通也 上下交 而其志同也(주역)
位(위)와 應(응)이라는 주역의 독법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 주역은 물뜨는 그릇이다. 동양의 인식의 틀을 보여준다. 주역의 64괘는 세상을 읽는 시이며 세상의 변화를 읽는 하나의 범주이다. 주역의 괘를 해석할 때는 위(효의 위치)와 응(효 간의 관계)이 중요하다. 즉 주역은 관계론이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 다른 것과의 관계에 의해 괘의 의미가 형성된다.
붓글씨도 철저하게 관계론적인 예술이다. 농밀한 관계성이야말로 서도(書道)의 본질이다. 하나의 결함은 다음 획들과의 관계를 통해 보완된다. 그리고 서도는 흑백의 조화이다. 그 균형에 낙관까지 참여한다.
7. 고전독법의 관점인 ‘관계론’의 산실은 감옥이었습니다.
감옥 20년은 나 자신을 깨닫고, 타인을 이해하고, 관계의 의미를 발견한 ‘나의 대학시절’이었습니다. 우리들의 기쁨과 아픔은 대부분 관계로부터 오는 것이며 지혜와 능력도 개인의 내부에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로부터 온다는 것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나의 정체성(Identity)은 나의 사회성(Sociality)이라는 것이 면벽명상의 결론이었습니다.
- 감옥 생활의 가장 힘든 점은 나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의 고통이 나의 아픔으로 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관계의 힘이다. 누구도 자기자신의 고통은 참을 수 있다. 감옥은 첫째, 나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깨닫게 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머리로만 사물을 이해하는 창백한 시선을 지녔었는가를 알게 되었다. 한 목수 아저씨가 있었다. 하루는 그 아저씨가 집을 그리는 광경을 보게 되었는데 그 아저씨는 집을 주춧돌부터 그리기 시작해서 지붕을 마지막에 그렸다. 우리는 보통 지붕부터 집을 그린다. 목수 아저씨의 시선을 일 하는 사람의 시선이었다. 나는 이에 큰 충격을 받았다.
둘째, 남을 좀 더 온당하게 보게 된다. 감옥에 오는 사람은 어떻든 사회적 약자이다. 절도죄로 들어온 사람과 강도죄로 들어온 사람이 서로 간 크다고 얘기하는 곳이다.(절도는 강도보고 칼 들었다고 간 크다 하고 강도는 절도 보고 칼도 없이 남의 집 털었다고 간 크다 한다.) 나는 대전 교도소에 15년을 있었다. 그러다보니 터줏대감처럼 되어서 몇 번이나 나갔다 다시 들어오는 사람을 만나곤 했다. 그 중에 만기인사만 7번을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한 번은 내게 왜 이번에는 마음잡고 잘 해서 다시 들어오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렇게 기반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다시 들어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리를 잡아야 마음을 잡는다.” 사람을 말 하나, 행동 하나로 판단할 수 없다. 그 사람이 “발 딛고 있는 상황, 살아온 인생, 처지를 알아야” 한다.
같은 방에 한 할아버지가 있었다. 이 할아버지는 신입이 들어오면 항상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냈다.(권위가 없어서 신입이 아니면 들어주지를 않는 할아버지) 그런데 이야기가 반복될수록 이야기에 살이 붙어서 각색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각색이 거짓이라고 나쁘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각색은 반성이고 소망이다. 부끄러운 것을 빼고, 희망하는 것을 집어넣는 것이다. 그런데 거짓없는 할아버지의 인생은 어쩌면 사회와 시대가 각색한 것은 아니었는가?
온당한 시선이 관계의 시작이다.
나 역시 반성과 이해를 통해 감옥생활에 적응하고 왕따를 면하게 되었다.(축구선수로도 활약) 엄혹한 시베리아 같은 대전교도소에서 요시찰 대상인 사상범이면서도 50권의 이동문고를 운영할 수 있었던 것도 관계의 덕분이었다.(소매치기?들의 대활약) 지혜도 능력도 관계에서 나온다.
알튀세는 희말라야의 토끼가 조심해야 할 일은 평지 코끼리보다 크다는 착각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아픔도 기쁨도 관계에서 나온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가난의 고통이 늘 걷는 골목을 걸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돈이 없어서 늘 가던 가게에 못 가니까 주인이 다른 가게를 가는구나 라는 눈빛으로 바라봤고, 그 눈빛 때문에 다른 길로 돌아서 가게 되었다는 얘기)
감옥에서 독방에 있었던 기간을 모두 합하면 5년쯤 된다. 그 때 면벽 명상을 했다. 면벽 명상을 하면서 나는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떠올려보았다. 만났던 사람들과 나누었던 대화까지. 그러다가 어린 시절의 잊고 있었던 친구가 떠올랐고 어쩌면 그 친구의 행동과 말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는 것도 내가 경험한 모든 만남과 일을 통해 구성된다. 과연 ‘고유한 자기’라는 것이 있는지, 그 배타적 정체성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우리의 정체성, 문화 속에 있는 이 관계성이야말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다.
8. 오늘의 현실은 인간관계가 황폐화되고 있습니다.
맹자의 以羊亦之 (너무 길어서...)
인간관계의 황폐화는 사회성의 붕괴입니다.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가 곧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상품사회에서는 인간이 정체성(正體性)이 소멸되고 인문학적 가치가 실종됩니다.
- 이양역지는 만남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를 보여준다.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가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모스크바 지하철 얘기, 인천 가는 지하철에서 자리 빼앗긴 사건?)
자본주의 사회는 소비자와 생산자가 서로 모르는 사람으로 유통을 매개로 접촉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사회역사적 존재형식은 도시이다. 춤추는 사람과 춤동작을 구분할 수 없듯이 자본주의 사회와 도시적 삶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경제학 공식에 ‘쌀 1가마 값 = 구두 한 켤레’라는 것이 있다. 이 때 구두 한 켤레는 쌀의 등가물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의 등가물이 화폐이다. 아무런 반성없이 연봉으로 한 사람의 Identity를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정체성의 소멸이며 황폐화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회는 이미 사회가 아니다.
징역 17-18년쯤 되었을 때, 노모가 위독하셔서 귀휴를 갔다 돌아온 적이 있다. 그 때 가족 접견 대기실에서 한 젊은 여인이 처절하게 울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뒤로 그 또래의 젊은이를 보면 뒤에 그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만남이란 이와 같은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2차 대전 후, 전쟁이 잔인해진 점을 지적하였다. 이 잔인함의 원인도 만남 없음에 있다.
9. 실천적 관계론으로서의 연대(連帶)가 희망입니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노자)
물의 철학은 민초들의 철학입니다. 물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물은 하방연대(下方連帶)를 가르칩니다. 연대는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역량이 취약한 경우의 실천방식입니다. 연대는 실천의 방법이기에 앞서 그 자체가 삶의 내용이고 목적입니다.
- 관계론의 실천적 개념이 연대이다. 왜냐하면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역량이 모두 약하기 때문이다. 정치, 경제, 사회, 군대, 문화에 있어서의 완고한 지배권력과 신자유주의적 초국적 자본의 침투가 현재의 객관적 조건이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은 신규투자를 막고 주가만 관리하여 경영권을 위협하여 결과적으로 청년실업을 심화시키고 있다. 주체적 역량 역시 약하다. 과거에 비하면 사회 운동 각 부문의 역량은 조직화되었으나 중요한 것은 부문의 결합 양상(형식)이다. 일시적인 상조에서 연맹, 연합체, 정치적 구심점으로 나아가야 한다.
노자의 철학은 민초에 대한 희망을 보여준다. 물은 낮은 곳으로 가서(하방연대) 가장 낮으나 가장 큰 물, 바다를 이룬다. 상방연대는 결국 권력지향이며 정치연습일 뿐이다. 대기업노조는 중소기업노조로, 정규직은 비정규직으로, 노동운동은 농업, 빈민 운동 등으로 나아가야 한다. 물은 다투지 않는다. 무리하지 않고 채우고 돌아가며 모험주의와 기회주의를 배격한다. ‘또박또박’ 해야 한다. “연대는 삶이다.”
10. 현실을 직시하고 근본(根本)을 키워야 합니다.
석과불식(碩果不食)은 절망의 언어이지만 동시에 희망의 언어입니다. 절망으로부터 희망을 읽는 일이 우리의 몫입니다. 석과불식은 구조를 직시하고 근본을 경영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 석과는 씨과실이다. 왕필은 이 구절은 ‘씨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라고 적극적으로 해석했다. 씨과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주역의 박(薄: 아마도?)괘(가장 어려운 괘)의 제일 위 양효가 바로 석과이다. 어려움 속에서도 남겨진 석과를 희망으로 만드는 방법을 읽어야 한다.
열매가 다 떨어지고 씨과실만 남았을 때, 가지는 오히려 선명하다. 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사회의 근본적 구조를 직시해야 한다. 우리의 식량자급률은 27%에 불과하다. 우리는 전혀 자립의 능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이다. 우리사회는 신자유주의의 커다란 톱니바퀴 주변을 도는 작은 톱니바퀴와 같다. 정신없이 빨리 돌아야 큰 바퀴의 속도에 맞출 수 있으니 균형발전을 고려할 여력이 없다. 서울, 수도권 중심의 집중, 효율만을 생각하다보니 환경, 교육, 교통 등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떨어지 잎사귀는 뿌리를 거름한다. 주역의 복(復)괘의 제일 아래 양효(땅 속에 묻음)는 뿌리를 상징한다. 사회의 뿌리(근본)는, 즉 가장 큰 자원은 사람이다. 이 근본을 붙잡아야 한다.
11. 양심(良心)을 지키고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가장 양심적인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진정한 자부심은 자기의 이유를 기반으로 하여야 합니다. 자기(自己)의 이유(理由)가 바로 자유(自由)입니다.
- 양심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다. 그러니까 양심적인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다. 교도소에서 만난 사람 중에 피를 판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너무 가난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돈을 벌지 못하면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른 아침 병원으로 달려가 피를 팔았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때 저는 피를 뽑기 전에 찬물을 가득 먹으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안 받았습니다.”라고 했다. 이 말은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는 말이다. 찬물을 마신다고 피가 묽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것을 몰랐던 이 사람은 자기 행동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대학시절 학생써클운동을 할 때, 우리는 사람이 부족했다. 그래서 진보적인 사람에게 매달리기도 했다. 그 때 진보적 사고, 사명감, 능력을 갖춘 사람은 정말 귀한 사람이었다. 감옥에서 나왔을 때, 그 진보적인 사람들은 모두 출세하고 그 자리에 남아있지 않았다. 오로지 순하고 양심적인 사람들만이 남아 있었다. 이것 역시 놀라운 발견이었다. 양심적인 사람이 강한 사람인 것이다.
‘어린 요한’이라는 동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산책을 하다가 아버지가 아들에게 지팡이로 독버섯을 가리키며 “얘야, 저건 독버섯이니 먹어선 안된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독버섯이 충격에 혼절을 했다. 친구 버섯이 아무리 너는 친절한 친구라고 위로해도 독버섯은 그 충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자 친구 버섯이 “그건 사람들이 하는 말이야.”라고 말했다. 독버섯이라는 것은 식탁의 논리, 인간의 논리다. 버섯은 버섯의 말을 들어야 한다. 누구나 자기 이유를 가져야 한다. 자기 이유가 곧 자유이며 어려움을 이겨내는 가장 큰 힘이기 때문이다.
12. 길의 철학을 가져야 합니다.
小狐汔濟 未出中也 濡其尾 不續終也(주역 화수미제 괘)
도로의 속도와 효율은 자본의 논리입니다. 길은 그 자체가 가치입니다. 인간적 원리입니다. 과정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무엇이 변할 때 사회가 변하는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인간은 다른 어떤 가치의 하위(下位)개념이어서는 안됩니다.
君子不器(논어)이어야 합니다.
- 주역의 화수미제 괘는 64괘 중 마지막 괘이다. 이 괘는 미완성 괘이다. 옛사람들은 이 역시 개인 윤리로 생각하여 작은 실수로 일을 끝마치지 못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나 역시 젊은 날에는 일의 마지막을 조심하고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이제 생각해보니 이 괘는 세계의 변화를 설명하는 괘였다. 세계에 완성은 없다. 궁극적 목표도 없다. 모든 것은 과정일 뿐이다. 그러니 그 과정을 아름답게, 충실하게 해야 한다. 우리의 ‘일’은 장기적이고 강고한 것이므로. 길은 수단이 될 수 없다. 길은 그 자체가 삶이며 만남이다. 길은 효율을 최우선하는 도로가 아니다. ‘도로’의 마음을 버리고 길의 마음을 가져라.
출소 후에 내가 제일 먼저 쓴 글씨가 '여럿이함께'다. 한 후배가 방법론은 있는데 가치지향성이 없지 않은지 물었다. 나는 이 속에 목표도 함께 있다고 말했다. 목표가 밖에 있다고 생각지 마라. 건축의지를 해체하라. 여럿이 함께 가면 길은 그 뒤에 생긴다. 여럿이 함께는 만남이고 관계이며, 삶이고 연대이다. 그 속에서 아름다우면 된다. 그러니 잘 하고 오래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20세기는 권력의 세기였다. 그러나 어떤 권력도(파시즘이나 프롤레타리아 독재 권력)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했다. 오로지 영원한 반란만이 사회를 변화시킨다. 비인간적 과정을 거쳐 그 생산물을 분배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인간은 소외된다. 인간화가 중요하다. 인문학적 가치가 복권되어야 한다. 성취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군자는 불기라 했다. 용도가 정해진 전문가를 추구하는 것도 자본의 논리다. 전문가는 역사적으로는 노예적 윤리였다. 동양에서는 문사철시서화를 강조했다. 이것이 인간이다. 書如人 이라 했다. 예술은 인간성과 결부되지 않는다면 가치가 없다. 그림의 어원은 그리워함이다. 그러니 우리시대가 가장 그리워하는 것을 그려내야 한다. 인간의 얼굴을 튼튼하게 그려내는 일이 그것이다. 인간을 기준으로, 다른 어떤 것의 하위가치도 아닌!
13. 성찰은 영원한 가치입니다.
厲之人夜半生其子 遽取火而視之 汲汲然 惟恐其似己也(장자)
자신에 대한 냉정한 직시입니다. 그리고 해방적 언어입니다.
- “불구자가 밤에 아이를 낳았는데 급히 불을 들어 아이를 보았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자신을 닮았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 말을 자신의 불구를 통절하게 깨닫는 성찰의 이야기이다. 환상을 깨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람시는 완고한 라틴 유럽에 절망하여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없다면 진지라도 만들어라.”라고 말했다. 환상을 깰 수 있는, 서로를 깨워주는 ‘진지’를 삶 속에서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