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드무비 >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 자의 사랑 노래 - '질투는 나의 힘'
오늘 아침 우동을 끓여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데 12㎏을 감량하고 코를 더 오똑하게 세우고 나온
여자 탤런트가 한 호텔을 빌려 친한 동료들을 모아놓고 자축 파티를 열고 있는 장면이 나왔다.
순간적으로 화가 솟았다.
'아니, 지금이 어느 때인데 저런 일을 저렇게 버젓이 해도 돼?'
그리고 나는 거친 동작으로 텔레비전을 끄고 작은방에 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니, 그런데 상관도 없는 남의 일에 왜 그리 화가 났을까?
새삼스럽게 남의 일에 왈가왈부하고 싶은 건가?
지구 반대편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어도 우리는 잠시잠깐 걱정하고 기도할 뿐,
곧 아침 겸 점심으로 너구리를 삶을까, 짜파게티를 끓여 먹을까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그 여성 연예인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어제 나는 남편의 바바리코트를 꺼내입고 기다리고 고대하던 영화의 시사회장에 참석했다.
얼마전 한 이너넷 신문에 쓴 슈미트에 관한 영화 에세이를 보고 <질투는 나의 힘> 영화기획사 측에서
로드무비 기자(이렇게 송구할 데가!)에게 메일로 초청장을 보내왔던 것이다.
겨울 끝자락부터 여름 직전까지 주야장창 입고 다니는 검정색 면점퍼가 하나 있는데
어제는 왠지 멋을 좀 내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감독 박찬옥, 영화배우 문성근과 배종옥, 박해일 등이 무대인사를 한다잖는가!
그들이 어두운 객석에 파묻힌 나를 찾아와 악수를 청할 리 없지만 최선(?)을 다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참석하고 싶었다.
그런데 보온을 위해 속에 덧대어 놓은 모직을 모르고 벗기지 않아서 아주 진땀을 흘리고 다녔다.
어제 날씨는 또 얼마나 화창했는가!
기자하면 깃을 세운 바바리가 연상되어 어제 굳이 그걸 입었던 거지만 더 강력한 이유는 최근
살이 너무 많이 쪄 몸에 맞는 옷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내가 왜 조금 전 버럭버럭 화를 내면서 텔레비전을 껐는지 아실 것이다).
어쨌든 어제 오후 나는 마이 도러를 이웃 동의 남자친구 엄마에게 맡기고, 남편의 바바리를 입고
무척 흥분하여 영화 시사회장에 참석했다.
감독과 배우들이 무대인사를 하는데 놀랐던 것은 흥분을 누르고 아주 침착하고 담담하게 인사를 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배종옥이 너무 예뻐서 또 한 번 놀랐다.
이 영화가 나의 흥미를 끈 첫번째 이유는 기형도 시인의 시 제목을 그대로 갖다 썼기 때문이었다.
다음으로는 박찬옥 감독이 여성이라는 것, 홍상수 감독의 조감독이었다는 것, 그리고 평소
호감을 느끼고 있던 배우들… 이유를 대려면 끝이 없다.
한 달 전 3월 7일은 기형도 시인의 14주년인가 15주년 기일이었다.
그가 죽기 얼마 전 한 문예지에 발표한 시 몇 개 중 <질투는 나의 힘>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1989년 그 해 나는 한 출판사의 편집실에 근무했고, 그의 시를 읽고 너무 좋았던 나머지 복사하여
수첩에 붙이고 다니며 읽었다.
격무에 시달리다 보면 문학이고 나발이고 귀찮을 때도 있는데 기형도의 시는 어쩐 일인지
내 마음에 쏙 들어왔다.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영화 속 청년 이원상(박해일)은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 청년이다.
냉소적이고 냉담하다.
원상을 배반하고 다른 남자에게 간 여자가 계속 전화를 걸어 무슨 말을 해보라고 다그친다.
(웃기고도 슬픈 장면이다).
그에게는 정말 이미 끝난 일인데 말이다.
미련은 오히려 그를 떠난 여자에게 있는 것처럼 보인다.
"뭘하고 있어?" 하는 그래도 한때 사랑했던 여자들이 걸어온 전화에 대고 그는 방 닦고 있다고
무심하게 대답할 뿐이다.
그는 순수해서 상처받기 쉬운 타입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상처를 받는 건 그의 여자들이다.
되는대로 말하고 연애를 저지르는 것 같은 일견 무책임해 보이는 중년의 편집장 한윤식(문성근)이
오히려 원상과 비교하면 성실하고 친절하다. 타인에게나 자기 스스로에게나…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은 듯한 여자 박성연(배종옥)의 매력에 영화를 보면서 새삼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는 길거리 리어카에서 오뎅을 베어물며, 우리 여관 가요~ 하고 말한다.
그 목소리에는 아무런 욕구도 묻어 있지 않다.
분방한 것 같지만 제일 삶에 성실하고 솔직한 사람이 여주인공이다.
사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언젠가 우연히 만나면 인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직 마음을 못 정한 사람을 보았다.
한 잡지사의 편집장이니 그가 기자들과 함께 시사회장에 나타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때 <안토니어스 라인> 시사회를 같이 보고 시시덕거렸던 생각도 났다.
영화 속이든 현실이든 사람 관계 쓸쓸하기는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 기형도가 살아 있었으면 지금쯤 영화 속 한윤식과 같은 모습이 되었을까?
스물아홉에 죽은 시인의 지금 모습은 상상이 잘 안 된다.
극장 밖을 나와 근처의 조그만 회원제 책방에 들렀다.
그런데 반갑게도 책꽂이에 내가 작년과 올해 교정본 책들이 대여섯 권 정도 꽂혀 있었다.
친구라도 불러내어 시원하게 맥주 한잔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나는 얌전하게 책 몇 권을 골라
집으로 오는 전철에 올랐다.
허무하고도 도통한 듯한 매력적인 여성을 영화에서 만나고 돌아가는 길….
그런데 나는 너무 피곤해서 눈이 퀭하게 패이는 느낌이었다.
남편의 겨울 코트를 입고 땀을 한 되는 좋이 흘리며 돌아다녔으니 그럴 만도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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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4월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을 시사회로 보고 와서 쓴 글.
어떻게 2년 전이나 5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추레하게 입고 고개 숙이고 혼자 돌아다니는 건
똑같을까? '살이 너무 쪘다'고 혼자 궁시렁거리는 것도......